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신중한 준비(11)
반 이상 붉게 물들은 아르의 은빛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야단났네 야단났어. 저 눈까지 완전히 붉게 물들면… 왠지 통제가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카야가 말했었던 늑대인간들의 흉포함, 메시지에선 본성이라고 표시하는 게 아르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씨발, 반나절이고 한나절이고 모르겠고 일단 불고 보자.’
품에서 책임관이 건네줬던 작은 피리를 꺼냈다.
[세일럼 축산장 책임관의 피리]
- 사용 시 일정 시간 후에 증원군 난입(증원군의 전력은 임의적임)
- 일찍 사용할수록 증원군이 올 확률 감소
지금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한나절은 아니었다. 책임관에게 이 피리를 받을 때를 생각해보면 좀 못 미덥긴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삑- 삐익- 삐이이익-!
[세일럼 축산장 책임관의 피리를 사용했습니다.]
존나 힘차게 불었다. 불어넣은 숨에 비해 소리는굉장히 빈약했다. 그래도 메시지가 뜬 걸 보니 이것도 아이템 취급을 받는 것 같고, 그럼 어떻게든 그쪽에 전해졌으리라 믿었다. 우습게도, 피리를 준 책임관보다 메시지를믿고 있었다.
“크윽!”
“셰이!”
“괜찮아요! 버틸 수 있어요!”
괴물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사자가 할퀴고, 호랑이가 후리고, 멧돼지가 들이박았다. 그 모든 공격을 셰이가 감당했다. 때로는 클레이모어로 절묘하게 흘려내고, 때로는 갑옷채로 버텼다. 그녀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존나 든든해.’
그렇게 거대 모기를 제외한 나머지 괴물들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아르의 포효로 꼼짝도 못하고 있던 일곱 놈들의 상태이상이 해제됐다. 그 중 대부분은 거대 해충들이었는데, 거대 모기가 아르를 노렸던 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다. 다시 내 턴이 되었지만, 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적들의 대가리를 빠개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마리를 빠개는데 성공했지만 괴물들은 맛집 대기줄에 선 사람들처럼, 한 놈이 뒤지면 곧바로 새로운 놈이 들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채워지는 놈의 스펙이 조금씩강해졌다.
내 턴이 지났으니 이제 셰이와 카야의 턴이 지나면, 12 괴물들의 파상공세가 다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아르가 한 번이라도 다시 공격당한다면….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셰이.”
“네, 대장님. 듣고 있어요.”
비스듬히 1시 방향으로 몸을 틀고 있던 셰이가 시선은 여전히 앞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지칠 법도 한데, 자세와 목소리 둘 다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흔들림 없는 방어력과 정신력을 믿고, 그녀에게 저 모든 괴물들을 전부 감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 번, 시선을 끌어줘.”
“…그러네요. 지금, 가장 위험한 때군요.”
셰이는 눈동자만 힐끔 굴려 아르 쪽을 보더니 입술을 씨익 끌어올렸다.
“어. 아무래도, 아르가 공격당하는 건 최대한 늦추고 싶어서.”
뒤쪽에서 나지막이 으르릉거리는 아르는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카야랑 셰이도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1구역에서 동료들의 멘탈리티가 –100 근처에 가까워졌을 때 느꼈던 그 긴박함과 절박함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팽배했다.
“맡겨주세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될 테니까.”
셰이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퉁퉁 치더니 피와 살점들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클레이모어를 땅에 푹 박았다. 그리고 손잡이에 양손을 얹었다.
“여긴-!”
[최후의 성전]
“못 지나간다--!!!”
[셰이가 자신에게 낙인(1턴)을 새깁니다.]
[낙인이 유지되는 한, 모든 괴물은 셰이를 공격합니다.]
[상태이상 ‘절대 뒤로 밀려나지 않음’을 얻습니다.]
[셰이의 각종 상태이상 저항력이 상승합니다.]
[셰이의 방어력이 1 증가합니다.]
[피격 시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격 시 셰이가 일정 확률로 반격(데미지 보정 –25%)합니다.]
[낙인이 해제되고 한 턴간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이리저리 흩어져있던 괴물들의 시선이 최선두에서 클레이모어를 짚고 당당히 서 있는 셰이에게 쏠렸다. 혐오스러운 것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건 정말 소름 끼쳤지만, 정작 셰이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셰이가 2턴간 딜링을 포기한 만큼의 성과를 봐야하는데….’
