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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화 〉마음가짐(3) (110/218)



〈 110화 〉마음가짐(3)

‘던전 자체를 격파… 그것도 끝까지? 진심으로?’

헨드릭이 속으로 일루미나가 멍청한 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정작 그녀의 머리는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나도 돈이 목적이 아니고 명예 같은 건 필요 없긴 하지만…공포를 없애버리겠다니, 제정신이 아니잖아.’

딱히 일루미나만의 편협한 생각이 아니었다. 던전은 세일럼의 상징이었다. 드높은 산맥처럼, 드넓은 바다처럼. 가진 능력에 따라깊은 곳까지 탐험할 수는 있지만 정복하거나 소유할  없는 그런 ‘자연스런’ 현상이 된 지 오래였다. 일반적인 사람 입장에서 헨드릭의 말은 ‘저 산맥을 평평하게 만들어버리겠다. 진심으로.’와 다를 바 없게 들릴 것이다.

하지만 왜.

심장이 더 빠르게뛰고 있는 것일까.

- 던전 그 자체를 파괴하는 길. 그 여정을 당신만의 이야기로 엮을 생각이 있습니까?

‘터무니없어. 분명 터무니없는 이야긴데.’

- 당신의 종장은, 가장 기나긴 공포를 무찌른 4인 용사대의 이야기가 될 겁니다. 일루미나 당신을 포함한.

‘어째서. 설레는 거야?’

일루미나는 음유시인이다. 웃긴 이야기, 사랑스런 이야기, 슬픈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위대한 이야기 모두를 사랑하는 방랑자다. 어린 나이에 마을에서 홀로 뛰쳐나와 오랜 시간 떠돌아다녔다. 혼자서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허약하지 않았다. 제법 날렵한 몸놀림과 잘 조율된 베이파 하나면 스스로의 몸은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듣고 많은 이야기를 노래했지만,던전을 끝까지 돌파하겠다는 용사들의 이야기는 전무했다. 다양한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세일럼에 왔음에도, 용사는 없고 황금 사냥꾼들만이 존재했다.

어렸을  막연히 동경하던 용사는 없었다. 실망했다. 아쉬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진짜 용사는 없어도, 용사 이야기는 없어도 괜찮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만큼 수많은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녀가 허구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 현실성이 없는데, 없어야 하는데. 근거도 뭣도 없고 그냥 목표가 그렇다는 것뿐인데.’

이야기.

아무도 접하지 못했을 이야기.

기존에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닌, 유일하게 자신이 엮고 끝맺을 수 있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그저그런 이야기가 아닌, 널리 퍼져서 유명해질  있는 이야기.

헨드릭이라는 눈앞의 남자는, 음유시인들이 가진 궁극의 로망이자 일루미나의 로망을 단번에 꿰뚫었다.

점점 더 빨라지는 심장 박동과 함께, 그녀의 로망이 현실성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카야랑 셰이는 훌륭한 동료지만, 셋으론 힘듭니다. 던전은 고약하고 음험하고 지랄맞습니다. 용사대를 창설한 지는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지만벌써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고,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더 심해질 겁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가시밭길입니다. 아니, 가시만 있는 게 아니라 깊은 구덩이가 있을 수도 있고 불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갈 겁니다.”

고통스러운  싫었다. 자신은 용사가 아니라 음유시인이었다. 고통을 직접 겪는 자가 아니라 겪은 자의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게, 보다 풍성하게,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일루미나, 당신이 우리와 함께 그 길을 동행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고난 없는 극복은 없었다. 시련 없는 용사는 성립 불가능한 존재였다.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없으니, 이야기 밖의 전달자가 이야기 속의 당사자가 되어야 했다.

새 이야기의 프롤로그에서, 그리고 악보의 첫 마디에서.

용사의 손이 뚫고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손을 잡고 이 이야기를, 이 악보를 함께 그려나가자고.

일루미나는 홀린 듯이 헨드릭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응. 으응. 당신들의 이야기를 엮게 해줘. 노래하게 해줘. 같이 걸어가게 해줘.”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루미나.”

“우리들의, 이야기…!”

“HAT에 합류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루미나.”

