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2구역(7)
‘미친,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릴 한 거지?’
잠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두 무릎을 꿇은 것도 모자라 스스로 눈을 파내려고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나.
‘아. 카야랑 셰이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셰이는 검날에 제 목을 들이밀고 있었고, 카야는 철퇴를 들고 부들대고 있었다.
“카야! 셰이!”
“속삭임이… 속삭임이….”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아…?”
나 못지않게 자해를 시도하려던 그녀들도내 목소리에 동작을 멈추었다.
캉-!
클레이모어랑 철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그녀들도 믿을수 없는 것 같았다.
“어, 어째서… 죽을 뻔 할 때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
[막대한 원혼으로부터 비롯된 공포가 용사들의 마음속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셰이 멘탈리티 – 22]
[카야 멘탈리티 – 12]
[유진 멘탈리티 – 21]
[일루미나 멘탈리티 –23]
[셰이가 상태이상 ‘세뇌’에 저항합니다.]
[카야가 상태이상 ‘세뇌’에 저항합니다.]
[유진이 상태이상 ‘세뇌’에 저항합니다.]
[일루미나가 상태이상 ‘세뇌’에 저항합니다.]
[일루미나의 체력이 1 감소합니다.]
[남은 체력 11/15]
무릎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나와 마찬가지로 잠시 현실을 부정하고 있던 카야와 셰이가 고개를 홱 내 쪽으로 꺾였다. 그녀들의 표정은 굉장히 절박해보였다. 내가뭐라고 해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아니. 적어도 이번엔 난그럴 자격이 없어.’
나도 그녀들과 똑같았다. 일루미나의외침이 없었다면, 저놈이 건 세뇌에 꼼짝도 못할 뻔했다. 내가 그녀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외친 건, 몸에 밴 반사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나는 말 대신 전방을 가리켰다. 그녀들의 고개가 힘없이 돌아갔다.
“일루미나….”
“일루미나 언니….”
일루미나는 언제 그렇게 소리를 질렀냐는 듯, 시체처럼 늘어져있었다. 그녀가 저 정신 나갈 것 같은 합창을 어떻게 이겨냈는진 모르겠지만, 몸이 서서히 관통당하는 끔찍한 고통을 일시적으로 극복하고 우리에게 정신 차리라며 일갈했다. 그런 그녀의 정신력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처음이니 그럴 수 있다고, 조심하고 정신 바짝 차리며 경계하라고 계속 충고했던 게 우스울 정도로.
그녀의 체력이 또 금방 줄어들고 있었지만 죽지 않았다. 멘탈리티 상태도 많이 위험해졌지만 터지진 않았다.
그래도.
이번 일격에 목숨을 걸겠다.
“견디지 못하는 시련의 끝은 죽음이지만, 시련을 겪고 견디는데 성공하면… 그만큼 강해진다고 하지.”
차분해졌다. 아니, 강제로 차분한 감정을 유지했다. 그러기 위해 공포와 분노를 비롯한 모든 감정들을 한데 억눌렀다. 억누른 감정들은 한데 뭉쳐 휘몰아쳤다.
“곧바로 죽이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주마.”
휘몰아치는 분노를 이용해 온몸에 한계까지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는 것하고 데미지하고 상관관계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러지 않고서야 이 분노를 도끼에 제대로 담을 수없을 것 같았다. 광분해서 피아구분 못하는 광전사가 아니라, 오로지 괴물새끼의 대가리만을 정확히 깨부술 현상금 사냥꾼이었다.
‘넌 내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모욕감을 줬어.’
[대가리 분쇄]
코를 찌르는 일루미나의 피냄새를 애써 무시하며, 힘껏 점프했다. 2m가 약간 안 되어 보이는 예술가놈의 대가리를 찍기 위해, 도끼와 하나 된 내 몸이 정점에 도달한 그 순간.
“뒤져!!!”
도끼를 휘두르는 팔에 짜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압도적인 일격!]
[유진이 공포의 예술가에게 5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2/113]
[공포에 물든 괴물을 압도하는 일격에 분위기가 반전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6]
[카야 멘탈리티 +6]
[유진 멘탈리티 +7]
[일루미나 멘탈리티 +5]
“흐으아아아악…!!!”
“꼴 좋다 이 씨발새끼가!!!”
