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신중한 준비(14)
대가리를 깨부수고, 불쾌하고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거대 곤충들의 공격을 흘려내고, 깨물리고, 대가리를깨부수고, 겉모습만으론 보기만 해도 지려버릴 거 같은 괴악한 짐승들의 공격을 받아내고, 깨물리고, 대가리를 깨부수고….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용사대 전원의 몰골은 처참해졌다. 피와 체액으로 절여진 지 오래였고,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 괴물들 자체에 정신적 피로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면 괜찮았을 터였다. 한계까지 몰려본 경험이 이번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크르르…!!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차라리, 차라리 날 물어 이 망할 늑대년아!!!”
내가 아르에게 두 번 물리고 체력이 간당간당해지자, 세 번째로 내 피와 살을 탐하러 온 아르를 카야와 셰이가 다시 가로막았다.
“언니. 언니는 뒤로 물러나요. 제가 데려왔으니, 제 잘못이에요.”
“누구 하나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셰이 당신보다 제가 물리는 게 그나마.”
“이 씨발짐승년아! 대장님은 그만 먹고 날 먹으라고!”
셰이의 필사적인 저지에 아르는 세 번째와 네 번째 턴에셰이의 목과 어깨를 작살내버렸다. 상반신 전체를 피로 덧칠한 셰이는 클레이모어를 제대로 들 수조차 없었다.
“제단, 제단 색은…?”
“…제 머리 색보다 더 탁해졌습니다. 검은 기운도 조금씩 보이고 있습니다.”
'젠장… 한 라운드만 더 버티면 되는데…!'
오른손에 쥐고 있는 도끼도, 어깨로 짊어지고 있는 책임감도, 가슴속에 품고 있던 양심도 다 내려놓고 눕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힘들어. 너무 힘들어.’
방심 따위는 안 했다. 이번 인던행은 2구역 돌파를 위해 신중히 준비한계획이었다. 적당히 할 만한 의뢰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백 명이면 백 명 다, 좆같음을 얘기했지 살아 돌아오기 힘들 정도의 난이도라는 말은 없었다.
프로필하고 스킬만 확인했을 때 바로 빠졌어야 했냐고?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처음 보는 클래스인데, 어떻게 싸우는지 한 번 정도는 보고 싶지 않은가. 글자하고 실제로 적용되는 게 느낌이 다를 수도 있고, 늑인은 쌓인 정보가 없다 보니 아무래도 직접 봐야 걸러야 할지 말지 확실히검증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쯧,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이야… 이미 다 벌어진 일인데.’
본 던전 돌파를 위한 준비 차원에서 입장한 인던에도 다른 용사들보다 확 높아진 난이도에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고, 또 그 준비를 위해서 또 준비가 필요하고….
갑자기 확, 지쳐버렸다.
‘튜토리얼 때처럼 시간제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어떻게든 빠져나간 다음 던전은 쌩까고 돈 근근이 벌면서 유유자적 살까?’
상상만 해도 군침이 나오는 치킨을 비롯한 음식들과 평소엔 너무나 당연하게 누렸던 첨단 과학의 산물들. 지구로 돌아가는 걸 포기하면 그것들까지도 포기하는 거고, 그럼 당연히 아쉽겠지만… 여기엔 카야와 셰이가 있었다. 지구에서는 방구석 외톨이였던 내가, 여기서는 날 사랑해주는 여자를 둘이나 만들었다. 둘 중 어느 게 중요한가? 갓 이곳에 떨어졌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굳이 양쪽을같은 비교선상에 올려두는 것 자체가 그녀들에게 실례였다.
‘하지만… 날 맹목적으로 따르는 카야는 그렇다 치더라도, 셰이는.’
자신의 운명을 내 운명과 함께하려는 카야는 내가 진정으로 포기한다면 따라줄 확률이 높았지만, 셰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날 따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진심으로 던전을 끝까지 돌파하는 게 내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포기한다면, 그녀도 나한테 정이 들었으니 바로 떠난다거나 하진 않겠지만… 상당히 실망하고 절망할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음흉하게 관음하고 있을 공포 새끼야….’