**

[일루미나Illumina]

종족/성별 : 수인 여성
클래스 : 음유시인(Bard)
레벨 : 4
최대체력 : 14
공격력 : 5~9
방어력 : 1
속도 : 5
기사회생/각성 : 10%
정찰확률 : 22%
긍정적 특징 : 타고난 가희(메인 버프 수치+1, 멘탈리티 회복+1), 조화로움(동료의 멘탈리티를 감소시키지 않음), 생존본능(체력이 50% 이하일 때 회피율 상승)
부정적 특징 : *발정(일정 주기마다 발정. 해소되지 않을  멘탈리티 감소), 서투름(명중률 소폭 감소)

내가 그녀에게 영입 제안을 했을 때, 그녀의 대답이 없었지만 그녀의 프로필이 떴다.

‘뜨는 기준을 모르겠단 말이야… 아르 때도 진즉 이렇게 볼 수 있었으면… 쯧.’

피지컬은  예상했던 대로 처참했지만 그래도 4레벨이었다.  롱 테러에서 수인 종족 보정이 아마 인간 기준 최대 체력+1, 공격력+1, 방어력+1, 멘탈리티-1이었으니, 그게 아니었다면 방어력이 0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속도가 5 그대로라는 게 다행일까.

하지만 타고난 가희라는 대박 특징을 보유하고 있었다. 음유시인 한정 1티어 특징이었다. 조화로움이나 생존본능도 꽤 좋은 특징이었고. 나약한 피지컬을 어느 정도 보완해줄 수 있었다.

‘발정… 이건 뭐… 혼자 해결하는 방법이 있겠지?’

그건 나중에 실례되지 않는 선에서 물어보기로 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보유 스킬들을 확인했다.

‘제발! 평범한 스킬, 평범한 구성이라도 좋으니까 이상한 거만 없기를!’


[1스킬. 용기의 선율]
모든 아군 멘탈리티 회복 +2
- 모든 아군 공격력 +2
- 모든 아군 명중률 +6

[2스킬 활력의 선율]
- 모든 아군 멘탈리티 회복 +2
- 모든 아군에게 턴당 체력 회복 +1 부여
모든 아군에게 공격 적중시 멘탈리티 회복 +1 부여

[3스킬 습격의 선율]
- 모든 아군 멘탈리티 회복 +2
- 모든 아군 치명타율 + 5
모든 아군 속도 +1

[4스킬 절현]
- 무작위 적에게 반드시 치명타를 가하는 4번의 공격을 가함
- 절현 전에 걸려있는 선율에 따라 부가 효과 발생
- 용기의 선율 : 데미지 추가 보정
- 활력의 선율 : 적중한 괴물의방어력 감소
- 습격의 선율 : 적중한 괴물의 속도 감소
- 4라운드 동안 스킬 사용 불가


“….”

할 말을 잃었다.

좋은 의미에서.

‘씨발 우리 셋이 존나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닐 땐 하나도  보이던 음유시인이, 아르가 물고 온 이런 허당 같은 여자가 고성능 잡받이라니!’

공격력, 체젠, 속도 나무랄 것 없는 3버프 조합에 필살기라 할 수 있는 특수공격기 절현까지.

무조건 잡아야 한다. 무조건!

‘아르야, 미안하고 고맙다! 더 많이 챙겨줄게!’

일루미나의 대답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나는,  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음유시인의 감성을 자극했다. 당신 같은 음유시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제발 우리 용사대에 들어와달라는 말을 최대한 그럴싸하게 포장했다.

우리 용사대에 들어오면 고생할 거라고, 던전은 무서운 곳이라고 사실대로 말하면서도 당신이 합류해야 우리들이 던전의  깊은 곳까지 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진정한 용사.

보고 싶지 않냐고. 그리고 되고 싶지 않냐고.

‘HAT를 반가워하는 음유시인이야. 진정한 용사를 싫어할 리 없어.’


 공략은 성공적이었다. 일루미나는환하게 웃으며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아유 이뻐라.

“HAT에 합류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루미나.”

정말로.

**


일루미나의 합류는 생각보다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당장 여관에 머무는 사람이   더 늘어나 숙박비와 식비가 늘어났다는 사소한 것도 있었지만, 보유스킬에도 변화가 생겼다.

“전투 수녀 스킬들  보여주십시오.”

“전부, 말입니까?”

“예.”

일루미나가 보유한 버프 스킬이 생각보다 뛰어나서 쓸모없어진 스킬들이 몇 개 생겼는데,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와 절정 말고는 쓰이지 않았던카야의 1스킬 신성한 전투와 4스킬 전투수녀의 고행이 그러했다.

