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0화 〉마음가짐(13) (120/218)



〈 120화 〉마음가짐(13)

‘와… 진짜 뒤지겠네.’

과장이 아니었다.

발정난 여자 수인은 말 그대로 착정머신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음유시인이라서, 그나마 ‘이성적’인 수인이라서 이 정도에 그친 것일까?

저녁 먹기 전부터 시작된 짐승 같은 교미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자정쯤까지 이어졌다. 어림잡아서 반나절을 내리 한 셈이었다.

“아이고 허리야….”

기절해버린 일루미나를 씻겨주고 내 몸도 박박 씻었다. 그녀의 몸 곳곳에 말라붙은 정액이나 보지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정액을 계속 씻겨줄 땐 다 포기하고 그냥 드러눕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뻐근한 삭신을 이끌고 여관 주인장 대신 로비에 나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직원에게 물어 동료들이 묵고 있을 다른 방으로 향했다. 술도 함께였다.

‘자면 안 될 텐데.’

다행히도 시간이 좀 늦었지만 방 안에서 웅얼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카야. 셰이. 혹시 자?”

문 안쪽에서작게 들리던 말소리가 끊겼다. 내 말이 들렸다는 걸 확신하며 기다리자  문이 열렸다.

셰이였다.

“대장님.”

“음. 들어가도 될까?”

“…그러세요.”

셰이는 내 손에 들린 술병을 보고 의아해하면서도 몸을 비켜주었다. 카야는 침대 옆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상당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살짝 감긴 눈, 그리고 이불 모양을 보니 자기 직전이었던 모양.

반강제로 방에서 쫓아낸 주제에 숙면까지 방해한 최악의 짓이었지만, 지금 말하려는 건 꼭 지금 해야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다.

말없이 의자에 앉아 술병을 깠다. 퐁- 소리와 함께 독한 알코올이 코를 기습했다. 눈물이  고일 정도였다. 눈을 질끈감고는 병나발을 불었다.

‘쉣.’

좆같았다. 화끈거리고 맛대가리도 없었다. 맞은편에 앉은 카야랑 의자가 두 개뿐이라 가까운 침대에 걸터앉은 셰이가 날 빤히 쳐다봤다.

“후우우… 할 말이 있어.”

“듣겠습니다.”

“그 전에, 너희들 목걸이를 내게 건네줄 수 있겠어?”

“목걸이, 말입니까?”

“그래. 말하기 전에, 두 여신님께 맹세하고 싶어서.”

단순히 일루미나를 안은 것에 대한 변명을 내뱉으려고?

아무리 설득하고 싶다고 해도 그건 아니었다.

그녀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군말 없이 목걸이를 내게 건네주었다. 두 목걸이는 체온 때문인지 따뜻했다. 오른손엔 라엘라님을, 왼손엔 유스티티아님을 쥐고 맹세했다.

“라엘라님과 유스티티아님께 맹세하노니,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에 일체의 거짓이 없을 것입니다. 맹세를 어길 경우 한쪽 눈을 바치겠습니다.”

“대장!”
“대장님!”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다. 술김에 좀 세게 말한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이미 녹색과 은색 광채가 짧게 명멸했다. 맹세는 접수됐다. 여신님들께서도 여길  집중해서 보실 것이다. 돌이킬  없었다.

“뭐 어때. 어차피 거짓말 안 할 건데.”

“대체, 무엇을… 아. 설마.”

“네? 뭔데요? 네?”

목걸이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녀들은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었다.

“고백할 게 있어. 지금껏 말하지 못했던 것들이야. 말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타이밍을 찾고 있었지. 그게 지금이라는  좀 그렇긴 해. 아아, 음, 한두 개가 아니긴 한데… 우선 그래. 내 이름은 헨드릭이면서, 헨드릭이 아니야.”

“네?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원래 이름은 유진. 한 유진.몸의 이름은 헨드릭.”

말하기 직전까지 망설였던 입은, 독주 한 모금과 맹세 한 번으로 생각보다 쉽게 나불거렸다.

“알  없는 이유로 영혼만 이곳에 끌려온 이방인이야. 더 정확히 말하면, 이세계인.”

“……예?”