그렇게 생각하니 셈이 안 맞았다. 적어도 끝까지 함께하기로 한 이상, 다 같이 행복한 엔딩을 맞아야 하지 않겠나. 내 목표를 접는 건 백 번이고 할 수 있었지만, 셰이의 목표를 나 때문에 접게 할 수는 없었다. 이 좆같은 곳에서 ‘행복한 엔딩’을 꿈꾸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웃긴 말이었지만….
모두가 무사히 살아서 던전을 끝까지 격파한다는 게, 정말로 불가능한 일일까? 지금까지도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들을, 결국은 어찌저찌 해내고 귀환하지 않았나.
1구역 때도, 셰이가 합류했을 때도, 베스티아 타락 사건 때도.
매번 누군가 죽을 위기를, 용사대 전멸 위기를 겪었으면서도 끝내는 세일럼에 돌아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래야 하지 않겠나.
그녀들에 비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지구에서의 플레이타임과 용사대장으로서 가지고 있는 얄팍한 책임감과 나름 자신감이좀 붙기 시작한 좆질 밖에 없다 해도.
‘이런 식으로 우리 용사대의 던전 공략을 포기하게 만들려는 계획, 아주 훌륭했다. 조금은 인정해.’
그래도 동료들이 포기하지 않았는데 내가 먼저 포기하고, 내가 먼저 쓰러져선안 됐다.
난, 그녀들의 등불이었으니까.
“한 번만!”
도끼를 쥔 손에 다시힘이 들어갔다.
“한 번만 더 버텨보자!!”
[남은 라운드 수 – 1]
“이 좆 같은 새끼들!!!”
[대가리 분쇄]
크허허헝-!!!
피와 살점과 지방으로 뒤덮인 도끼가 최후의 예리함을 뽐냈다.
**
또다.
또 몸이 말을 안 들었다. 그때처럼, 온통 피로 물든 글씨가시야를 가리고 짙은 피냄새가 후각을 점령…?
“대장님, 대장님….”
어라?
당연히 붉을 줄 알았던 세상은 붉지 않았다. 원래 색이었다. 피 냄새도 안 났다. 오히려 달콤한 빵 냄새가 났다.
눈을 깜빡였다.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닌… 것 같았다. 등에 닿는 감촉은 푹신했다.
‘여관…? 여관? 여관!’
느릿하게돌아가던 머리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누가 파먹기라도 한 듯 기억이 안 나는 부분이 많았지만, 그 징그러운 곳을 빠져나와 세일럼에 돌아온 듯 했다.
‘카야! 셰이!’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구멍이 뚫린 부분을 제외한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카야랑 셰이와 대치하던 것, 그리고 헨드릭의 목을….
‘아.’
내가. 내가. 내가.
사람을.
몸이 벌벌 떨렸다. 구토감이 엄습했다.
헨드릭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고 정신없이 피를 핥고 빨아들이고, 끝내 살점까지 뜯어 ‘맛있게’ 씹어먹은기억이 범람했다.
‘그만! 그만!’
몸부림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처럼 몸이 말을 안 듣는 게 아니라, 몸 자체가 움직이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아, 아, 아… 셰이, 마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셰이의 희고 고운 목과 탄탄한 어깨에 생긴 흉터를 본 순간, 셰이의 목과 어깨를 마구 헤집었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내가… 사람을….’
이래서야.
카야가 말했던 ‘그 짐승’들과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괴물들을 필요 이상으로 잔인하게 해체하고, 동료들을 공격하고 피와 살점을 탐하고.
그냥 피와 살육에 미친 괴물이었다. 기억나는 것만 떠올려도 이 정도였다. 자기 자신도 그렇게 느낄 정도인데….
‘왜, 왜 살려준 거야? 왜 나까지 데리고와준 거야?’
눈물이 차올랐다.
자신이 생각했던 용사는 이런 게 아니었다. 세일럼에 대한 환상이 깨지긴 했지만, 용사가 되고 싶다는 꿈까지 깨진 건 아니었다. 자신은 금화에 그렇게 연연하진 않으니, 남들과는 다른 용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숭고한 사명은 없었지만, 그래도 병적으로 숨어 지내지 않고, 본성을 드러내는 걸 빼면 힘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짐승이었다. 그냥 본성이 덜 깨어난, 인간인 척 하는 예비 짐승이었다.
