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9화 〉2구역(8) (129/218)



〈 129화 〉2구역(8)

[<갈림길>에 입장했습니다.]

‘갈림길? 여기서 갈림길이 뜬다고?’

갈림길은 여러 이벤트 중 하나였다. 체감상 공포의 상자방이  확률보다 훨씬 더 드물게 뜨는, 나름 레어 이벤트라고 할 수 있었다.

“대장, 여긴?”

“갈림길이야. 그러니까….”

 몇 개를 뛰어넘을 수도 있고, 비밀방을 찾을 수도 있고, 고약한 함정이나 괴물을 맞닥뜨릴 수도 있는… 다른 형태의 복불복 이벤트였다.

하지만 모든 이가  번씩 상자에 손을 대야 했던 공포의 상자방과는 다르게, 갈림길은 그 어떤 곳으로도 들어가지 않을  있었다.그렇게 되면 갈림길은 그대로 소멸, 그 경우 더 롱 테러에서는 용사대 전체의 체력과 멘탈리티가 소폭 감소됐었다. 아마 체력은 최대 체력의 10%정도, 멘탈리티도 10 정도 까였던 것 같다.

동료들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녀들도 고민에 빠졌다.

포기할 경우,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긴 하지만  하나를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돌파할 수 있다.

도전할 경우, 포기했을 때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고 어떤 것도 못 얻을지도 모르지만, 더 적은 대가로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도 있었다.

 롱 테러에서 갈림길로 이득을 본 것 보다는 데여본 적이 더 많았던 나로서는 웬만해선 거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멘탈리티가 엉망이었다. 셰이가 –70이었고 일루미나는 –74. 1이 아쉬운 상황에 10이 까인다면. 아니, 최고난도라서 그 이상이 까인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일반 괴물이 나타났다면 스톨링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루미나의 선율로 멘탈리티를 어느 정도 치유했을 텐데, 갈림길은 포기하는 그 순간 수치만 뚝 깎여버리는 거였다. 2-3에서 멘탈리티가 –80대가 두 명이다?

‘씨발 벌써부터  꼴이 될 순 없어.’

던전은 언제나 상황을 극한으로 몰았고, 내 판단도 정석보단 도박수로 기울었다.

원래였다면  고민 없이 거르고 벌써 2-4로 향했을 우리.

같이 1구역을 돌파했었던 카야와 셰이도 나와 비슷한 고민에 빠진  같았다. 그녀들도 지금 우리 상황이 ‘정석적’으로 해결하기엔 미래가 암담하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대장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음 같아선 여길 빠르게 돌파하고 다음 방으로 가고 싶긴 해. 근데… 만약 이 다음 방에서 아까 같은 놈이 또 튀어나온다면….”

“으음.”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일루미나를 제외한 우리 전부 잠식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1구역에선 후반부에 잠식되기도 했고, 내가 각성해서 그나마 돌파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나까지 잠식됐었다면… 아마 셰이는 정신이 붕괴 되서 그때 죽었을 것이다.

“미치겠다. 진짜 미치겠어.”

이래서 사람들이 신을 찾는 건가? 답을 정하긴 어렵고, 뭘 택하든 좆될 거 같고. 차라리 누군가 답을 정해준다면,  되면 찬양하고 잘 안 된다 하더라도 책임감은 줄일 수 있으니까.

‘어찌하는 게 좋을까요, 라엘라님. 유스티티아님.’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유리할 땐 안전하게, 불리할 땐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동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들어가자. 갈림길에.”

“…네, 대장님. 준비됐어요.”

“대장의 뜻대로.”

나는 다시 일루미나를 업었다. 그녀는 스스로 걷겠다 했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그녀의 걸음속도는 내가 업고가는 것에 비해 너무나 느렸다. 그 속도에 맞춰서 이동하는 건 그 자체가 답답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멘탈리티 하락이 문제였다.

왼손으로 일루미나의 엉덩이를 확실히 받쳤다. 미안함에 머뭇거리던 그녀가  팔로내 목을 껴안았다.

“출발.”

[<갈림길>에 진입했습니다.]

짧은 메시지와 함께 마냥 어둡기만 했던 주변에 급격한 변화가 생겼다. 아무 것도 없던 방에 삽시간에 갈림길이 생긴 것이었다.

갈림길은 삼지창 날처럼 세 갈래로 나뉘어있었다. 물론, 각 길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나타내는 이정표 따윈 없었다.

