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신중한 준비(9)
“뭐해? 멍하니 서서.”
“아니. 아무것도. 가자.”
책임자는 방어 스팟도 표시를 해두었다고 했다. 해수와 해충들이 주로 몰려오는 루트가 있다고 했다. 그곳에 진을 치고 싸우고 있으면 다른 곳으로 빠졌던 것들까지 소란을 포착하고 몰려올 거라나 어쨌다나. 애초에 축산장을 습격하는 거 자체가 가축들의 피와 살을 원해서 그런 거였으니, 생명체라면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방어 스팟에 도착한 우린 적당한 곳에 자리잡아 가벼운 휴식을 취했다. 해충해수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몇 시간 동안은 못 쉴 테니까. 어차피 전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턴제로 진행될 거긴 한데, 그게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 궁금하긴 했다.
‘방마다 괴물이 등장하고, 방 사이에 함정이 있고 돌파하면 다음 방으로 이동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디펜스하는 느낌인데.’
이런 퀘스트는 더 롱 테러에도 있었다. 다만 인게임으로 구현되지는 않아서 정보는 없었다. 가장 가능성이 큰 건 저번 인던에서 보스 전에 겪었던 난입의 형태였다.
‘막 해충이라고 백 단위 천 단위 이따구로 튀어나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딴 식으로 튀어나오면 망설임 없이 후퇴할 생각이었다. 명예 실추? 위약금? 그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후우… 스킬 설명만 봐선, 알듯말듯 하단 말이지.’
중요한 건 아르의 스킬 구성이었다. 일단 쉐이프시프터답게 스킬도 많았는데, 주 스킬만 6개고 쉐이프시프팅 스킬까지 포함하면 8개가 있었다. 인간 폼일 땐 중장거리에서 핀포인트 저격이나 cc기를 넣는 것 같고, 늑대 폼일 땐 근거리에서 ‘포효’나 ‘격노’상태를 통해 엄청난 데미지딜링을 뽐내는 것 같았다.
‘유연함이라는 파격적인 특징 덕에 자리 선정 문제도 비교적 자유로워.’
전투 측면에서는 뛰어나보였지만… 우리가 필요한 파티 유지력과 유틸성 측면은, 일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래도 시작 전부터 초를 칠 수는 없지. 잘 싸운다면, 세스티아처럼 인맥 하나 쌓았다고 생각하고.’
정말 상상하기 싫은 일이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카야나 셰이 둘 중 누구 하나가 죽는다면….
“대장님! 와요!”
“알았어! 전투 준비!”
셰이의 외침에 휴식은 취하되 경계는 늦추지 않고 있던 일행들이 잽싸게 전투태세를 갖췄다. 우선 대열은 셰이-카야-나-아르 순이었다. 아르의 인간 폼 공격 스킬들은 원래 3열 제한이 있었지만 유연함 특성으로 인해 4열에서도 공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직접 대입해보니 씹사기 특징이었다.
“맙소사.”
“윽.”
작은 감탄은 시야를 가득 채우는 해수와 해충들을 본 순간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순히 보기만 했는데도 어째서 이 의뢰 경험자들이 ‘존나 좆같았다.’라고 말했는지 벌써부터 이해됐다.
징그럽게 생겼다.
징그럽게 많았다.
역겨운 냄새가 난다.
존나게 시끄럽다.
이 환장할 조합들이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켜 벌써부터 멘탈이 까이는 기분이었다.
‘씨발…!’
[속도 체크]
셰이 : 4
카야 : 4
유진: 7
아르 : 5
흉포한 멧돼지1 : 3
흉포한 멧돼지2 : 3
흉포한 늑대1 : 4
흉포한 늑대2 : 4
[유진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전투가 시작됐다. 처음은 가장 앞에서 맹렬하게 달려오던 멧돼지와 늑대였다. 당장이라도 휩쓸고 지나갈 것 같았던 수많은 해충해수들을 보니 숨이 턱하고 막혔다. 이렇게 많이 달려드는데 하루살이들이 생환할 수 있다고? 설마 나 때문에 여기도 난이도가 올라간 건 아니겠지 씨발?
바로 괴물들의 스펙을 확인했다.
[흉포한 멧돼지1]
체력 24/24
공격력 2~12
방어력 3
속도 3
[흉포한 늑대1]
체력 22/22
공격력 6~10
방어력 2
속도 4
체력과 방어력이 낮았다. 공격력은 그 둘에 비해 높았다. 물론 스펙을 또 한 번 업그레이드 한 우리에겐 간지러운 수준이라서 크게 걱정은 안 됐지만, 아르는 아니었다. 거기에 피치명타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었다.
