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마음가짐(9)
‘미치겠어… 이대로 가다간 정말 미쳐버릴 거 같아.’
요즘 일루미나의 머릿속은 온통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헨드릭.
정확히는 그의 냄새.
벌써 며칠이나 지났건만 그 냄새는 잊어먹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맡았을 때보다 더 달콤했던 것 같고, 더 깊은 향의… 아무튼 점점 더 좋은 냄새로 변하고 있었다.
‘또 맡고 싶다… 핫! 지금 무슨 생각을!’
카야에게 두들겨 맞을 땐 살기 위해서 정신없이 구르다보니 그때만큼은 잊을 수 있었지만, 지옥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격하게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반동이 더 심하게 왔다.
‘왜 하필, 지금인 거야… 일생일대에 중요한 시기인데.’
그 원인을, 성인이 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난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발정기.
수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
우스갯소리로 인간은 발정기가 없는 동물이라든가, 사시사철 발정기라는 말이 떠돌고는 한다. 근데 사실 이건 반만 맞는 말이었다.
수인이라고 해서 딱히 발정기가 아닐 때에 성욕이 없는 게 아니라는 점도 있지만….
발정기에 돌입한 수인의 발정을 한 번이라도 직접 목격하거나, ‘당해본’ 사람이라면 절대 그 말에 찬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그냥 단순히 성욕이 차올라서 평소보다 많이, 격렬하게 섹스하고 싶다, 정도였으면 굳이 발정기라는 말을 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을 같이 쓰니 혼자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람이 바뀐다.
자손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것 외에는 전부 쓸데없는 일이다. 몸은 알아서 절정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페로몬을 훨씬 더 많이 뿜어내고 더 민감해진다.
만일 적절한 상대를 찾지 못하면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이며, 그럴 땐 혼자서라도 달래야 한다. 정을 뿌리지 못하거나 정을 받지 못하는 행위는 불완전연소와 같아서, 더 많은 체력적 소모를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번식을 위해 한껏 변화했던 신체가 풀리면 그 반동이 상당했다.
“하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발정하기 전에 창관이라도 가야 할까?
그건 싫었다. 딱히 순결을 막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지금 용사대에 들어오고 나니 좀 꺼려졌다. 헨드릭도, 카야도, 셰이도 모두 착하고 진지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창관에 가면 자신만 뭔가 더러운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애초에 가본 적도 없긴 하지만.
‘어차피 돈도 없고, 창관 가게 돈 좀 빌려달라는 것도 좀 그래.’
그럼 결국 여느 때처럼 혼자 해결해야 하는데….
아침에 각자 흩어지기 전 행해졌던 저녁 사오기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심부름을 해야 했던 일루미나는 일단 빨리 돌아가서 허기부터 채우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리 몸이 이상해져도 다른 사람에게 ‘발정’할 것 같다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기는 굉장히 부끄러웠으니까.
“에흐, 나 왔….”
“어? 버, 벌써 왔어? 자, 잠깐만! 셰이! 옷 가져다줄 테니까 안에서 입고 나와!”
- 네~
“어, 응.”
식욕으로 어떻게 참아보려던 생각은, 욕실에서 막 나온 헨드릭과 마주친 순간 정말 하찮을 정도로 쉽게 깨졌다. 비록 밑에 속옷은 입고 있었지만 보기 좋게 자리잡은 근육들과 촉촉하게 젖은 머리, 그리고속옷으로도 미처 가리지 못한 그 형태는…….
꼴깍-
입이 바짝 말랐다. 꼬리뼈가 아팠다. 아랫배가 부르르 떨렸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애써 억눌렀던 발정이 확 피어올랐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일루미나는 황급히 저녁용 먹을거리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잠시 바람 좀 쐬다가 온다는, 그녀가 방금 전까지 심부름 갔다 온 걸 생각하면 상당히 어색한 말을 대충 휘갈기고 방을 뛰쳐나갔다.