결국은 운, 복불복이었다.

‘씨발 운빨좆망겜어디 가지… 그래….’

나는 평소에 운이 그리 좋은 편이아니라 생각했다. 태어난 것도, 그딴 모친에게서 자라야만 했던 것도, 하다못해 더 롱 테러를 수천 시간 플레이하면서도 운빨로 이득을 본 것보단 손해를 더 많이 봤으니까.

과감하게 갈림길에 진입은 했지만, 어느 길에 들어갈지는 나보다 운이 좋은 사람이 골랐으면 했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아니었다. 정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이벤트에 도전한 만큼, 이 선택 하나가 이번 던전행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있었다.

예를 들어 6눈을 꼭 띄워야 한다면, 평소에 주사위를 잘 굴리는 사람에게 주사위를 맡겨본다는… 그런 거다. 그래. 책임 회피가 아니라 나름 확률론에 의거한 전략적인 판단이다.

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셰이.”

“네?”

“네 감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

“대장님?”

그러니 여기선 잠시 활약했던 세스티아를 제외하면 굴림의 평균 눈과 승수가 가장 높은 셰이의 행운을 믿어보기로 했다.

“제가요?”

“그래. 나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네 감으로. 그 길에 뭐가 있든지 군말 없이 따를 거야. 결국, 이것도 내 명령이니까.”

“….”

셰이는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을 앙다물더니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셰이가 선택한  가운뎃길이었다. 우린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힐끔 뒤를 돌아보자 우리가 출발했던 곳은 어둠으로 가려져있었다. 다시 돌아갈 길은 차단된 셈이었다. 손과 등에 느껴지는 일루미나의 무게감과 귓가에 직접 느껴지는 그녀의 숨결, 일행의 발소리만이 지금 우리가 직접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걸 증명해주었다.

셰이가 선택한 길엔 아무 것도 없었다. 적어도 수십 분 동안 걸었는데도.

최소 30분 이상은 걸은 거 같은데 함정도, 괴물도 안 보인다?

‘각이다. 포탈, 아니면 비밀방 각이다!’

물론 여기는 던전이었다. 확신은 금물이었다. 하지만… 행복 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셰이. 혹시 뭐 보이는 거 있어?”

“아뇨. 아무 것도….”

잠시 더 롱 테러에서 갈림길이 어떻게 묘사됐는지를 떠올려보던 나는 괜히 설레발치지 않고 계속 묵묵히 걸었다. 말로 꺼내면, 또 부두술이 걸릴 것 같았으니.

「던전 안에 그토록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니. 그 알 수 없는 길 위에서 말라 죽는  알았는데… 천운이 도왔어.」라던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걷기만 하다가 죽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방을 들르지 않고 우회하는 길이었을 줄이야.」등의 대사에 담긴 뉘앙스를 보면, 우리도 꽤나 각오해야 할 것 같았다. 설정상 더 롱 테러에 등장하는 용사들은 거진 다 베테랑들이었고, 그들의 입에서 천운이니 그렇게 오랜 시간이니라는 말들이 나오는 걸 보면….

“헨드릭….”

“어.”

“나… 안 무거워…?”

“뭔말을 하나 했더니. 별로 안 무거워.”

“쿡쿡… 무겁긴 하나보네…?”

“빈말은  하는 성격이라.”

일루미나와의 대화에 정적이 깨졌다. 원래라면 조용히 하라고 타일렀겠지만, 기나긴 행군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잡담을 묵인했다. 그녀가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타이밍이 꽤나 절묘했다.

“중갑을 입고 있던 셰이는… 꽤나 무거웠었지.”

“대, 대장님?”

“동의합니다. 그때의 셰이는 힘도 빠져 있던 때라 훨씬 무거웠었습니다.”

“언니?!”

내 묵인에 카야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합류하고 셰이가 리액션을 보이자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용사대의 분위기가 조금 이완되었다. 베스티아 타락 사건  도중 알  없는 공간에서 몇 시간 씩 몇 번을 루프했던 것처럼, 몇 시간을 걸어야할지 모르는 지금 상황에서 일반 통로를 걸어갈 때와 똑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일루미나를 받치는 손을 바꾸었다. 그녀는 엉덩이에 닿는 감촉이 부끄러운지 내 목을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가 물었다.

