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신중한 준비(13)
“경고했어!”
“….”
“마지막 경고야! 대장님에게 다가가려면, 그 모습을 풀어! 안 그럼 베겠어!”
아주 살짝, 셰이의 클레이모어가 아르의 목에 파고들었다. 아르의 목에서피가 주륵 흘러 클레이모어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손을 들어 제 목에 갖다 대더니, 혀를 할짝대며 피를 핥아먹었다.
“못 벨 줄 알…!”
크르르…!!
셰이가 클레이모어에 힘을 준 순간, 아르는 반대쪽 손으로 날을 움켜잡고 밀어내기 시작했다. 검날을 맨손으로 잡은 아르의 오른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정작 초조한 건 아르가 아니라 셰이였다.
“돕겠습니다!”
양손으로 힘을 준 셰이가 아르의 한손에 밀리자 카야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아르는 남아있던 왼손으로 재빨리 철퇴 머리 바로 아랫부분을 잡아채고는 카야와도 완력을 겨루었다.
“크윽…!”
“무슨, 힘이…!”
몰살의 시간의 스택은 진즉 사라졌다. 그냥 지금은 순수한 완력 대결이었다. 힘으로는 웬만한 남자도 이길 것 같은 카야와 셰이가 함께 힘을 주고 있었음에도 아르와 대치 상태를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오히려 아르 쪽이 힘이 남는 거 같았다. 만약 클레이모어를 쥔 손에 건틀릿이라도 있었다면, 균형은 진즉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르는 지금, 그냥 사람 형태의 짐승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아르가 새로운 피를 갈망합니다.]
[아르가 유진의 피를 갈망합니다.]
아르가 내 피를 갈망한다는 메시지가, 혹시나 정신을 차리진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마저 박살냈다.
아르의 눈은 내 눈에서 살짝 비스듬히 떨어진 곳을 바라보며 제 입술에 묻은 피를 핥았다.
거긴, 내 목이었다.
크르르…!
“크윽!”
“언니! 밀리면 절대 안 돼요!! 대장님이, 대장님이 위험해요!!”
[아르의 복귀를 셰이가 막아섭니다.]
[아르의 복귀를 카야가 막아섭니다.]
메시지는 아르와 동료들의 대치를 마치 실황 중계라도 하듯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나도, 나도 거들어야….’
어떻게?
내가 다가가는 게, 오히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릴 들이미는 꼴이 되는 건 아닐까? 내게 접근을 막기 위해 카야랑 셰이가 힘 쓰고 있는 건데, 내 쪽에서 다가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그래도, 이대로 가다간 양쪽 다 크게 다칠 것 같았다. 아르의 한쪽 손은 언제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았고, 카야와 셰이도 까딱하다 저 손톱에 몸이 꿰뚫릴 것 같았다.
“아르! 아르 임마!!”
아르와 눈이 마주쳤다.
“씨발 돌아가면 먹고 싶은 거,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그샐 못 참은 거냐!”
“대, 대장님!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대장, 여기서 섣불리 자극하면!”
카야와 셰이가 기겁하며 날 말리려 했지만 아르에게 묶인 상태였다.
‘존나 무섭긴 한데… 씨발 언제까지 숨어있을 수만은 없어.’
아르의 타겟은 나였다. 내 피를 탐하지 못하면 지금 같은 현상이 계속될 거라는 건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르의 공격력과 내 방어력 및 최대체력을 비교하며 계산했다.
‘한 방에 안 뒤진다.’
피의 격노 상태를 푸는 방법 따윈 몰랐다. 하지만 피를 갈망한다는 것과 인간형을 상대로 흡혈률이 높은 걸 보면… 노골적으로 ‘피’, 그것도 인간의 피를 가리키고 있었다.
“카야, 셰이. 보내줘.”
“…대장?!”
“대장님!”
“아르를 여기에 데려온 건 내 결정이야. 순간 쫄려가지고 너희 뒤에 숨긴 했지만… 그래도 내 피를 원하는 거 같으니, 내가 책임지는 게 맞지. 계속 대치 상태 유지하다가 서로 다치고, 제단도 어떻게 변할지 몰라.”
“그래도!”
“곁에서 보고 있다가, 내가 뒤질 거 같으면 그때말려주고.”
“대장!”
“보내줘.”