“일루미나, 카야는 어디 갔… 어? 뭐야. 분명 있었는데? 어디 갔지?”
“언니? 언니이?”
**
“하아, 하아, 하악.”
일루미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온몸에서 확 올라오는 열기를 어떻게든 분출해야 했다. 안 그러면 지나가던 아무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거나, 여관으로 돌아가서 헨드릭을 덮쳐버릴 것 같았다.
그런 모습에 헨드릭이, 카야나 셰이가 실망해버린다면?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들과 얼마 동안 지내보니 절실히 느낀 것 중에 하나가, 지금껏 만나본 사람들 중에 그들이 열 손 가락 안에 뽑힐 정도로 좋은 이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실적이나 목적을 생각하면 단연 독보적인 첫 번째 손가락이었고. 그런 이들의 눈에 들어 함께 하게 되었는데, 성욕에 미친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조만간던전에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인데, 성욕에 미친년이 동료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부담스럽겠나.
특히나 그때 헨드릭과 함께 무척이나 야릇한 냄새를 풍겼던 카야는 말할 것도 없고, 셰이도 방금전에 욕실도 같이 들어가는 사이였다.
일루미나는 수인이었다. 동시에 여우였다. 만약 자신이 발정해 헨드릭에게 달려든다면, 카야와 셰이가 보여주고 있는 호의가 단숨에 박살나리라는 것쯤은 바로 파악했다. 거기에 분하게도 카야랑 셰이 둘 다 힘으로도, 인연으로도 이길 수 없었다.
‘아, 아냐! 정신 차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관이나 자위를 생각하던 일루미나는 어느새 헨드릭을 덮치는 쪽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하지만 이미 전신에 퍼져 있는 열기는 금방 뇌를 다시 말랑말랑 뜨겁게 만들었다. 이성을 그리 쉽게 차릴 수 있었으면 애초에 수인의 발정기가 그리 악명 높진 않았으리라.
‘나도 꽉 안겨봤으면… 내 머리랑 꼬릴 쓰다듬어줬으면… 내가슴이랑 엉덩이를 만져줬으면….’
“일루미나. 저녁 사러 가야 한다고 먼저 가지 않았습니까?”
“아, 어. 아? 카야?!”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얼굴이 많이 빨갛습니다.”
“아, 아냐! 아무 것도. 그, 그나저나 카야 넌 언제 오려고?”
“그렇지 않아도 곧 가려고 했습니다.”
일루미나가 무작정 달려온 곳은 카야와 함께 훈련하던 공터였다. 땅에 꽂은 철퇴 위에 로자리오를 올려놓고 기도를 올리던 카야가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물었다.
“아니면, 제게 할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반사적으로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려던 일루미나는 입을 다물었다. 헨드릭의 첫 번째 동료라던 카야라면… 이야기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날카로운 계산이 섰다.
‘카야와 셰이의 강함을 동급이라고 본다면, 카야랑 셰이가 같은 남자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이렇게까지 원만하게 지낼 수 있는 건… 카야가 너그러운 성격이라서가능한 거겠지!’
나름 일리 있는 생각이라며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던 일루미나는 결국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 나 말이야. 수인이잖아. 그치?”
“예. 보기 드문 종족이라 처음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하, 하하. 그렇긴 해.”
카야는 여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루미나는 잽싸게 따라붙었다. 로브 속에 감춰진 꼬리가 붕붕 정신 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혹시 그것도 알아?”
“뭘 말입니까?”
“모든 수인들은 일정 주기마다, 그, 발정…기가 있다는 거.”
“발정기?”
“으, 으응. 그 왜, 인간들이랑 다른 몇몇 종족 여자들이한 달에 한 번 하는 달거리 같은 건데. 그 주기가 되면, 어어, 그게 괴, 굉장히 많이 하고 싶어져. 굉-장히.”
