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마음가짐(1)
‘살아있네.’
매번 귀환할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어떻게 돌아왔는지 잘 기억이 안 났다. 죽을 듯 말 듯 고생하고 겨우돌아와서 기절하고는 눈 떠보니 여관이었다. 기절하기 전에 카야나 셰이에게 뭐라고중얼중얼 지시를 내렸던 거 같은데….
‘뭐 어때. 돌아왔으면 됐지.’
그것도 무사히 돌아왔으면 장땡 아닌가. 고갤 돌려 주위를 확인해보니 아무도 없었다.
“다들 어디 갔대.”
절로 곡소리가 나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어났다. 특히 목이랑 어깨에 붕대가 어찌나 칭칭 감겨있던지, 깁스라도 한 줄 알았다.
「먹을 것을 조달하러 갔습니다. 금방 갔다 오겠지만, 혹여나 걱정하실까봐 쪽지를 남깁니다.」
탁자에 카야의 멋들어진 글씨가 적힌 쪽지가 놓여있었다.
‘카야, 너도 많이 아플 텐데.’
그녀가 말한 걱정과는 다른 걱정이 들던 차에 하난 줄 알았던 쪽지 밑에 다른 쪽지가 숨어 있었다.
「언니가 아르에게 말했어요. 우리 용사대와는 함께할 수 없다고. 그래서 제가 손수 집으로 데려다주러 가기로 했어요. 대장님은 용사대 영입 문제와는 별개로 당분간 같이지내도 상관없다고 했지만, 저랑 언니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아르가 없다고 너무 놀라지 마세요.」
“으음.”
셰이가 남긴 쪽지였다.
「아르는 절규하고, 울고불고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잘못했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그랬지만….」
씁쓸했다. 분명 아르의 딜 포텐셜은 굉장했다. 인간 폼에선 우리에게 없는 전역 광역기도 있었고 치명타도 생각 이상으로 잘 터뜨렸다. 늑대 폼에선 엄청난 피지컬을 뽐냈고, 깡딜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다. 심지어 레벨도 3이었고, 장비 수준도 2/1렙에 불과했다.
하지만 디메리트가 메리트를 집어삼켰다. 적어도 혈액공포증이 없었다면, ‘피의 격노’ 상태를 스스로 억제할 수 있거나 내가 컨트롤할 수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치유 수녀나 음유 시인, 보물 사냥꾼 같은클래스 대신 영입할 정도는 아니었다.
메리트가 10이었다면, 디메리트는 10 그 이상이었다. 적을 전멸시키면 뭐하나. 아군도 전멸할 뻔했는데.
아군에게.
「같은 용사대는 아니더라도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대장님이 남기셨던 말을 전하자 겨우 수긍했어요. 사실, 저는 지금 후회하고 있어요. 제 호기심 때문에 용사대가 궤멸될 뻔했으니까요.」
셰이의 잘못이 아니다. 편견을 가지지 않고 하나의 인격체로 대우해준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물론 여관으로 데려온 과정 자체는 잘못이긴 했지만.
「훗날 이 결정이 어떻게 되든, 전 대장님을 믿어요. 이 이상 자책하지 마시고, 얼른 회복하는 것만 신경 쓰세요! 아참, 저는 괜찮으니 걱정 안 해도 괜찮아요.해도 괜찮긴 하지만!」
“셰이….”
나참.
괜히 코를 쓰윽 훔쳤다.
너무 착하고 듬직하고 고마웠다. 나 같은 놈에게 잘못 걸려서 개고생을 하고 있지않은가. 나보다 적게 다친 것도 아니고, 막말로 괴물들 공격의 8할 이상은 셰이가 탱킹했고 아르에게도 두 번이나 공격당했는데, 내가 속 편하게 기절하고 있을 때 쉬지도 않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대신하고 있었다.
“하아….”
머리가 띵했다.
여전히 몸이 휴식을 취하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겠지만, 그것보다도 아르와 네 번째 용사에 대한 것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일말의 가능성을 고려해봤지만 아르는 던전에 절대 못 데려가. 멘탈리티 관리랑 정예 괴물 및 보스 괴물을 얼마나 빨리 딜로 찍어누르느냐 싸움인데, 그러기 전에 용사대가 자침해버리니까.’
