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2구역(1)
세스티아에게 세 번째 보상으로 받은 금화를 가지고 각자의 주력 스킬을 몇 단계씩 업그레이드했다. 나는 ‘대가리 분쇄’, 카야는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셰이는 저번에 새로 깨우친 스킬인 ‘셰이의 집념’과 뎀딜 겸 cc기인 ‘정의의 심판’ 중에서 고민 끝에 ‘정의의 심판’을, 그리고 일루미나는 더한 고민 끝에 공격력과 명중률을 올려주는 ‘용기의 선율’을 업그레이드 했다.
[3스킬 대가리 분쇄(4)]
- 대미지 보정 +3.5(인간형일 경우 +7)
- 명중률 보정 +33
- 치명타 데미지보정 + 1
[3스킬.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4)]
-데미지 보정 +13%
- 명중률 보정 +28
- 5.6% 확률로 보스를 제외한 괴물 즉사
- 괴물 즉사 시 재행동
[3스킬. 정의의 심판(4)]
- 데미지 보정 +13%
- 명중률 보정 +18
- 일정 확률로 상태이상 '기절' 부여
- 일정 확률로 '심판의 낙인(대상 처치시 자신의 체력 3 회복)' 부여
[1스킬. 용기의 선율(4)]
- 모든 아군 멘탈리티 회복 +2
- 모든 아군 공격력 +3.5
- 모든 아군 명중률 +9
‘좋아. 개인 데미지 기댓값이 한 번 더 올랐어.’
선턴잡이인 내가 높은 확률로 선턴을 가져오면 제일 먼저 ‘수배범 발견’으로 낙인을 찍는다. 그 다음으로 속도가 빠른 일루미나가 용사대 전원의 속도와 치명타를 올려주는 ‘습격의 선율’을 연주하고, 빨라진 속도를 이용해 동료들의 턴을 앞당겨 먼저 때리고 본다. 만일 괴물놈의 속도가 빠르면 습격의 선율을 중첩시키고, 그게 아니라면 용기의 선율로 딜템포를 끌어올리거나 활력의 선율로 파티 유지력을 끌어올린다.
‘퍼-펙트. 좋아. 아주 좋아.’
일루미나가 들어옴으로 인해 딜링 플랜이 한층 매끄러워졌다. 물론 카야를 영입할 때도, 셰이를 영입할 때도, 세스티아가 임시로 합류할 때도 다 계획이 있었고 또 언제나 쌍욕 나올 정도로 고생했지만 이번은 달랐다. 4인 완성체제였다. 아르의 경우 종특도 종특이고 밸런싱이 극단적으로 치우쳐졌기 때문에 불안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1탱 1딜 2서폿. 카야의 경우엔 서폿이라기보단 딜러에 가까웠지만, 이번에 스킬을 갈아끼우면서 서포팅 능력도 많이 올랐다. 안정성이 확 높아진 것이다.
-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지금껏 겪어온 걸 생각하면 저 말이 떠오르지만 맞을 땐 맞더라도 최대한 덜 아프게, 최대한 덜 위험하게 맞기 위해 그동안 열심히 준비한 것이었다.
‘세스티아도, 아르랑도 인사 나눴고… 후우. 이젠 정말 2구역으로 갈 시간인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래도 불안했다. 또 안일하게 판단한 게 있을까, 빼먹은 게 있을까 계속 생각을 거듭했다.
“대장.”
“어?”
“긴장되십니까.”
“어…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불안하십니까.”
“좀.”
“저도 그렇습니다.”
“넌 안 그래보이는데.”
“대장이 있으니까.”
왜 그래 카야. 훅 치고 들어오고.
“그리고 동료들이 있으니까.”
“…그러네.”
“예전에 혼자 있었을 때에 비하면, 비록 앞으로 겪을 고난이 더 크고 험난할지라도 지금이 더 좋습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라면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은은한 그녀의 체향이 불안했던 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제 던전에 들어가면, 이 기분 좋은 냄새도 맡기 어려울 것이다. 괴물들의 피와 내장 냄새가 떠올랐다. 씨발, 갑자기 좆같아져서 카야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스읍- 하아-
음, 안정제가 따로 없구만!