피를 의식적으로 두려워하는걸로, 살해를 최소화하는 걸로, 하더라도 깔끔하고 신속하게 하는 걸로 애써 외면했지만… 자신의 반은 천한 짐승이었다.
가득 차올랐던 눈물이 똑, 떼구르르 굴렀다. 투명한 구슬이 작은 뺨을 타고 흘러 턱까지 도달했을 때 등을 돌리고 있던 카야가 어느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듭니까.”
“카… 야…?”
“후우… 표정이나 어조를 보니 그 상태는 풀린 것 같긴 하지만….”
카야는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모르니 구속을 해제하진 않겠습니다.”
“아….”
그제서야 아르는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다. 목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밧줄이나 사슬 따위로 칭칭 감겨있었다.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머리밖에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듣고 싶습니까.”
“응. 제발.”
아르는 간절하게 바라봤지만, 셰이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야기는 분명 들리고 있을 텐데, 돌아보려는 움직임조차 없었다.
아르는 급격히 두려워졌다.
“호, 혹시 내가 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
“제발! 제발,제발 다 말해줘… 부탁이야….”
카야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목이 탔는지 탁자 위에 있던 컵으로 팔을 뻗었다.
챙그랑-!
“아.”
“언니! 괜찮아요!?”
“아, 미안합니다. 순간 힘이 빠져서.”
“제가 치울게요. 앉아 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셰이가 더 심하게 다치지 않았습니까. 앉아 계십시오.”
카야가 컵을 놓쳐 깨뜨리자 아무 반응 없던 셰이가 벌떡 일어나며 카야를 걱정했다. 그녀가 사양하자 같은 자세로 등을 돌렸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무시였다.
하지만 아르는 거기에 신경 쓸 수 없었다.
긴 소매로 가려졌던 팔, 정확히는 카야의 오른쪽 팔꿈치 아래 부분 전체에서 끔찍한 상처가 보였으니까.
“아, 아.”
“아르.”
“아아….”
“당신은 우리들 중 그 누구보다도 용맹하게 해충해수를 구제했습니다. 축산장 책임자도 시체들을 보더니 1구역만큼은 한동안 습격 걱정은 덜어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용맹이 아니라.”
“사소한 부작용으로인해 우리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히긴 했지만,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회복 불가능한 부상은 아니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소한 부작용? 가벼운 상처?”
그렇다면 왜, 헨드릭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셰이는 자길 무시하고 자신은 왜 이렇게까지 꽁꽁 묶여있는 건데?
“솔직하게 말해줘.그 팔에 상처도… 내가 낸거야?”
“예.”
카야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헨드릭의 목이랑, 셰이의 목도?”
“예.”
“왜, 난 무사해? 난 당신들을 공격했는데, 왜 난 무사한 거야? 왜? 왜 그때처럼 내 가슴을 짓밟지 않는 거야? 난 당신이 말한 짐승이 되었잖아! 아무 것도 저지르지 않았을 땐 죽일 뻔했으면서, 정작 심한 짓을 저지르고 나선 왜 이렇게 챙겨주는 거야? 왜?왜! 차라리 나한테도 똑같은 상처를 만들어줘! 똑같은 고통을 안겨줘!”
“아르, 당신에게 되돌려준다고 해서 우리가 입은 상처가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당신의 육체는 멀쩡할지 몰라도, 당신의 정신은 고통 받지 않았습니까.”
“…!”
“당신의 본성을 함부로 깨워버린 우리가 그 대가를 받는 것이라는 게 대장의말씀이었습니다. 종족이 아예 근본부터 다른데, 인간처럼 생겼다고 무심코 좀 특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인간처럼 생각해버렸다고… 크나큰 실수를 저질러서 되돌릴 수 없는 비극을 만들어낼 뻔했다고.”
“아아.”
“아르.”
“아냐. 아니야.”
아르는 귀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폭주는 묻어두기로 결정했습니다. 훗날 이 결정이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당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아르, 당신은.”
카야는 담담하게 선고했다.
“저희 HAT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