저렇게 많은데 한 번에 4마리씩만 달려드는 게 다행이었다. 이때만큼은 빌어먹을 시스템에게 감사했다. 징그럽게 생긴 거대 해충들과 흉포한 해수들이 시끄러운 소릴 내며 대기하고 있는 모습은 꼭 건널 수 없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용사들과 인연을 맺고 깊어지면서 내가 정말 이 세계 주민이라도 된 것 같다가도, 전투할 때만큼은 내가 빌어먹을 게임 속에 빠졌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다.
던전에서는 독립된 방에 한 무리씩만 나오니 비교적 덜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비현실성과 그로부터 비롯된 괴리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쓰읍.’
짧은 감상을 끝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 전투는 시작됐다. 열흘 정도 만에 다시 잡은 손도끼가 살짝은 어색했다.
뛰쳐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데미지 기댓값을 확인했다.
[흉포한 멧돼지1] : 5~16
[흉포한 늑대1] : 6~17
‘아. 인간형 아니지 참.’
입맛을 다셨다. 괴물들은 미쳐버린 동물과 거대화 곤충이었다. 정말 쏠쏠했던 +4데미지가 사라지자 뭔가 굉장히 허탈했다.
그래도 3강, 아니 4강이 된 한손도끼를 치켜들었다. 업그레이드 후 먹는 첫 밥이 인간의 두개골이 아니라 도끼가 좀 서운하겠지만, 이번엔 질보단 양이었다.
“몇 마리라도 쪼개주마!”
사기진작을 위한 외침을 내뱉고는, 속도가 높은 3열의 늑대에게 도끼를 힘차게 내리찍었다.
캐애앵!
[강력한 일격!]
[유진이 흉포한 늑대1에게 2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26]
[흉포한 늑대1이 죽었습니다.]
“나이스샷.”
훗날 내 기억 중 가장 좆같았던 순간 Top3에 반드시 꼽힐 <끊이지 않는 위협> 1구역 방어전, 개엿같은 디펜스의 시작이었다.
**
처음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치명타가 터지면 한방이었고 안 터져도 최소 반피였다. 거기에 방어력이 부실했던 아르는 4열인데다가 괴물들의 대부분이 근거리 공격하는 놈들이어서 피격확률이 적었다. 혈액공포증이랑 죽음공포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페널티를 두 개나 가졌던 아르도 생각보다 잘 싸웠다. 특히나 가시와 칼날이 달린 채찍으로 광역공격을 퍼부어 4마리 전부를반피 이상 날려버렸을 땐 박수까지 쳤을 정도였다. 정작 그런 속 시원한 공격을 펼친 아르가 괴물들한테서 살점이랑 피가 솟구치자 헛구역질을 하며 멘탈리티가 까였으니 웃지는 못했지만, 아르의 광역기와 셰이의 광역기가 합쳐지자 괴물들은 놀라운 속도로 삭제됐다. 아르의 멘탈리티가 살짝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대로만 가면 지치긴 해도 순조롭게 끝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그 때, 상황이 바뀌었다.
단조롭게 4마리씩 싸우다가, 빈 자리가 생기면 추가로 들어오던 난입 방식에서 갑자기 전장이 확 넓어진 것이었다.
가장 먼저 이변을 포착한 건 최후열에 있던 아르였다.
“저기! 저기 봐!”
“뭐… 씨발, 저게 뭐야?”
막 거대화한 모기 같은 해충을 잡고 가까스로 헛구역질을 참은 나는 아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곤 아연실색했다. 카야와 셰이도 숨을 흡 들이켰다.
“설마….”
“대장님! 저것들을 파괴해야 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상대했던 전장은 그대로 유지됐는데 그 뒤쪽에 있던 해충들이 3시 방향으로, 해수들이 9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정말 대놓고 수상한 물체가 하나 솟아났다.
“저놈들, 여기로 유도되는 거야?”
제단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가늘고 이상하게 생겼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맛 가버린 짐승들과 징그러울 정도로 거대해진 곤충들. 계속 막히고 있는데도 지치지도 않고 세일럼 서쪽을 노리는 이지 없는 것들.
3시와 9시에 있는 것들이 당장 달려들진 않았다. 수상한 물체 위에 있던 점액질 같은 것이 탁한 하얀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용사대가 포위당했습니다.]
불길한 메시지가 떠올랐고.
[제단은 한 라운드가 지날 때마다 색이 변합니다.]
[제단이 검은색으로 변하면 제단은 파괴되며 난입합니다.]
[괴물을 죽일 때마다 제단의 변색이 늦춰집니다.]
[제단이 파괴되면 새로운 제단이 생겨나 새로운 괴물들이 등장합니다.]
[제단은 새로 생길 때마다 색이 탁해집니다.]
[포위가 풀릴 때까지 용사대는 후퇴할 수 없습니다.]
‘뭐, 이딴!!!’