카야는 부끄러웠는지 몸을 꼼지락댔지만 밀쳐내진 않았다. 귀가 빨개져있었다.
“카야.”
“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대.”
“…….”
꾸우우욱-
“사, 사랑엔! 사랑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야!”
단어 하나 빼먹었다가 ㅠ진이 될 뻔했다.
괜히 플래그 꼽는 거 같지만, 꼭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어째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플래그를 꼽는지 알거 같았다.
왜?
말하고 싶은, 말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 딱 느낌이 오니까.
“사랑해 카야.”
쪽-
눈이 반배는 커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만의 여신인 카야에게 바치는 의식이었다.
“저, 저도.”
쪼옥-
카야는 고갤 들어 내 입술에 보답해주고는,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사, 사랑해요. 유진.”
후우… 너무 귀여워서 3초 이상 눈 마주쳤으면 심장마비로 죽을 뻔.
카야 덕분에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었던 나는, 내일 셰이와 일루미나에게도 똑같이 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확실히, 꼼꼼하게 확인하자.”
“네, 대장님.”
아침 해가 떴다. 일찍 일어난 우리는 여관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소지품을 점검했다. 한 번 들어가면 자의로 나올 수 없고 상점은 랜덤으로 나타나니, 소모품 하나하나도 소중했다. 전투에서 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더라도 소모품이 모자라면 그건 또 다른 지옥이 펼쳐질 테니까.
“이상 없습니다.”
“이상 없어요!”
“여기도!”
“내 쪽도 이상 무. 좋아. 출발하자.”
꽤나 오래 묵었던 방을 나오는 기분이 묘했다. 내 집도 아니었는데 그새 정이라도 들은 건지.
1층에서 마주친 주인장은 완전무장한 우리들을 보더니, 우리가 사용하던 방은 가급적이면 비워놓겠다는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무뚝뚝한 그의 응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졌다.
“헨드릭, 헨드릭.”
“어?”
“던전 안에서 다른 사람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했잖아. 근데 만약에 만나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 고백’은 나중에 깨어난 일루미나에게도 똑같이 얘기했다. 그녀는 함께한 시간이 짧아서 그런지 카야나 셰이보다는 충격을 덜 받은 모습이었고,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거라며 별 신경을 안 썼다. 허무할 정도로.
어쨌든 일루미나는 날 편하게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녀가 언급한 건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동료 조우 이벤트였다. 그녀가 합류하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이미 4명 체제가 완성된 이상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왠지 던전 깊숙한 곳에서 사지가 쇠사슬에 결박된 공주나 여기사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로망을 갖고 있는 건 좋지만, 꿈 깨는 게 좋아.”
“치잇.”
이야기를 엮어내는 건 사람이지만, 이야기는 결국 이야기.
일루미나의 투덜거림을 흘러넘기며 던전 입구에 도착했다.
“다들, 각오는 됐지.”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다들 비장했다. 하필 키 순서대로 서 있어서 모양새가 조금 귀엽긴 했지만, 덕분에 긴장감이 살짝 풀렸다.
“가자.”
공포에 맞서는 용사들이 마침내 2구역 돌파를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
“이상 유무 점검.”
“이상 없습니다.”
1구역을 스킵하고 2구역 안전지대, 즉 2-0에 진입했다.
“으으,여기가 던전?”
“이제 시작일 뿐이에요, 일루미나 언니. 정신 바짝 차려요.”
“으응.”
던전이 초행인 일루미나는 귀를 이리저리 쫑긋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낯선 곳, 그것도 악명 높은 곳에 직접 들어오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압박을 받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이곳은 2-0, 랜덤으로 등장할 휴식처를 제외한 유일한 안전지역이니 그녀가 어느 정도 안정될 때까지 머무르는 것 정도는 상관없었다.
‘역시, 1-0과는 다르게 후퇴는 안 되는 거 같네.’
새삼 2구역에 들어왔다는 게 확 실감이 났다. 1구역을 통과했기 때문에 던전 입구에서 바로 2구역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설정상 2구역은 1구역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즉, 우리가 들어왔던 저 문처럼 보이는 곳을 다시 빠져나간다고 해도 절대 입구가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후아아… 응, 이제 됐어. 다들 미안해. 나 때문에.”