시종일관 여유롭게 예술가 코스프레를 하던 놈의 모습이처음으로 망가졌다. 피가 철철 흐르는 제 머리를 부여잡고절규하는 걸 보니 이제야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흡족했고, 데미지를 보니 이제야 제 몫을 한 것 같아 조금 안도하기도 했다.
“아악….”
“일루미나!”
“일루미나 언니!!”
[공포의 예술가의 체력이 50%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전시대가 해제됩니다.]
[일루미나가 상태이상 ‘억류’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희소식인 건, 일루미나가 저 저주받을 갈고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었다.
힘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이쪽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일루미나를 셰이와 카야가 잽싸게 양쪽에서 부축해주었다.
“잘 버텨줬어. 정말 잘 버텨줬어. 그러니까.”
“아, 아직… 안, 끝났잖아…? 나, 나만… 쉬, 쉴 수 없어….”
하필 내 다음이 일루미나의 턴이었다. 그녀는 방금 억류 상태에서 풀려났기에 행동이 가능했다.
그녀의 등에 주먹만 한 구멍이뻥 뚫려있는 것만 아니었다면, 이토록 침통한 기분이 들진 않았겠지만… 카야도, 셰이도, 그리고 나도 다 겪었던 일이었고 일루미나 말대로 턴을 그냥 넘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버프를 바꿀 순 없어. 저 체력에 절현을 사용한다는 건 말도 안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야만 했다. 다른 버프로 바꾸면 속도가 떨어져 위험했고, 중첩 페널티 때문에 현재의 선율을 유지하거나 중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쉬어.”
“하, 하지만.”
“쉬어.”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려가며 베이파를 들어올리는 일루미나의 모습은, 카야나 셰이와는 또 다른 처절함을품고 있었다.
[일루미나가 턴을 넘깁니다.]
그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선 끌어안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예술가놈을 조질 절호의 기회가 코앞이었다.
왜냐.
내가 치명타를 드디어 터뜨리는 덕에 일루미나의 전시대가 사라지면서 예술가놈이 드디어 2열로 당겨졌으니까.
“카야.”
“예. 대장.”
셰이의 멘탈리티가 –50 밑으로 내려가면서 속도가 1 까이는 바람에 카야의 턴이 되었다. 그녀는 현재 습격의 선율 2중첩에 전투수녀의 서원 버프가 발려있는 상태. 일루미나가 당한 잔혹한 일에 전반적으로 멘탈리티가 까인 건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건아니었지만, 체력만큼은 상당히 채울 수 있길 바랐다.
“내가 뭔말하려는지, 알고 있겠지.”
끄덕-
카야의 손등이 힘줄이 튀어나왔다.
“조져.”
“대장의 뜻대로.”
카야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힘껏 철퇴를 들어올렸다. 철퇴가 예술가놈의 입을 강타했다. 더러운 이빨들이 살점과 함께 튀어나왔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치명적인 일격!]
[카야가 공포의 예술가에게 3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1/113]
[공포의 예술가가 죽었습니다.]
[괴물의 죽음에 용사들이크나큰 용기를 얻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6]
[카야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6]
[일루미나 멘탈리티 +5]
[카야의 서원으로 인해 현재 체력이 가장 낮은 셰이의 체력이 7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18/24]
[카야의 서원으로 인해 현재 체력이 두 번째로낮은 일루미나의 체력이 3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14/15]
입을 공격한 건 카야가 의도한 걸까.
좆같은 여유를 부리던 예술가놈은 연속 2치명타에 아무 말도 못하고 뒤져버리고 말았다.
“좆같은 새끼.”
뭉개진 입에 침을 뱉었다.
**
[보상 : 15골드, 붕대(2), 랜덤 스킬 스크롤, 기만의 가면]
2-2는 휴식처가 아니었다. 하지만 전진을 강행하기엔 무리였다. 당장 멘탈리티가 터질 것 같다거나 막판에 터진 카야의 힐덕분에 체력이 위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정신력 소모가 막대했다. 쉬지 않고 다음 방으로 향하려는 동료들에게 휴식할 것을 명령했다.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방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통로보단 여기가 안전했다.
“일루미나.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으응…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셰이. 꽉 고정해주십시오.”
“네, 언니. 일루미나 언니.조금만 더 참아줘요. 카야 언니. 시작해요.”
“으으으으으으읍!!!”