어쨌든 셰이가 확정 도발을 시전한 덕분에, 적어도 한 턴간 아르는 안전했다.
“카야. 이번엔 3시 쪽을.”
“예, 대장.”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카야는 이번엔 해충들이 몰려있는 곳에 달려가 철퇴를 휘둘렀다. 아까 아르를 공격했던, 침이 반 이상 짧아진 놈이었는데 카야가 다가가는 걸 보고 다급히 날갯짓을 했으나….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파멸적인 일격!]
[카야가 흉폭한 거대 모기17에게 2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20]
[괴물이 맞이한 끔찍한 파멸은 용사들이 품는 희망의 양분이 되었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아르 멘탈리티 +3]
철퇴 한 방에 배 아래가 싸그리 터져버렸다.
감히 아르에게 빨대를 꽂으려 했던 좆기 새끼 혐기 새끼가 한방에 터지는 건 멀리서 보면 꽤나 속 시원한 장면이었지만, 체액을 일부 뒤집어쓴 카야의 얼굴은 상당히 일그러져있었다. 마음 같아선 물 묻힌 헝겊으로 닦아주고 싶었다.
‘온다.’
“다 덤벼!!!”
그러나 카야의 턴이 끝나고, 속도가 빠른 해충들부터 차례차례 셰이에게 무자비하고 엿 같은 공격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제발!”
“라엘라시여!”
열두 괴물들 중 가장 속도가 빨랐던 거대 모기가 셰이에게 맹렬한 속도로 날아갔다. 셰이의 방어력이 아르보다 훨씬 높긴 하지만, 아르가 당했던 장면이 오버랩되자 걱정이 안 될수가 없었다.
제발, 제발, 제발.
거대 모기의 침이 셰이의 지척까지 다다른 순간.
“꺼- 져- 버- 려-!!”
[흉폭한 거대 모기18이 셰이에게 0의 데미지를입혔습니다.]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16/24]
[셰이가 맹렬히 반격합니다.]
[셰이가 흉폭한 거대 모기18에게 2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0/20]
[흉폭한 거대 모기 18이 죽었습니다.]
[동료들의 가슴속에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모든 용사 멘탈리티 +4]
벼락같이 땅에서 클레이모어를 꺼내 횡으로 휘두른 셰이에게 거대 모기는 왱 소리도 못 내보고 반으로 갈라졌다.
맞았는데 오히려 체력이 차버리고, 반격 치명타로 괴물을 때려잡았다?
셰이에게 향했던 걱정의 크기만큼 환호가 터져나왔다.
“셰이!!!”
하지만 이제 열두 번의 공격 중 한 번이 끝났을 뿐이었다. 내 외침은 괴물들의 괴성에 파묻혔다. 그 사이 외양 혐오 갑 중 갑인 거대 지네가, 수많은 다리를 꿈틀거리며 셰이에게 빠른 속도로 기어갔다.
[흉폭한 거대 지네14가 셰이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17/24]
[셰이가 반격합니다.]
[셰이가 흉폭한 거대 지네14에게 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6/22]
거대 지네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낸 셰이가 오히려 지네를 짓밟아 일부분을 터뜨렸고.
[흉폭한 거대 지네15가 셰이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18/24]
[셰이가 반격합니다.]
[셰이가 흉폭한 거대 지네15에게 7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5/22]
다른 지네는 다리들을 베어버렸으며.
[흉폭한 거대 파리16가 셰이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19/24]
[셰이가 맹렬히 반격합니다.]
[셰이가 흉폭한 거대 파리16에게 1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6/18]
[동료들의 가슴속에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모든 용사 멘탈리티 +3]
거대 파리의 눈알을 터뜨려버렸다.
그 이후로도 괴물들의 공격은 계속됐다. 속도가 빨랐던 해충들의 공격이 끝나자 공격력이 더 높은 해수들의 공격이 쉬지 않고 바로 이어졌다.
- 뀌이이이이-!!!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흉폭한 멧돼지21이셰이에게 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20/24]
[셰이가 맹렬히 반격합니다.]
[셰이가 흉폭한 멧돼지21에게 1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9/24]
[동료들의 가슴속에 불꽃이 피어오릅니다.]