“발정기에 그거라면… 성행위 말입니까?”
“으, 으응.”
“으음, 일루미나는 상당히 곤란하겠습니다. 그래서 혹시 지금이 그 발정기라는 겁니까?”
“…으응.”
카야의 어조는 평탄했다. 걸음걸이도 여전했다.
“일루미나.”
“어, 응!”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밝혀주셔서 고맙습니다.”
“으, 으응?”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말씀하십시오. 제가 대장은 아니지만 같은 여자로서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루미나는 카야의 말을 덥석 물었다. 만약 자신의 꼬리가 아까부터 바짝 수직으로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 뇌에서든 입에서든 한 번쯤은 필터를 거쳤을 텐데.
헨드릭의 몸을 본 것으로 리미터가 풀려버린일루미나는, 카야의 말에 최후의 리미터까지 풀려버렸다. 그녀의 뇌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호르몬에 실시간으로 점령당하고 있었다.
“그, 그럼! 헨드릭을 하루만 빌릴 수 있을까?! 무, 물론 본인의 의사도 물어볼 거지만! 응!”
“….”
“하루는 너무 긴가? 으음, 그럼 한나절도 괜찮은데!”
“….”
“아, 음. 사실 반나절 정도면 급한 불 정도는 끌 수 있을지도…?”
그새 헨드릭과의 폭풍 같은 교미를 상상하던 일루미나는 한 박자, 아니 몇 박자 뒤늦게 전신을 엄습하는 섬뜩한 기운을 알아차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발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뒤로 돌리자,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 쌍의 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아, 아아. 카, 카야. 그, 그러니까. 내, 내 말은.”
카야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일루미나는 뇌가 찬물에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일루미나 당신은. 당신의 발정 해소를 위해. 대장을 사용하겠다는 겁니까.”
“그, 그런 뜻이 아니라아!”
“빌리다니. 대장은 물건이 아닙니다. 거기에… 그런 표현을 사용한걸 보면 대장과 저 사이를, 그리고 대장과 셰이의 사이를 알고 있는 듯한데.”
“아, 아아.”
일루미나는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최악이었다. 이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아니었지만, 아무런 밑작업도 없이 이렇게 대놓고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최악이었다.종족을 떠나 어떤 여자가 자신의 임자를 다른 여자에게 성욕 처리를 위해 하루를 내줄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정말 미칠 것 같은 게, 이런 상황에서도 눈을감으면 헨드릭의 몸과 냄새가 떠올랐다. 그와 몸을 섞고 싶고, 그의 정을 받아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상상은 더한 상상을 낳고, 더한 상상은 더한 발정을 일으켰다.
그렇게 조심한다고 했는데, 발정기에 알몸에 가까운 헨드릭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마주쳤으니… 그녀로서는 정말로 운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발정기의 피크가 확 당겨졌으니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일루미나의 사정이었다.
“여관에 돌아가는 대로 대장에게 글자 하나 빼먹지 말고 그대로 고하십시오.”
“응…?”
“당신은 대장이 영입한 동료입니다. 그리고 전 대장이 아닙니다.”
“아.”
“제 손에 들린 게 진짜 철퇴인 것이 정말로 다행입니다.”
무심코 휘둘렀다가 죽어버리면 큰일이니 자제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카야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지만, 일루미나의 귀는 밝았다. 그녀는 여관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기억도 안 났다.
똑똑-
- 누구세요?
“접니다.”
- 아 언니! 들어오세요!
- 어서와.
카야가 턱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대장 앞에서, 그리고 셰이 앞에서도 똑같이 말하십시오.”
일루미나는 저 문이 꼭 재판장으로 들어가는 문처럼 보였다.
‘아아… 응, 어서 왔어. 헨드릭.’
그 와중에 헨드릭의 목소리에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아랫배가 쿵쿵 울리고 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보지에선 애액을 싸지르는 자신의 몸뚱이를 도저히 제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