‘회개하라… 전에 봤을 때 눈물을 머금고 못 샀던그 스킬이네.’

각종 보상들 덕분에 몇 백 금화를 갖고 있는 지금은 가볍게 살 수 있었다. 새삼 그때와 지금의 처지 차이가 확 느껴졌다.

‘일루미나가 들어오면서 멘탈리티는 이제 한시름 덜어졌어. 체력은… 활력의 선율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힐링이나 보호 스킬은 하나 있어야 해.’

셰이는 높은 방어력이랑 자힐로 어떻게 버틴다 쳐도, 나머지는 아니었다. 특히 일루미나는 재수 없으면 풀피여도  한 방에 사경을 헤맬 수도 있었다.

용사훈련소에서 막 엄청나게 좋은 스킬을 사는  무리지만, 그래도 기본 스킬보다  만한 건 건질 수 있었다.

[회개하라]
- 지정한 괴물에게 일정 확률로 상태이상 ‘기절’ 부여
- 괴물이 상태이상 ‘기절’에 걸릴 시, –50% 보정치의 공격을 가함
괴물이 상태이상 ‘기절’에 걸리지 않을 시, -50%보정치만큼 자신의 앞에 있는 동료의 체력을 회복함

[전투수녀의 서원]
- 최대 체력의 20%만큼 체력 감소
- 괴물에게 가한 데미지의 20%만큼 현재 체력이 가장 낮은 아군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상태가 됨(두 번째로 낮은 아군은 그 반절만큼 회복시킴)

‘좋아. 아주 좋아.’

종결급 스킬은 아니었지만, 그  스킬이랑 비교하면하늘과  차이였다. cc기도 장착했고, 간접적으로 일루미나를 힐링할 수 있는 스킬도 장착했다.

“45금화입니다. 용사님.”

45금화.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낼  있었다.

플렉스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현상금 사냥꾼 스킬들도 싹 보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이제, 내 스킬도 갈아엎을 차례였다.

**

“스승님. 스승님! 저 왔어요!”

“또 뭐냐.”

“수제자한테 또 뭐냐라니 말이 너무 심하신  아니에요?”

“여신님께 기도도 안 드리고, 괜찮은 음유시인  구해달라고 떼 쓰는 게 그 수제자라는 사람이 할 말이고?”

“아참! 그건 해결됐어요!”

“…뭐야?”

“이번엔 다른 일로 왔어요.”

“후우… 이 녀석이.”

셰이는 유스티티아 수도원에서 자신의 스승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드레스나 수녀복이 아닌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가벼운 인사를 끝내자마자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은 티를 풀풀 냈던 전사장도 자세를 바로 했다.

“스승님.”

“뭐냐.”

“그 기술, 배우고 싶어요.”

“……진심이냐.”

“네.”

“분명, 넌 성전사의 길을 걸었음에도 누군가를 지키는 것보다 이단을 때려잡는 것을 중시했던 아이였다.”

“맞아요.”

“그 마음에 변화가 생긴 거냐.”

“아니요. 둘 다예요.”

“둘 다?”

전사장은 팔짱을 끼며 셰이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런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배울 수 없는 기술이다.”

“어중간하지 않아요.”

“네 마음속에 있는 그 증오는 결코 옅어지지 않고, 대체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게 바뀌지 않는 한 이 기술은 제대로 배울 수 없다. 배워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제대로 배울 수 있어요, 스승님! 꼭 배우고 싶어요! 정말이에요!”

“말로는 뭐든 할 수 있겠지. 그럼 묻겠다. 셰이, 네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오랜 시간 괴롭혔던 자가 눈앞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달려들지 않고 제자리를 지킬  있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네 증오심의 분출을 참을 수 있겠냐 이 말이다.”

“….”

“설령, 그 지키려는 사람이 네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유스티티아님께  점 부끄럼 없이 맹세할 수 있다면, 내 개인 시간을 빼서라도 가르쳐주마.”

“저는… 모든 사람을 지킬 생각은 없어요. 그럴 능력도 없고요.   명, 아니 이제 세 명.”

셰이가 로자리오를 손에 쥐며 답했다.

“세 명. 세 명만 지킬 수 있으면 괜찮아요.  세 명을 지켜야 한다면… 참을  있어요. 참을 거예요. 지킬 거예요. 설령, 제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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