[모든 용사 멘탈리티 +3]
하지만 해수들도 해충들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
모든지 분쇄할 것 같은 멧돼지의 돌진을 셰이는 거목처럼 버티고 서서 우직하게 받아내는 것도 모자라 튕겨버렸다.
- 깨갱-!!
[흉폭한 늑대23이 셰이에게 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21/24]
[셰이가 반격합니다.]
[셰이가 흉폭한 늑대23에게 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4/22]
늑대의 섬뜩한 이빨과 강력한 치악력을 개무시하고 입안에 한쪽 팔뚝을 집어넣은 다음, 다른 손으로 배빵을 갈겨버렸다.
호랑이의 돌진은 절묘한 각도로 세운 클레이모어로 호랑이의 피부를 회 뜨듯 발라버렸으며, 사자의 앞발질은 피하기도 귀찮다는 듯 어깨로 받아내고 눈알을 파버렸다.
“덤벼! 덤비라고! 아하하하하!!!”
셰이는 세 방향에서 괴물들의 공격을 쉼 없이 받으면서도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사납게 웃었다. 괴물들은 생존본능마저 모종의 이유로 거세된 건지 일말의 주춤거림도 없이 계속 달려들었으나, 그건 꼭 전기장에 이끌리는 모기처럼 보였다.
“하하하하하!!!”
마침내 모든 괴물들의 공격을 훌륭하게 받아낸 것도 모자라 엄청난 반격까지 선보인 셰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비롯한 온몸이 체액과 피로 범벅이었다. 그러나 그건 모두 괴물들의 몸에서 나온 것이었다.
카야도, 나도, 심지어 아르도.
처음 클레이모어를 꽂았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괴물들에게 조소를 날리는 셰이의 듬직한 모습을 보고 전율했다.
‘영웅.’
그녀의 뒷모습은 흡사 장판파 장비,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결사대, 그리고 명량의 이순신 장군님을 보는 듯 했다.
셰이의 분투는 괴물 하나하나가 던전에 비해 약한 것과는 별개로 상황 자체에 굉장한 압박감을 받고 있던 우리에게 큰 힘을 불어넣어주었다.
그건, 아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늑대 폼으로 변해 속도가 1로 떨어진 아르는 최후턴으로 밀려 괴물들의 턴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턴이 돌아왔다.
그녀는 물끄러미 셰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인간일 때에 비해 이성적인 사고능력이 떨어졌지만, 그래도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르는 사실 셰이가 제일 어중간하다고 생각했다. 헨드릭의 도끼질이나 카야의 철퇴질에 비해 파괴력이 떨어지고, 이상한 천칭이 떨어지는 건 자신의 공격에 비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은 달랐다.
결코 꺾이지 않았다. 몸도, 그리고 마음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던 괴물들에게 공격이 시원찮다고 비웃었다. 결코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뒤에 서 있는 우리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움직임은 투박하고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그리고 묵직했다.
아무도 뒤로 보내지 않겠다던 처음의 외침처럼, 셰이는 쓰러지지 않았다.
자신을 강제로 데려간 교단 사람인데,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녀는 위대했다.
반면에 자신은?
그깟 피 좀 봤다고 무서워하고, 변신 한 상태에서 괴물 좀 죽였다고 이성을 잃으려 하는 건가?
죽인 게 사람도 아니고, 괴물인데.
그리고 내 종족을 알고도 죽이기는커녕 처음으로 잘 대해주는 이들을, 내 정신 문제 때문에 그들까지 위기에 처하게 된다고?
- 공격해죽여공격해죽여공격해죽여지금이면성공할수있어공격해뒤를급습해공격해공격해공격해목을찌르고신선한피를마셔가슴을가르고신선한심장을씹어먹어배를가르고신선한간을씹어먹어공격해공격해공격….
‘조용히 해!’
아르는 주먹으로 제 얼굴을 후려쳤다. 쌍코피가 터지고 입술이 터졌다. 지켜보던 헨드릭이 기겁하며 다가오려 했지만 아르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아르….”
“…!!”
“명, 령… 줘…!”
헨드릭의 눈이 커졌다. 그는 괜찮냐고 물었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저놈들.”
헨드릭은 9시 방향을 가리켰다.
“몰살해버려.”
그 순간, 호랑이 머리였던 것이 공중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