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마음가짐(14)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의 침묵은 날 괴롭혔다면, 지금의 침묵은 존나 쫄리게 만들었다.
‘셰이, 넌 아무 말도 안 해? 뭐라고 말 좀 해봐.’
아예 카야에게 맡기기로 한 걸까. 뭐, 둘 모두를 상대하는 것보단 하나가 그나마 낫지만서도….
“언니, 그동안 제가 말해도 되죠?”
“물론입니다.”
“대장님.”
“어, 셰이.”
“다른 세계에서 영혼만 왔다느니, 저를 포함한 이 세계 모두가 그곳에서는 어떤 유희였다느니… 잘 와닿지 않아요. 보수적인 성직자들이 대장님 말을 들었다면 거품을 물었을 정도로 해괴하게 들리기도 하구요. 엄연히 신들께서 존재하시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어쩌고저쩌고….”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
“전 그쪽으론 그리 깐깐하진 않아요. 당장 저부터 교리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고… 뭐, 어쨌든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이거예요. 변하지 않는 것.”
셰이는 오른손으로 카야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왼손으로 내 가슴을 가리켰다.
“대장님 스스로 말했던 목표. 그리고 언니와 저, 그리고 일루미나 언니에게 향할 마음과 용사대를 끝까지 이끈다는 책임감. 이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대장님의 진정한 정체가 이세계 사람이든 뭐든, 이름이 헨드릭이든 유진이든, 일루미나 언니를 여자로 받아들이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셰이.”
“대장님이, 제가 아는 대장님인 한.”
셰이의 황금색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이 비쳤다.
“변치 않아. 맹세….”
“그럼 됐어요.”
“뭐?”
“굳이 맹세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대장님이니까.”
“셰이!”
“그래도!”
셰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어깨를 꽉 쥐었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스승이었던 전사장이 쥐었던 자리와 똑같은 위치였다.
“전 카야 언니와는 다르게 참을성이 그리 좋지 못해요. 만약 언니든 저든 대장님이 마음 아프게 하면… 두 배, 아니 세 배로 갚아줄 거예요.”
“아, 알았어.”
“알겠어요?!”
“알겠어!”
“확실히 다짐한 거예요? 대장님 입으로?”
“그, 그래.”
“그럼 일단 전 끝!”
셰이는 여전히 손을 떼지 않았다. 왼손은 내 어깨를, 오른손은 카야의 어깨를짚고 있었다. 그녀의 왼쪽 손과 팔에만 힘줄이랑 근육이 잔뜩 튀어나와 있었다. 어깨가 비명을 질렀다.
‘참자. 참아야 돼.’
여기서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면 분위기 와장창 깨지는 거였다. 속으로 지금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던 때를 떠올리며 겉으론 최대한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8은화는 버린 셈 쳐야겠습니다.”
“카야?”
카야는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비어있던 내 반대쪽 어깨를 짚었다.
“돌아가겠습니다. 모두의 방으로.”
“카야!”
벌떡 일어난 나는 그녀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셰이는 처음에 가슴을 퍽퍽 쳐댔지만 결국 얌전히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큰 건을 무사히 해결했다는 생각에 들떠서 그녀들을 동시에 들려다가 고꾸라질 뻔한 걸 빼고는, 생각보다 정말 잘 풀렸다.
“헤으응….”
“….”
아직도 발정의 여운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눈앞의 여우하고 매듭을 잘 짓기만 한다면 말이다.
‘아. 생각해보니 계속 안에 싸질렀는데.’
에이.
아니겠지.
설마.
일루미나에게 다가간 나는 반사적으로 높이 솟아있는 엉덩이를 때리려다가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일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시간도 시간이니 자고 일어나서 이야기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맞아요. 저도 졸려요.”
“그래?”
“일루미나 옆은 대장이 지켜주십시오. 눈 떴는데 옆에 없으면, 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나도 눈이 반쯤 감기기도 했고, 또 그녀들도 모두 찬성해 만장일치가 된 이상 굳이 일루미나까지 당장 깨울 필요성은 사라졌다.
“잘 자.”
“안녕히 주무십시오.”
“잘 자요, 대장님.”
그녀들과 잠자리 인사를 나누고 조심스럽게 일루미나 옆에 누웠다.
“흐으으응….”
‘아니, 이 여우가?’
그러자 꼼짝도 않고 엎드려있던 일루미나가 코를 씰룩이더니 나한테 달라붙어 얼굴을 비비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감촉 자체는 나쁘진 않았지만 당장 자고 싶었다. 그래서 무시했는데, 계속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눈을 뜨고 고갤 돌려보니….