“헨드릭은… 돌아가면 뭐할생각이야?”

“뭐? 벌써 그런 걸 묻는 거야?”

“아니, 세일럼이 아니라… 네가 말했던 지구라는 곳 말이야.”

“그니까 그건  먼 미랜데.”

“먼 미래니까 말해보는 거야. 저번에 이세계니 뭐니, 생존을 위해 던전을 돌파한다느니 마니까진 들었지만… 이제는 단순히 돌아가는 것만이 목표는 아닐 거 아냐…?”

“그때도 말했지 않았나? 나 혼자 돌아갈 바에야 너희들과 여기에 있겠다고.”

“만약 같이 갈 수 있다면? 그때는?”

“뭐?”

같이… 돌아간다고? 지구로?

생각 밖의 일이었다. 나야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개념이니까 그럴 수 있다 쳐도, 이 세계 출신인 그녀들에게는 새로운 전이니까.

‘아냐. 생각해보면 나도 완전한 전이라고 하기 뭐한게, 영혼만 딸려왔잖아. 그럼 지구로 다 같이 간다고 해도….’

말로 내뱉어 찬물을 뿌리진 않았다. 어차피 상상은 상상이고, 시간 때우기용 대화이지 않은가. 휴식처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휴식처에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힘들고 지칠 때 가끔하곤 했던 행복한 상상의 실타래를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깜짝 놀랄만한 것들이 많아. 먹을 것부터 시작해서 가구, 건물, 생김새, 종교,문화, 그 외에 즐길 거리까지… 나야 세일럼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봤기에 빨리 적응했지만, 너희들은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걸?”

“그 정도로 많이 다른 세계입니까?”

“그래. 그리고… 내 진짜 모습도, 이 육체와는 많이 다르지.”

삐쩍 마르고, 볼품없고, 우중충하고, 거기도 작…다기 보단 이 몸에 달린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 그녀들이  외모를 보고 날 사랑해주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구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리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별 게 다 걱정이네요, 대장님은. 대장님의 육체가 어찌 변해도 제가 따르고 제가 사랑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텐데.”

“오. 셰이.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아, 안 빨개졌어요.”

“열기가 여기까지느껴집니다.”

“어, 언니는! 카야 언니는 그럼 어떤데요!”

“저 말입니까. 저야 당연히….”

카야는 슬쩍 고갤 돌려 내 눈과 마주치더니 잽싸게 고개를 원위치했다.

“셰이랑 같은 생각입니다.”

“어? 언니도 얼굴 빨개졌는데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 거라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앗 뜨거. 언니 얼굴 위에 고기 구워먹어도 되겠는데요?”

“그러는 셰이 얼굴 위에는 주전자를 올려도 될 거 같습니다.”

둘이 서로 얼굴이 더 빨개졌네 어쩌네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잠시나마 멘탈리티 수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사주 경계는 대충하지 않는 게 숙련된 용사가 되었구나 싶었다.

“둘이 귀엽네….”

“넌  아닌 것처럼 굴어.”

“으응?”

“넌 아닌가봐?”

앞이 조용해졌다. 카야와 셰이가 나를, 정확히는 내게 업혀있는 일루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루미나가 움찔하는  느껴졌다.

“아니면 뭐 어때. 정신적인 사랑이 있는 거고, 육체적인 사랑도 있는 거고. 안 그래?”

“아, 아니야! 나, 나도 셰이랑 같은 생각이었단 말이야!”

“와. 귀가 정신없이 쫑긋거리는데요?”

“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는데?”

“시, 시끄러워….”

민망했는지 괜히 내 귀를 깨물은 못된 일루미나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녀의 얼굴에 맞닿은 뒷목에 열기가 느껴졌다.

‘멘탈리티도 거의  깎였고… 좋아. 이대로만 가자.’

휴식은 없었지만 좋은 분위기 덕분에 힘을 얻은 우리는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간마다 5분씩 쉬는 소휴식을 자그마치 9번 반복했다.

‘슬슬 쉬어야 하긴 하는데.’

강행군을 한 터라 몸이 지쳤다. 하지만 휴식처가 아니라 숙면까지 취하는 게 고민이 들던 그때, 스르릉 셰이의 발검소리가 들렸다.

“셰이.”

“대장님.”

그녀의 클레이모어가 앞을 가리켰다.

“괴물입니다.”

처음 보는 종류의 괴물이, 어떤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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