〈 136화 〉2구역(15)
[관계도]
카야 : 5.5*
셰이 : 5*
일루미나 : 4*
‘뭐냐. 뭐냐고.’
처음에 관계도 항목이 생긴 후, 엄청 빨리 올라가는 거에 비해 생각보다 별 거 없어서 신경을 껐었다. 근데 셋 모두의 수치 옆에 *가 붙은 건 둘째 치고, 카야의 관계도가 이상했다. 분명 관계도 수치는 5까지라고 적혀있었는데, 5.5는 뭘 의미하는 것인지. 하필 이곳에서 이게 떠오른 이유는 무엇인지,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그나마 추측하자면 관계의 깊이와 마음가짐 정도인데… 설마 파밍을 위해 잠깐 사라졌던 그 순간이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일까?
‘모르겠다.’
중요한 건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였는데, 그녀들의 프로필이랑 보유 스킬들을 다 살펴봐도 변한 건 없었다. 드러나지 않게 변하고 있는 중인 건가?
‘나쁜 게 있진 않겠지 설마. 마이너스도 아닌데.’
여기 들어와서 처음 생긴 항목이라지만, 그래도 시스템에 속한 항목인 이상 상상을 벗어나는 기상천외한 무언가가 일어나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셰이랑일루미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카야는 계속 눈여겨봐야겠어.’
움찔거리는 카야의 귀를 쓰다듬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
[최후의 도피처의 비밀을 파악했습니다.]
[최후의 문지기를 격파했습니다.]
[모든 용사들의 체력과 멘탈리티가 일부 회복됩니다.]
[최후의 도피처가 폐쇄됩니다.]
상당히낯부끄러운 재정비를 마친 우리는 비밀방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몇 줄의 메시지와 함께 우리가 나왔던 문이 쿠르르 소릴 내더니 벽 속으로 파묻히듯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니 4인의 생존자들에겐 그나마 남아있던 마지막 흔적을 우리가 없애버린 것 같아 찝찝했다.
[체력]
셰이 : 17/24
카야 : 19/20
유진 : 9/20
일루미나 : 12/15
[멘탈리티]
셰이 : -24
카야 : -5
유진 : -13
일루미나 : -37
체력과 멘탈리티를 확인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회복 효과 덕분에 나를 제외한 이들의 체력이 준수한 수준으로 회복됐다. 휴식처보단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거기에 만약 다음 전투에서 일반 괴물을 만난다면, 스톨링을 통해 일루미나의 절현 페널티를 상쇄하고 활력의 선율로 체력을 올리는 꼼수를 사용하는 방법도 미리 생각해두었다.
“히잉….”
“왜 그래.”
“베이파… 어느 정도 고치긴 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선율을 짜내긴 무리라서.”
“괜찮아. 급할 거 없어.”
어차피 절현 페널티는 4턴 지속이었다. 지금 뭐 어떻게 만져본다 해서 고쳐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실망도 없었다. 울적해하는 일루미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일반 괴물이라도 튀어나와 스톨링을 하다보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보스만 아니라면, 4라운드 정도는 버프 없이 어떻게 버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표기된 체력 상태와는별개로 체감상의 몸 상태는 양호했다. 내심 쌓였던 성욕과 오랜 피로를 한꺼번에 풀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지금 바라는 건 단 하나. 정예 괴물방이 등장하질 않는 것뿐이었다.
“저, 헨드릭.”
“어?”
“어제 일 말인데, 그….”
지잉-!
“큭!”
“헨드릭!?”
머리를 쿡쿡 쑤시는 통증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화들짝 놀라 다가오려는 일루미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마찬가지로 내게 다가오던 카야와 셰이는 내 모습을 보고는 이유를 파악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일루미나를 떼어내고는 주위를 경계했다.
‘스카우팅이 발동되는 건 무조건 환영할 일이지만, 이 개 같은 고통은 어떻게 못하나?’
송곳이나 커터로 푹푹 쑤시고 헤집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 상당한 현기증까지 동반되니 죽을 맛이었다. 허나 점점 밝혀지는 미확인구역이 넓어질수록 돌파 성공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거였다. 순간의 고통을 못 참아서 망칠 수 없었다.