“헉!”
어둠속에서 회색 눈동자와 황금색 눈동자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씨, 씨발.’
올타임 넘버 5 안에 들어가는 공포였다.
**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모두.”
다음날 아침이라고 하기엔 뭐한, 그렇다고 점심도 아닌 애매한 시각.
가장 일찍 잠들었으면서 가장 늦게 일어난 일루미나는 느긋하게 브런치를 먹고 있는 우리에게 와서는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쿵 소릴 내며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어찌나 서글픈 목소리로 계속 사과를 반복하던지, 비련의 히로인처럼 보였다. 나는 말없이 다가가 벌어져 흘러내리는 그녀의 목욕가운을 제대로 걸쳐주었다.
“발정기라는 건 끝난 겁니까.”
“응? 으응… 해소, 됐어….”
“그럼 지금부터는 이성적으로 대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하겠습니다. 그 전에 일어나주십시오. 그 자세로는 서로 대화를 나누기에 불편합니다.”
“그, 그래도 어떻게.”
“저희에게 미안하다고 했으면,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으응… 그럴게.”
나는 다리를 후들거리는 그녀를 부축해 방금 전까지 내가 앉아있던 의자로 데려갔다. 그녀는 제 양쪽손가락을 교차시킨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일루미나.”
“으응.”
“당신이 어제 했던 말들, 진심입니까?”
“그건 맞아! 그, 그래도 너희들 입장에선 못되먹을 짓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자신. 죽을 위기에 처해도 동료를 믿고 동료를 위해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마음 같아선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만, 난 그렇게까지 굳센 사람은 아니야. 적당히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편하게 살려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 끝까지 함께 하기 위해서. 나만의 이야기를 엮기 위해서.”
“과도하게 욕심내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여자들의 시선이 순간 내게 쏠렸다. 일루미나는 꼬리를 바짝 세우며 빠릿하게 대답했다.
“응! 그건 당연한 거야! 사실 꼬리털을 싹 밀릴 각오까지 했었거든….”
잠시 털 하나 없는 그녀의 꼬리를 상상해봤다.
‘으음… 그건 좀, 왠지 털 싹 밀어버린 포메라니안 느낌일 거 같은데.’
그만하기로 하자. 내가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도중에도 그녀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우선 전 일루미나 당신의 영입을 찬성하는 바입니다.”
“…응?”
“당신이 대장과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지, 가령 여기서 더 깊어질지 아니면 어제일이 없던 일이 될지는 두 분이서 결정할 일입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카야!”
“대장과 용사대의 앞길을 방해하지 않는 한은.”
“언니.”
“예? 갑자기 무슨.”
“언니!!!”
“이, 일루미나?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일루미나가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카야의 품에 와락 안기고는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꼬리는 선풍기처럼 붕붕 돌아가고 있었다. 참 회복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수인이 원래 저런 건진 몰라도, 놀라운 건 몸짓이 아니었다.
“카야가, 일루미나보다 언니였어?”
“그러게요?”
역시 놀란 건 나만 그런 게 아닌 듯, 셰이도 둘을 빤히 바라봤다. 카야는 자신의 배와 가슴에 얼굴을 마구 문대는 일루미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힘을 주면 억지로 밀어낼 순 있는데, 분위기상 그럴 수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 이참에 나이나 물어볼까?’
나이가 뭐 중요하겠냐만은, 여자들 중 가장 키가 크고 또 성숙해보이는 일루미나가 그 반대인 카야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걸 보니 갑자기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난 한없이 진지했던 분위기도 좀 가볍게 할 겸, 총대를 메고 나이를 물어보았다.
“우응? 성년식 치른 지 7년? 아니 8년인가? 응. 8년이다!”
“성년식을 몇 살에 치르는데?”
“18살인가?”
일루미나 26살.
“전 올해 22살이에요.”
셰이 22살.
“나도.”
나(유진 기준) 22살.
일행의 시선이 카야에게 쏠렸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밝히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머뭇거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들 중 유일하게 그녀의 표정을 확인 못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언니느은? 언니 맞지?”
“아니 잠깐. 일루미나 너, 카야 나이도 모르면서 언니라고 부른 거야?”
“어린 사람 냄새하고 나이 든 사람 냄새하고 다르니까. 정확한 나이까진 몰라도, 적어도 내 또래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거 같아! 냄새가 그래! 이렇게 가까이서 맡아보니까 더 확실해졌어! 응!”
‘아니, 무슨 말 하는 건진 알겠는데… 기분이 너무 업되서 눈치가 증발한 거 같은데.’