만일 지금 조합으로 2구역 들어간다? 2-5 진입하기 전에 터질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괜히 아르한테 희망고문한 격이었지만, 어쩔 수없어. 지금이라도 이렇게 하는 게 맞아.’
그래도 셰이를 통해 인연의 끈을 아주 놓은 건 아니었다.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한 번 찍어먹기는 했으니, 아예버릴 수는 없지 않나.
만일 아르가 이번 인던행 때문에 기존에 갖고 있던 공포증이 더 심해져서 의뢰를 못 나가 생계가 위험해진다면… 금전적 도움을 어느 정도 줄 의향도 있었다. 지금도 아마 셰이가 30금화 정도를 들고 있을 것이다. 30금화 정도면 아껴 쓰면 한 달은 그냥 버틸 수 있는 돈이었다.
“교훈… 씨발, 교훈비라 생각하자.”
가뜩이나 최고난도라는 것 때문에 난이도가 미쳐 돌아가는데, 도박수를 던지더라도 적어도 검증된 인재, 검증된 조합을 갖추고 던지는 게 낫지 않겠나. 최소한 땡, 백번 양보해도 알리 정도는 들고 블러핑을 하고 싶었다.땡잡이나 암행어사같은 패로 블러핑은 사양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둘, 아니 셋.’
내심 후보에 넣었었던 보물 사냥꾼도 과감히 빼버렸다. 보물 사냥꾼의 함정 제거나 비밀방 탐색, 핀 포인트 공격도 유용하겠지만 이번 인던에서 절실히 느꼈다.
전투 유지력이 존나 절실하다고.
광역기가 부족하긴 하지만 유지력이 좋으면 한두 턴 버티면서 존나 세게 여러 번 때리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건 던전에선 많아봐야 4마리씩 나온다. 이번 인던이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우리한테 광역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여차하면 거금을 들여 스킬을 바꿔서라도 광역기 한둘 정도는 더 장착할 수도 있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cc기를 더 장착하든가.
하지만 체력과 멘탈리티는 아니었다.
체력 쪽은 카야와 셰이가 자체 회복수단이 있어서 그나마 낫지만 멘탈리티는 치명타 터질 때 찔끔찔끔 오르는 거 가지곤 답도 없었다.
믿음과 안정감의 치유 수녀.
여유와 다양성의 음유시인.
그리고 아직은 미지수인 강화인간.
치유 수녀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이미 한 번 경험해봤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가 없었다. 세스티아급 치유수녀가 아닌 이상, 영원한 안식을 보유한 치유 수녀는 찾기 힘들겠지만 치유 수녀는 기본적으로 광역 힐과 높은 단일 힐로 용사대의 안정성을 책임지는 클래스였다. 하지만 좋은 치유 수녀가 없다면, 음유시인도 진지하게 고민해봄직 했다.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스킬에 멘탈리티 회복이 패시브로 붙어있고,보유 스킬에 따라 다르지만 4벞 순받(순수 음유시인)이냐, 3벞 1공 잡받(하이브리드 음유시인)이냐, 2벞 2공의 공받(공격형 음유시인)이냐로 나뉘긴 하지만… 공통적으로 전투가 유연해진다는 장점이 있는 클래스.’
음유 시인이 가지고 있는 버프 스킬들은 흔히 선율 시리즈라고 불렀는데, 파멸의 선율, 습격의 선율, 수호의 선율, 치유의 선율 등 보유한 스킬 조합에 따라 파티의 운용 방식이 달라질 정도로 막대한영향력을끼쳤다.
하지만 단점이 존재했는데, 잘 모르는 dlc직업들을 제외한 기존의 13클래스들 중에선 피지컬이 최하위권이라는 것이었다. 최대체력 보정치, 최소 공격력과 최대 공격력 보정치는 0이었으며 방어력은 오히려 역보정이 걸렸다. 그나마 봐줄만한 건 클래스 기본 속도가 5로 굉장히 빠르다는 것과 치유력 보정이 붙었다는 것.
죽창이라 부를만한 특수공격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는 한, 음유시인은 순수전투력 면에선 깍두기였다.
“강화인간은… ‘확실한’ 정보가 아니면 후순위로 미루고.”
결국 최종적으로 좁혀진 건 치유수녀와 음유시인,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더 끌리는 건, 다름 아닌 음유시인 쪽이었다. 동료들이 돌아오면 의견을물어보고 그들이 동의한다면, 하나에만 집중할 것이다.