**

카야와 셰이는 방금  씻고 왔는지 촉촉히 젖은 머리카락의 헨드릭이방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주 약간은 짜증과 피곤함을 느꼈다. 지금은 다 잊고 깊은 잠에빠지고 싶었는데, 애써 감정을 가라앉혔는데 마음을 진탕으로 만든 장본인이 자기 전에 불쑥 쳐들어왔으니까. 갑자기 술은 또 뭐고.

하지만 그가 세상 진지한 얼굴로 로자리오에 맹세하고, 고백이라는 걸 하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짜증과 피곤함은 남아있지 않았다.

‘유진… 그게, 다 무슨 말입니까.’

‘대장님? 유진? 지구?   테러? 공포? 던전? 특징?’

자신의 귀가 잘못된  아니다. 술 때문인지 발음이 좀 꼬이긴 했어도 헨드릭의 입이랑 혀가 잘못된 것도아니다. 분명 말은 말인데, 이해가 잘 안 됐다.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나열하는 헨드릭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사이에 벽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러나저러나 목표는 똑같아. 던전을 끝까지 돌파하는 것, 그 목표의 기저엔  생존이 달려있다는 게 추가된 거지. 그러기 위해서, 그것도 가급적이면 아무도 안 죽고 돌파하기 위해 처음부터 최고의 동료들을 영입해서  가고 싶었어.”

더 롱 테러라는 게임, 임무, 전투, 특징, 클래스, 난이도.

“어느 게 운이 아니겠냐만, 카야 너랑 만난 것부터도 엄청 운이었지. 만약 카야 앞에 한 명이라도… 아니다.”

“한 명이라도?”

“…한 명이라도 더 뛰어난 용사가 있었다면, 지금의 인연은 없었을지도 몰라. 셰이도 천재라는 특징이 아니었으면,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을지도 모르고.”

스킬, 멘탈리티, 각종 보정치.

“단순히 그곳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너희와 함께 하느냐 둘 중에  곳을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고를 거야. 하지만 그것도 내가 살아야누릴  있는 거고,  셰이의 목표와도 일치해.”

가장 기나긴 공포. 복수.

“날 이곳에 떨어뜨린 놈이 누군지에 대한 확신은 없어. 이곳에 왔기에 너희를 만난 건 행운이라 할 수 있지만, 내가겪어야만 했던 육체적‧정신적 고통들을 떠올리면 치가 떨려. 나는 보란 듯이 던전을 아무도 죽지 않고 돌파하고 싶어. 끝내는 너희들과 함께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싶어.”

경험, 그리고 부탁.

“간접적인 형태지만 난 세일럼에 있는  누구보다 던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 물론 전투는 변수가많고 또 운적인 요소가 많이 적용되지만, 내 판단으로 위기를 극복한 적도 몇 번 있다고 생각하거든.”

세스티아, 아르, 그리고 일루미나.

“베스티아 타락 사건, 아르 사건, 그 외에 전투들을 겪고 난 후 결론을 내렸어.  번째 용사는 세스티아 같은 치유 수녀 아니면 음유시인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세스티아는 여러 이유로 합류가 불가능했고, 교단 관련 사람들이 많이 상한 상황에서 괜찮은 치유 수녀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르 덕에 운 좋게 발견한 일루미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뭐… 중간에 거절도 하고 여러 말들이 오고 갔지만 결국 너희들을 상처 입힌  변하지 않지. 좀 많이 소름인 게, 한 번 설득되니까 너희들이라면 날 이해해주겠지, 결국은 받아들여주겠지, 너희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일루미나도 친하게 지내겠지… 그렇게 생각해버렸다는거야. 웃기지도 않게.”

헨드릭의 두 눈은 여전했다.

오로지 진실.

“그래서 원래라면 네 번째 용사를 영입하고 깊은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말하려 했던 걸 다 밝혔어.”

“그럼, 왜 우리 둘에게만.”

“첫째, 일루미나한텐 미안한 얘기지만 그녀는 아직 너희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 둘째, ‘만장일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그녀에겐 지금 고백은 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리고 오늘 사건은 발정으로 인한 우발적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방출할 거야.”

헨드릭은 이걸로 이야기는 끝이라며, 속이 후련한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술병을 기울였으나 언제 다 마셨는지 술 한 방울 안 나왔다. 그가 혀를 찼다. 어쩐지 술 냄새가 더 진해져있다 싶었다. 그의 얼굴도 아까보다  붉어진  같고.