카야와 셰이의 무기가 점점 밀렸다. 그녀들의 표정을 보니 속으로 자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들이 약해서 대장이 희생하는 거라고, 대장이 책임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결코 아니었다. 그녀들은 언제나 그렇듯 최선을 다했다. 방금도 공포를 떨쳐내고 아르에게 맞섰다.
이건 말하자면 사고, 그래. 사고다. 그것도 내 책임이 어느 정도 있는사고.
그러니… 내가 감당하는 게 맞았다.
이윽고 철퇴와 클레이모어가 떨어지자 아르는 피로 물든 손을 한 차례 휙 털어 흩뿌리고는, 순식간에 내게 달려들었다.
“악!”
“대장!!”
“아직 오지 마!”
“으르릉…!!!”
날 덮쳐 쓰러뜨린 아르는위에 올라탄 자세에서 제 팔 다리로 내 사지를 봉쇄했다. 내 어깨를 와락 움켜쥔 그녀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크르르… 크릉…!”
“덮쳐놓고 뭐해! 쳐먹을 거면 빨리 쳐먹어!”
내 목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던 송곳니가, 약 주먹 두세 개 정도의 거리에서 멈췄다.시종일관 내 목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지던 아르가,막상 가까워지자 그 이상 가까워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까… 설마, 저항하고 있는 건가? 아직도?’
카야와 셰이를 힘으로 뚫어낼 정도로 심한 갈망인데?
이빨은 내 목을 씹으려 하고 팔다리도 내 몸을 구속하고 있는데, 머리 하나만 따로 노는 것 같았다.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허공에 이빨질을 하는 데도 끝내물지 않는 아르를 보니,참으로 지독하기 짝이 없는 종족 본성을 지금껏 잘 억누르고 있었구나 싶었고… 또 얼마나 억누르고 있었으면 피를 이렇게나 갈망하는 종족이 혈액공포증을 갖고 있을까 싶었다.
“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어. 우리들의 호기심과 욕심에, 네 봉인이 풀려버렸으니….”
난 아르의 뒷통수에 손을 대고 살짝 내 쪽으로 힘을 줬다. 그러자 팽팽했던 신체와 정신의 대결이 단숨에 무너지고, 그녀의 송곳니가 내 목에 닿았다. 소름이 쫘악 올라왔다.
“그 대가는 내가 지불할 테니, 아예 걸레짝으로만 만들진 않았으면 좋겠다….”
포식자의 아가리에 목을 들이밀면서, 지금도 무서우면서 이딴 말을 지껄이다니 나도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아르의 심장에 무기를 겨누고 있는 카야와 셰이를 바라보며, 온몸이 불덩이 같이 뜨겁고 거친 숨소리를 내는 아르의 뒤통수와 등을 토닥여주었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아르가 아르릉거리다 송곳니를 내 목에 박았다.
푸우욱-
“크윽!”
“대장!”
“대장님!”
아주 살짝, 느리게 박아넣고 피를 핥아먹던 아르는 피를 맛보더니 점점 더 송곳니를 깊이 집어넣었다. 존나 아팠지만,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르의 몸짓에서, 피를 마시는 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살점까지는 뜯어먹지 않겠다고, 어떻게든 날 덜 아프게 하고 싶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래. 먹어라. 많이 먹어. 기왕이면 갈망이다 채워져서 피의 격노라는 것도 해제되면 더 좋고.’
[아르가 유진에게 7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남은 체력 13/20]
어지러운 걸 너머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할 때쯤 메시지가 떠올랐고.
우득-
아르가 내 목을 살짝 문 다음 내 몸에서 떨어졌다. 그녀의 이빨에 자그마한 살점이 꽂혀 있었다.
[저항 굴림]
아르 : 5
유진 : 2
[유진이 상태이상 ‘출혈’(3턴)에 걸립니다. 턴당 2의 피해를 입습니다.]
[유진이 상태이상 ‘표적’에 걸립니다. 아르에게 우선적으로 노려집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르가 이빨에 걸려있던 살점을 혀로 건지더니 보란 듯이 씹어 먹었다.
‘그만큼만 뜯어먹었다고 칭찬해달라는 거냐? 나참… 그럴 거면 나한테 표적은 왜 찍은 거고?’
“대장!!!”
“대장님!!!”
“괜찮아.”