‘이 앞에 갈림길이 있고. 왼쪽 길이 오른쪽 길보다 살짝 어두운 걸 보니 오른쪽 길로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어떻게, 이게 진짜로?
“…대박.”
“대장?”
“대박!”
“대장님?”
“대박이라고!”
몸을 벌떡 일으켜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을 껴안았다. 셰이였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마주 안아주었다. 고갤 돌려보니 카야랑 일루미나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머리를 부둥켜 쥐고 주저앉았다가 갑자기 대박이라고 외쳐대서 그런 거 같았다. 푸흐흐, 웃음이 나왔다.
“대장….”
“잘 봐.”
종이를 꺼냈다. 즉석에서 우리 용사대가 지나온 길을 그렸다.
2-0에서부터 2-3까지, 그리고 비밀방에서 나온 이후부터 앞에 밝혀진 갈림길과 두 개의 방까지. 약도가 완성되자 동료들의 표정 또한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정말 대박, 입니다.”
“진짜 대박이네요!”
“대박인 거야?”
“그럼!”
무려 방을 두 개나 스킵했는데, 대박이 아니고 뭐겠어?
막연히 2-4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우리는 사실 2-6으로 향하고 있던 것이었다.
‘고마워요, 비밀방!’
반 포탈 및 반 휴식처.
순수 포탈이었으면 네 개나 다섯 개도 뛰어넘는 것도 있었으나 아티팩트들을 얻은 시점에서 포탈은 바라지도 않았었는데….
그때 갈림길 진입을 포기했다면?
갈림길 선택을 셰이에게 맡기지 않았다면?
참고로 그때 내가 고르려 했던 갈림길은 오른쪽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자.다시 가보자.”
“예, 대장.”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도박에 성공해서 큰 보상을 얻었으니, 이 상승세를 이어나가되 방심은 하지 않는 것. 그걸 상기하면서 전진했다.
**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어쩌면 좋을까.’
따스한 햇살과 공기, 졸졸졸 흐르는 강과 거울같이 고요하면서 깨끗한 호수. 잔바람에 흩날리는 풀과 꽃잎들이 은은한 향을 내는 곳, 그 한가운데서 한 여자가 엎드린 채 무언가를 골몰하고 있었다.
‘한 아이를 편애하는 건 옳지 않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네.’
여자는 손에 둥그런 구슬 같은 걸 쥐며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그 구슬 안에는 철퇴를 들고 전투복을 차려입은 회색 머리의 수녀가 있었다.
- 라엘라시여, 모자란 딸에게 힘을 내려주소서.
“으응… 어쩔까…?”
여자는 고민에 빠졌다. 저 아이에게 힘을 내려주는 건 어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쉬운 일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 아이가 있는 곳은 지상이 아니라 던전 안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예전보다 한 층 더 깊은 곳이었고,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을 내려줘야 했다. 하지만 여자가 가진 힘은 무한이 아니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보기엔 전지전능한 존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 아이가 원하는 만큼 힘을 내려주게 되면, 최소한 다른 아이 셋 정도는 방관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
‘그치만, 저 아이가 걷고 있는 길의 험난함과 도달점을 생각해보면….’
다른 아이 셋과 비교해서,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갈팡질팡했다. 손을 쥐었다폈다했다. 이렇게 고민하는 것 자체가 전지전능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었다.
- 크윽… 죄송합니다, 대장.
“아….”
결국 타이밍을 놓쳤다. 자신의 힘을 바라던 아이의 철퇴는 별다른 힘을 내지 못하고 괴물의 갑옷에 튕겨나갔다.
“지금이라도.”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 응? 티티? 어쩐 일이야?”
엎드려있는 여자 바로 옆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내리꽂히더니, 그 속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장신의 여자가 걸어나왔다. 티티라 불린 여자는 구슬을 힐끗 보더니 엎드려 있던 여자의 엉덩이에 걸터앉았다.
“티, 티티!”
“라엘라 이 바보 같은 년아. 그 아이가 힘을 바랄 때마다 그렇게 뭉텅이로 건네주면, 끝까지 도달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도… 저렇게 고생하는 걸 보면.”