**
며칠이 흘렀다. 신체적 부상은 다 낫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흉터는 남았다. 피부에도, 마음에도. 어제 셰이에게 부탁해 아르의 집에 찾아간 적이 있었으나 그녀는 집에 없었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쫓진 않았다. 잘 지내고 있냐고, 왔다 갔다는 안부와 함께 혹시 음유시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면 고맙겠다는 쪽지를 남겨두었다. 구석에 금화도 조금 숨겨놓았다. 뭐… 딱히 기대하진 않았다. 그걸 명분으로 우리에게 와서 먹을 걸 얻어먹고, 어색해진 사이를 다시 회복하려 해도 전혀 뭐라고 안 할 생각이었다.
우린 그 이후로 음유시인만 중점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음유시인을 생각보다 찾기 힘드네요.”
“대부분의 용사들 사이에서 선호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왜지? 웬만치 형편없는 용사대가 아닌 이상, 괜찮은 음유시인 하나 껴 있으면 굉장히 든든할 텐데….”
진짜 구더기가 낀 똥 수준의 조합만 아니라면, 웬만한 똥도 쉰 된장 정도로 만들어주는 게 괜찮은 음유시인의 힘이었다. 물론 거기까지가 한계겠지만.
“실력이 다들 형편없는 건가? 아니면 수 자체가 적은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긴 세일럼이잖아.”
더 롱 테러 설정상 음유시인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떠돌이들이었고, 수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든 세일럼에, 적어도 겉으로는 용사들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세일럼에 음유시인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냥 우리가 운이 없어서 못 찾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은 교단에도 괜찮은 음유시인 있으면 알려달라고 말해놓긴 했어요. 오랜만에와서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그거냐고 핀잔을 듣긴 했지만요. 헤헤.”
“저는… 일단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기대는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세스티아, 세스티아는 어때? 아직도 많이 바쁘대?”
“예.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는 것 같았습니다. 교단 본부에도 이미 한 번 갔다 오신 것 같고, 그새 못 보던 자매님들도 충원됐습니다만… 예전만큼 회복되려면 아직 먼 듯합니다.”
‘세스티아… 한두 가지를 빼면 여러모로 훌륭한 치유 수녀였지.’
아무리 교단이 발이 넓은 편이라 해도 그들은 흥신소나 인력중개소가 아니었다. 한계가 있을 터.
“아. 맞다. 대장.”
“어?”
“세스티아님이 두 번째 보상이 준비되었다는데, 언제 받으러 오실 거냐고….”
“아!”
아르와 인던 때문에 까먹고 있었다.
‘까먹을 걸 까먹어야지, 정신 차려!’
“오랜만에 좋은 소식이네. 두 번째 보상이라는 게 뭔데?”
“그건 받아갈 때의 기쁨으로 남겨두라고 하셔서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세스티아도 참. 뭐, 얘기하는 걸 봐서 진즉 준비한 거 같은데 하루 정도 늦게 간다고 없어지진 않겠지.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일찍 가보자.”
“예, 대장.”
“혹시 모르니 저희 교단에도 들러요, 대장님! 저희와 딱 맞는 음유시인을 유스티티아님께서 인도해주셨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 정말로 그래주셨으면 좋겠다.”
“라엘라님께서도 살펴주실 것입니다.”
“그래그래. 라엘라님도.”
내친 김에 라엘라님과 유스티티아님께 기도를 올렸다.
‘라엘라님. 유스티티아님. 아니, 장모님들! 제발, 세스티아 수준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카야 정도만 되어도… 아니, 라엘라님! 카야가 뒤떨어진다는 말이 아니잖습니까! 아 거참! 알 거 다 아시는 분들이?’
**
쿵쿵-
“으으….”
쿵쿵쿵-
“뭐야….”
다음날 아침, 아니 새벽.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강제로 잠에서 깼다. 내 양옆에서 꼭 붙어 자던 카야랑 셰이도 덩달아 깨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문에서 제일 가까웠던 셰이가 잠옷차림으로 일어나 클레이모어를 집어들었고는, 엇박자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누구… 아르?”
“데려왔어.”
며칠 만에 보는 아르는, 자기보다 훨씬 큰 여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어깨에 얹어진 정체불명의 여자는 귀신처럼 머리랑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기절한 듯 했다.
“대체 누굴 데려왔다는….”
“음유시인.”
“….”
아니,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