“아니, 괜찮아. 싸우다가 움츠러드는 것보단, 지금부터 미리 적응하는 게 좋지.”
“맞습니다. 게다가 일루미나는 던전이 처음인데다가 저번에 저희가 돌파했던 곳보다 더 깊은 곳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고마워….”
“그럼 대형을 갖추자. 저 앞부터는 진짜 던전이니까.”
일루미나를 감싸며 그녀를 위로해주던 카야와 셰이가 빠릿하게 일어나서는 1‧2열에 자리잡았다. 나는 카야의 뒤에, 일루미나는 내 뒤에 섰다.
“출발.”
2구역에서의 첫 명령을 내렸다. 1열의 셰이가 걸음을 옮기자 카야도, 나도, 일루미나도 앞사람을 따랐다. 고작 2-0에서 2-1로 가는 구간인데, 1구역보다도 훨씬 으스스했다. 단순히 오랜만에 와서 그리 느끼는 게 아니었다.
[한층 가까워진 공포가 용사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3]
[일루미나 멘탈리티 –4]
“으읏.”
“이건 정말 시작에 불과해. 깊은 곳으로 갈수록 더 심해져.”
“네, 아니, 으응.”
이야, 벌써부터 이렇게 좆같아질 수 있다니. 역시 던전이었다. 방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일루미나를 단속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조금은 익숙해진 것이었다.
뚜벅뚜벅-
부츠 소리가 음산한 복도를 울렸다. 아직 맞닥뜨린 괴물도, 함정도 없었지만 울리는 소리 자체가 우릴 습격하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던전 특유의 분위기가 그랬다. 어떠한 사소한 거라도 경계하게 만들었다. 공포의 속삭임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쓰읍.’
그래서 혀 차는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괜히 이동 중에 잡담을 금하려는 게 아니었다. 적절한 농담은 분위기를 이완시킨다지만, 여기선 그것마저 손해가 더 컸다. 차라리 좀 더 빨리 지친다고 해도, 정신이든 육체든 수축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았다.
스아아아-
해골이 간간히 널브러져있던 1구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피로 그린 것 같은 벽화가 듬성듬성 있었다. 벽화라고 말하기엔 그림의 수준 자체가 조악했지만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뭘 그린 건지는 알아볼 수 있었다.
- 가장 기나긴 공포가 끝내 세상을 뒤덮으리라.
개같은 공포포기무새관음증변태 새끼.
어쩌면 베스티아 타락 사건도, 그놈에게는 그저 유희거리였을지도 모른다. 베스티아의 몸에 잠시 강림했을 때도 그렇게 간절해보이지도 않았고, 애초에 그놈이 제 숭배자들을 아꼈다면그런 식으로 강림을 끊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놈은 정말로 자신이 없는 것이리라. 우리에게 소멸당할 자신이.
사람이라면, 필멸하는 존재라면 당연히 갖는 근원적인 감정이 공포이기에.
이딴 소리를 또 지껄이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라고 그 좆같은 목소리를 속삭일 것이다.
나나 카야, 셰이는 경험해봤지만… 일루미나가 걱정이었다.
‘아냐. 음유시인이잖아. 멘탈리티 유지만 어떻게 잘 하면 괜찮아.’
하지만 2-1에 도착하기도 전, 기분 나쁜 벽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 번 더 멘탈리티가 떨어졌고 이어서 셰이가 바닥이 불쑥 꺼지는 함정에 당하는 바람에 싸우기 전부터 용사대의 멘탈리티가 상당히 떨어져있었다.
“액땜, 그러니까 나쁜 일은 미리 겪었다고 생각하자. 박살내버리는 거야. 알겠지.”
“예.”
“가자.”
꼴깍 침을 삼키며 숨을 크게 들이쉰 셰이가 2-1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한층 더 음산해진 문소리와 함께.
“공포를… 받아들여라….”
“크르르….”
한층 더 좆같이 생긴 괴물이 우릴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