“미안해. 보잘 것 없는 놈이라서 미안해. 마음에 상처주는 나쁜 놈이라서 미안해. 그래도, 꼭 지금 얘기하고 싶었어. 자고 일어나면, 너희들이라면… 감정을 억누르고 내 말에 그냥 따라줄 거 같아서. 나 때문에 기분도 상했는데 의견까지 굽히게 하는 건  못된 놈이잖아. 그래서 그 전에 다 까발리고 싶었어. 혹시라도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모르는  빼고 다 답해줄게.”

그 말을 끝으로 헨드릭은 두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체….’


**

저질렀다.

정말 쓰잘데기 없는 것 빼고는 거의 모든 걸 토해냈다. 얘기하는 내내 카야와 셰이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반응도 거의 없었다.  새끼가 딴년이랑 떡치고 와서는, 잠자는 것도 방해하고 술 쳐먹고 뭔 개소릴 씨부리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후회는… 없다.’

상황과 맞물린 감이 있으나 어차피 얘기할 거였다. 며칠 전 카야랑 텐트에서 잤을 때 결심했던 걸 실행했을 뿐이었다.

그녀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그래서 우리 용사대의 운명은 어떻게  것인지는 지금 내 손을 떠났다.

 눈은 멀쩡했다. 당연했다. 거짓 하나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들은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았다. 내 말이 헛소리 같은데 헛소리가 아니라는 거니까.

빈 속에 독한 술을 들이켜서 그런가 속이 쓰리고 목이 탔다. 급격하게 피로감이 몰려왔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눈앞의 침대에 드러눕고 싶었다.

침묵이 날 괴롭혔다. 뭐라도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어떤 감정이라도 토해냈으면 좋겠다. 너무 피곤했다.

‘안 돼, 자면 안 돼.’

혀를 깨물었다. 의도했던 것보다 더 세게 깨물어서 존나게 아팠다. 살짝 피맛이 났다.

“유진.”

“……어?”

반쯤 졸면서 아릿한 피맛을 느끼고 있던 그때, 카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잠기운을 몰아냈다. 침묵을 깨서기도 했지만, 호칭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장도 아니고, 헨드릭도 아닌, 유진이라 불렀다. 모든 사실을 듣고 나서.

“사실,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다 물어보고 대답을 듣다간 날이 꼬박 새겠지요. 그래서 일단 제가 이해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만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유진, 당신이 했던 말 자체는 여신들께서 전부 진실임을 보증하셨으니 구태여 참거짓을 추가로 가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꼭 그게 아니였더라도 전 당신의 말을 믿었을 테지만.”

카야가 물었다.

“유진, 당신은 끝까지 던전행을 포기하지 않을겁니까. 설령 던전을 공략하지 않아도 당신의 생존에 아무 지장이 없다해도?”

“포기하지 않아. 이미 나만의 목표가 아니니까.”

“유진, 당신은 우릴 영입하고 나서 후회한 적이 있습니까.”

“없어. 단 한 번도.”

“유신, 당신은… 진심입니까. 저와 셰이와 세스티아와 아르와 일루미나와 그 외 모든 인연들. 전투와 일상들.  모든  그저 당신이 말했던 더 롱 테러라는 게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진심이야. 지구에 있을 때보다, 여기서 구른  달이 훨씬 더 살아있는 것 같거든. 죽도록 아프고, 정말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말이야. 설령 여기가 진짜로 게임  세계에 불과하더라도…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더라도. 게임 경험과 지식을 이용한 적은 있어도, 내가 겪고 있는 걸 게임으로 치부한 적은 없어.”

“…유진, 당신은. 만약에.”

카야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에서 피가 날 정도로 한동안 짓씹던 그녀가 마침내 마지막처럼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

“만약 우리 중  명이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한다면, 혹은 한 명을 제외해야만 한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거야….”

뜸 들이는 거 보고 대체 뭘 물어보기에 저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었다. 긴장이 확 풀렸다.

“안 죽고 ‘우리 모두’가 해결할 거야. 그 외의 결과는 상상하기도 싫어.”

“….”

“날 진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해준 너희들이 없으면, 살아가는데 딱히 의미가 없을 테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