“우리들의 길을 걷기로 각오한 아이들 중, 고생 안 하는 이들이 어디 있어.”
“그러는 너도 셰이라는 아이한테 얼마 전에.”
“그땐 지상이었어. 그리고 그만큼 그 아이가 엄청나게 노력하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 던전 안이야. 그녀석의 영역이라고.”
“으응….”
“하아… 게다가 모르는 건 아니잖아? 만약 큰 힘을 내려줬는데 그 아이가 죽거나 변절하기라도 한다면, 그만큼 우리에게도 상당한 타격이 올 거라는 거.”
“당연히 알아. 하지만.”
라엘라는 여전히 구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맹랑한 아이와 함께하는 이 아이라면, 정말로 그놈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하. 우리에게 툭하면 장모님이라 부르던 그 아이 말하는 거지?”
“응. 그 이방인 아이라면.”
시종일관 회색 머리의 수녀를 비추고 있던 구슬의 시야가 조금 넓어졌다. 그러자 수녀 뒤에서 수녀에게 격려하고 있는 검은 머리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둘의 기운을 목도하고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어. 거기에 내 아이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또 던전을 끝까지 돌파하려는 것도 진심이잖아.”
“흥. 위급할 때만 기도하는데 무슨.”
“그래도 진심이잖아. 게다가 장모님이라니, 우리가 언제 그런 소릴 들어보겠어? 재밌는 아이잖아.”
“흥….”
티티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티티.”
“아무튼 안 돼. 지금도 힘을많이 쏟고 있는 편이라고 너.”
“그것 말고 다른 이야기야.”
“뭔데.”
“이 아이… 날 믿고 따르는 마음은 그대로야. 근데, 저 아이에게서 희한한 기운이 섞여있는 것 같아. 이게 뭘까? 변절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신경 쓰여.”
“어디 한 번 봐봐.”
티티는 아예 라엘라 위에 엎드리고는 구슬을 가로챘다.라엘라가 내려오라며 바동거렸지만 능숙하게 자릴 잡은 티티가 구슬에 비친 회색 머리 수녀를 뚫어지게 관찰했다.
“….”
“어때? 뭐가 좀 보여? 알 거 같아?”
“흐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줘. 안 그럼 쫓아낸다?”
“이거, 언제부터 그랬는데?”
“응? 아아, 얼마 안 됐어.”
“네가 말한 그 이상한 기운, 내 아이에게도 조금 보이는 거 같은데. 네 아이에 비해 미약하긴 하지만.”
“뭐? 정말? 그래서?”
티티는 미간을 찌푸렸다. 라엘라가 언급한 이상한 기운을 발견하자마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말 이게 가능하긴 한 이야기인 걸까, 이게 사실이라면 신성을 발휘하는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하는 걸까 고민됐다.
“떠오른 게 있는 거지? 그치?”
“있긴 있는데.”
“말해줘.”
“이것 참.”
“빨리이!”
티티가 한숨을 쉬며 구슬을 돌려주었다. 구슬의 시야가 조금 더 넓어져서 황금빛 머리 성전사까지 보이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네 아이랑 내 아이, 저 둘에게 새로운 믿음이 생긴 게 아닐까 싶은데.”
“응?”
“우릴 그대로 섬기고 있으니 배교는 아니야. 하지만 네가 말했던 이상한 기운. 정말 미세하긴 하지만… 그 맹랑한 이방인과 연결되어 있어. 너도 자세히 봐봐.”
“……진짜네.”
“말은 믿음이라고 했지만, 단순히 동료로서의 전우애일지 남녀사이로서의 무언가를 나태나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보통 동료나 남녀 사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어.”
티티가 일어났다.
“가려고?”
“나도 내 집에서 자세히 살펴보려고. 무슨 영향이 있을지 살펴봐야지. 너도 잘 살펴봐.”
“알았어… 고마워 티티.”
“에휴.”
티티는 빛과 함께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라엘라는 구슬의 초점을 회색 머리 수녀가 아닌, 검은 머리 남자에게 맞추었다. 그를 바라보는 초록색 눈동자가 침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