시스템상 일루미나의 체력은 14/15였지만, 실제로는 등에 큰 구멍이 생긴 중상자였다. 카야와 셰이가 일루미나의 로브를 벗기고 상처를 깨끗이 닦고 소독하려는 사이, 나는 보상을 확인하고 혹시나 놓친 건 없나 역겨운 시체들 사이를 뒤지고 있었다.
‘기만의 가면이라….’
[기만의 가면]
- 적용 대상 : 모든 클래스
- 상태이상에 걸린 괴물을 공격할 시 데미지 +10%
- 상태이상에 걸린 상태에서 피격시 방어력 –2
상태이상이라는 조건이 걸려있긴 하지만 10% 추뎀은 쏠쏠했다. 하지만 페널티도 있었다. 피격시 방어력 –2. 가장 높은 최대 체력이 24고, 가장 높은 방어력이 12인 걸 생각하면 이 또한 상당한 페널티였다.
‘이건, 상황 봐서 장착하는 게 낫겠어.’
셰이 또는 카야가 기절을 건 상황에서 내 극딜이 필요할 타이밍이 분명 한 번쯤은 올 것이었다.
[예술가의 기록(1)을발견했습니다.]
[예술가의 기록(3)을 발견했습니다.]
시체들과 작업대를 뒤져서 나오는 건 우리에겐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재료들의 신선함은 어쩌고, 비명 소리의 감미로움은 어쩌고, 남자 재료와 여자 재료의 차이는 어떻고, 신도와 불신자들의 차이는 어떻고… 아니 잠깐, 이 새끼 신도도 ‘조각’해버린 건가?
역겨움을 억누르며 배낭에 집어넣었다. 지금 당장은 쓸모없지만, 세일럼에 귀환하면 저것도 다 금화로 전환될 테니까.
“일루미나.”
“응급처치는 어떻게든 했는데, 고통이 심했는지 도중에 의식을 잃었어요.”
“너희들은? 특히 셰이, 넌 일루미나가 겪었던 고통도 같이 겪었을 거 아냐.”
“전 괜찮아요. 처음 겪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상처가 난 건 아니라서… 버틸만 해요.”
“…그래. 어쨌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는 거지.”
“네.”
“일루미나는 내가 업을게. 이제 전진해야 돼.”
일루미나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업었다. 그녀의 키가 상당히 크다보니 무게가 꽤 나갔지만 그나마 비무장이라 업을 만했다. 예전과 달리 카야가 대신 업겠다고 질투하는 일은 없었다.
[멘탈리티]
셰이 : -66
카야 : -36
유진 : -55
일루미나 : -70
[체력]
셰이 : 18/24
카야 : 16/20
유진 : 20/20
일루미나 : 14/15
카야의 뒤를 따라가며 컨디션을 체크했다. 체력 상태는 괜찮았다. 막판에 카야의 자해를 동반한 힐로 셰이와 일루미나의 체력을 채운 게 주효했다. 4의 체력을 깎고 도합 10의 체력을 채웠으니,순수 힐량만 따지면 6힐을 한 셈이었다.
허나 멘탈리티가 박살나있었다.
음유시인의 합류로 안정된 출발을 하나 싶었는데, 음유시인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그 안정은 거짓말 같이 사라졌다. 그나마 카야의멘탈리티는 안정권이었지만, 혼자만 안정권이어선 그리 큰 의미는 없었다.
‘예술가놈의 패턴이 너무 악랄했다…라고 변명하는 건 늦었고. 앞으론 여차하면 데미지 딜링이랑 혹시 모를 체력 교환을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루미나한테 수호를 걸어야겠어.’
“흐으으… 으으….”
“일루미나?”
“헨…드릭…?”
“그래.”
“으응….”
일루미나가 깨어났다. 마침 2-3의 문이 시야에 들어온 참이었다.
“내려줘….”
“설 수 있겠어?”
“서야지… 난, 짐짝이되기 싫어….”
“짐짝은 무슨. 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저기까지만 이렇게 가자. 문 앞에서 내려줄게.”
“아윽.”
문 앞에 도착한 후 그녀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잽싸게 부축해주었다. 카야랑 셰이가 상처를 다시 봐야겠다고 했지만 일루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조금이라도, 오래 있을수록,안 좋다고, 그랬잖아… 이대로… 갈 거야….”
“그래.”
첫던전행인데도 불구하고 상상 이상으로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는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며.
다 같이 문을 열었다.
끼이익-
[<갈림길>에 입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