당혹감에 물들어있던 카야의 얼굴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제 몸에서, 나이 든 사람의 냄새가, 난다는 겁니까.”
킁킁-
여전히 카야의 품에 안겨 코를 씰룩거리던 일루미나의 꼬리가 팔딱 섰다. 꼭 느낌표가 나타난 것 같았다.
안 돼. 그 입을 열지 마. 그 강을 건너지 마!
나랑 셰이의 입이 달싹였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으음, 이 느낌은, 적어도 오, 꺄아아악!!”
“….”
“…….”
어떠한 반응도 보이면 안 된다!
웃지도 말고 고개도 돌리지 마요!
나랑 셰이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우리 둘은 최선을 다해 아무 것도 못 들은 척했다.
카야는 비명을 지르고 기절해버린 일루미나를 안아들어 침대에 뉘였다.약간 내팽개친 느낌도 있었지만 당연히 못 본척했다. 눈깔이 돌아가고 온몸을 부들거리는 일루미나의 모습이 신경 쓰였지만….
“크흠.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그, 그래?”
“왜 그렇게 떨고 있습니까, 두 분.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 아니욧? 아. 아침 뭐 드실래요 언니?”
“방금 먹었지 않습니까.”
“아, 아하하하. 그, 그렇지 참! 어? 대장님? 어디 가세요?”
“잠시 화장실 좀.”
“대, 대장니임!”
미안하다! 셰이!
잠시 탱킹 좀 해줄래?
이곳은 던전이 아니었다. 후퇴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
카야에 이어 셰이도 공식적으로 찬성을 표하자 일루미나는 지금 이 날을, 이 사건을 이야기의 중심 사건 중 하나로 기념해야겠다며 베이파를 들고 작곡 삼매경에 빠졌다. 중간에 셰이가 눈짓을 줬고, 난 그녀들만의 시간을 위해 여관을 빠져나갔다.
“정말로 또 와주셨네요?”
“약속도 했잖아.”
내가 향한 곳은 라엘라님 수도원이었다. 우린 저번처럼 인적 드문 곳을산책했다. 이미 내 품속엔 그녀가 건넨 세 번째 보상, 금화가 두둑하게 들어있었다. 속으로 스킬 업그레이드를 마치고 슬슬 2구역에 가야할 타이밍을 언제 잡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세스티아가 달라붙어 팔짱을 꼈다. 압도적인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가시려구요?”
“어?”
“던전, 말이에요.”
“…어떻게 알았어?”
“그냥, 느낌이 그랬어요. 기다리던 보상도 받아서 기분 좋았을 텐데 표정은 꽤나 진중했으니까요.”
“그랬어? 티 안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보여요. 후후.”
세스티아는 슬며시 어깨에 머릴 기댔다. 반사적으로 밀어낼 뻔했지만, 참았다. 맞닿은 그녀의 피부에서 나에 대한 걱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바로 좀 전에 일루미나 사건도 있어서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려 했지만… 딱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를 마지노선으로 정했다. 다행히 스킨십은 더 나아가지 않았다.
“매일 기도하고 또 기도할 거예요. 무사히 돌아오시라고. 안 그러면 라엘라님 안 볼 거라고 투정도 부릴 거예요.”
“아니, 그건 좀 그렇지 않아?”
“라엘라님은 너그러우신 분이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야 라엘라님이 자애(철퇴)와 관용(물리)의 여신이긴 하시지만.’
말을 아꼈다. 그녀의 걱정이 고마웠다. 지금 동료는 아니었지만, 한 때는 동료였다. 그녀의 걱정이 기꺼워서 또 한 번 다짐했다.
“꼭 돌아올게. 라엘라님하고사이 멀어지면 곤란하잖아?”
“…후후, 그러네요. 아참, 헨드릭님. 새로 들어오는 자매님 중에 이름을 새로 짓고 싶어하시는 분이 생겼는데, 코르디아와 스티지아 중에 하나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어떤 게 마음에 드세요?”
“음? 그 중요한 걸 내 의견으로 정해도 되는 거야?”
“참고만 할 테니까요. 어서 말씀해보세요.”
“으음… 혹시 뜻이 있어?”
“있긴 한데 일단 딱 처음에 들었을 때의 느낌으로 골라보세요.”
“어감으로 고르라 이거지? 그럼, 코르디아?”
“코르디아… 후후. 네. 코르디아로 할게요.”
“어? 뭐야. 그렇게 간단히?”
“참고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랬지. 그래서? 코르디아는 무슨 뜻인데?”
세스티아는 말없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