날 양쪽에서 일으켜주던 카야와 셰이가 아르를 경계했다. 아르는 당장 급한불은 껐는지 그녀들이 경계하든 말든 신경도 안 썼다. 그녀들은 차라리 끝까지 버티는 게 나았다며, 그도 아니면 자기 목을 내미는 게 나았다며 울분을 내뱉었지만 큰일 날 소리였다.
지혈붕대를 사용해 출혈 상태를 없앤 나는 도끼를 집어들고는 전장을 살폈다. 괴물들은 당연히 리필됐지만 제단의 색은 변하지 않았다.
“괜찮아. 정말로.”
[지원군이 조직되었습니다.]
“할 수 있어.”
[남은 라운드 수 – 5]
“키우던 고양이한테 장난 좀 치다 씨게 물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그러니까 애들아. 조금만 더 버텨보자. 지원군이 올 거야.”
도끼가 지네의 복부를 갈랐다.
**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피.
‘싫어!’
살. 살. 살. 살. 살. 살.살. 살. 살. 살. 살. 살. 살.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살.
‘닥쳐!’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 살. 피.살. 피. 살.
‘닥쳐! 닥치라고! 제발!!’
피 껍데기 피
심장 눈 간 피 살
근육 힘줄 피 창자 피 기름 위장 연골
피 간 허파 심장 허벅지 팔
피 뇌 뱃살 혀 가슴
‘난! 사람을!! 안 먹는다고!!!’
시야가 온통 빨갰다. 세상이피로 물든 것 같았다. 피로 물든 세상에, 더 끈적하고 짙은 피로 된 글씨가, 그림이 둥둥 떠다녔다. 끔찍한 글씨와 더 끔찍한 그림들을 보기가 싫었다. 눈을 감았다. 더 선명해졌다.
공기도 온통 피였다.
피 냄새밖에 안 났다. 저기도 피, 여기도 피, 심지어 내 몸에서도 피.
저건 곤충의 피, 저건 동물의 피.
그리고, 맛있어 보이는 이 냄새는.
사람의 피.
야들야들하면서도 부드러운 살을 콱 씹으면 터져나오는 뾰족한 비명을 별미 삼아 달콤하면서도 기름진 여자 피.
조금 질긴 부위도 있지만 씹는 맛이 있는 살을 씹으면 쥬륵 배어나오는 덜 달콤하지만 덜 기름져서 목넘김이 좋은 남자 피.
‘아냐, 아냐, 아냐!! 난, 나는, 한 번도,단 한 번도 사람을 먹어본 적이 없어!!!’
인간도 맛있지만, 엘프도 빠질 수 없지. 수가 적어서 맛보긴 힘들지만, 노린내가 적고….
‘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닥쳐!!!’
몸이 말을 안 들었다. 그냥 계속해서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것에 힘껏 저항하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힘에 부쳤다.
뭐라고 목소리 같은 게 들리긴 하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가슴살과 엉덩이살이 탐스럽던 여자 인간 먹이가 쇠막대기를 들이밀며 뭐라고 외쳤다. 허벅지살과 종아리 살이 먹음직스럽던 반쪽짜리 여자 엘프 먹이가 또 다른 쇠막대기를 들이밀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 나, 나 왜이래? 나, 나, 나. 나 뭐, 뭐, 뭐하려는 거야 지금? 날, 날 막아줘! 카야! 셰이!’
굳이 먹이의 말을 이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아아… 아니야! 제발! 왜! 왜 무기를 내리는 거야!!’
아아.
제일 맛있는 먹이가 여기 숨어있었구나.
‘아니야… 아니야!!! 헨드릭! 도망쳐! 제발!!’
피.
우선 맛있는 피부터 먹자.
그리고 더 많은 피를 위해 살점을 뜯어내자.
살점을 뜯어내고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내장을 골라먹자.
더 많은 비명을 질러라!
그야말로 극상의 별미가 될 테니!
‘왜, 왜 도망 안 가는 거야. 잡아먹힌다고! 이 멍청아!! 왜, 왜 오히려 목을 들이미는 거냐고! 그렇게… 왜,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따뜻하게 토닥여줄 수가 있는 거냐고!!’
아아.
이거야. 이거!
더! 더! 더! 더! 더어어어!!!
‘아, 아, 아, 아… 안 돼… 안 돼 안 돼안돼안돼안돼!!!’
절대 안 된다면서, 절대 안 먹는다면서.
어째서.
벌써부터 살점을 뜯어먹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