이를 악물었다. 이건 더 이상 하루살이들이 급전을 땡길 때 어쩔 수 없이 오는, 그런 역겹고 좆 같기만한 의뢰가 아니었다. 당장 저놈들에게 맞아죽을 걱정은 없었지만, 아르가 문제였다. 심지어 한시적으로 후퇴도 막혔다. 포위가 풀리는 조건이 안 나와 있으니 존나 막연했다.
삼면 포위.
3시와 9시에 위치한 괴물들은 정면에 있는 괴물들보다 살짝 스펙이 떨어졌다. 잡기는 여전히 쉬울 것이다. 허나 제단만신경 쓰다간 처음보다 스펙이 높아진 괴물들한테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가랑비에 옷이 조금씩 젖듯 피해가 누적될 것이다. 그래서 정면에 신경 쓰면 방치된 제단은 변색될 거고….
‘와 씨발, 돌아버리겠네?’
호쾌하게 괴물들을 박살내던 동료들도 침을 꼴깍 삼키면서 무기를 부여잡고 있었다.
“으….”
“아르?”
“싫어….”
그나마 카야와 셰이는 온갖 험한 경험을 다 해서 그런지 침착함을 유지했으나, 아르는 아니었다. 다른 이들처럼 침착한 척 하려 했으나 채찍을 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좋지 않은데.’
가뜩이나 계속된 전투로 인해 혈액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아르의 멘탈리티만 유독 많이 까인 상황.
“아르.”
“…응.”
“변신, 할 수 있겠어?”
“지금…?”
“어.”
마침 아르의 턴이었다. 최대체력과 최대공격력, 그리고 방어력이 뻥튀기되는 늑대 폼을 얼마나 유지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벌벌 떠는 걸 놔둘 순 없었다.
‘늑대폼일 때 약간 짐승같이 변하는 거 같으니, 덜 무서워할 수도 있어.’
“알았어. 해볼게.”
부르르 떨던 아르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채찍을 내려놓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 번 해봐서그런지 저번보다 변신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일부러 변신을 고려해 품이 넉넉한 옷을 입은 덕에 옷을 벗어야 한다거나 옷이 찢어질 염려는없었다. 순간 늑대인간의 방어구 강화는 어떤 식으로 하는 건가 싶다가, 아르의변신이 거의 끝나자 잡생각을 지우고 명령을 내렸다.
늑대 폼, 개시였다.
[아르가 늑대 폼으로 변신합니다.]
[최대 체력이 6 증가합니다.]
[최대 공격력이 4 증가합니다.]
[방어력이 2 증가합니다.]
[속도가 3 감소합니다.]
[각성 확률이 3% 증가합니다.]
[‘능수능란’ 특징으로 인해 공격력이 추가로 2 증가합니다.]
속도를 제외한 모든 피지컬 스탯이 대폭 올랐다. 경이로울 정도의 상승폭이었다.
‘아르! 학살의 포효다.’
가녀린 소녀에서 흉포한 여전사로 탈바꿈한 아르가, 날 보며 잠시 그르릉거리더니 이윽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키가커지면서 봉긋해진 가슴이 엄청나게 부풀어올랐고, 저러다 가슴이 터지지 않을까 싶은 순간.
“-------------------------!!!”
전장이 전율했다.
그녀의 포효는.
아군인 나조차 아주 살짝 지려버릴 정도로, 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학살의 포효]
[아르가 모든 괴물들에게 5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모든 괴물들의 공격력이 2 감소합니다.]
[모든 괴물들의 방어력이 1 감소합니다.]
[도합 7마리의 괴물들이 상태이상 ‘마비’(1턴)에 걸렸습니다.]
[해당 괴물들은 다음 턴에 공격과 이동을 할 수 없습니다.]
[흉포한 호랑이12가 죽었습니다.]
[아르가 재행동을 얻습니다.]
“아르르….”
엄청났다.
물론 저 괴물들의 스펙이 낮은 걸 감안해도, 임팩트는 장난 아니었다. 맨 처음 카야가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즉사를 터뜨렸을 때와 거의 맞먹는 임팩트였다. 아군인 나조차 이렇게 여운에 잠겨있는데, 그걸 제대로 쳐맞은 괴물들은 어떨까.
오드아이를 빛내며 내게 고개를 들이미는 아르의 모습에 정신을 차렸다.
“한 번, 날뛰어봐.”
“으르르…!”
내 말이 끝나자마자 9시 방향으로 짐승처럼 쇄도한아르는, 손끝에서 툭 튀어나온 날카로운 손톱으로 9시 방향 1,2열에 있던 사자들을 사/자로 만들어버렸다.
“이게… 늑인?”
촤아악-
아르가 팔을 휘두르자 손톱에서 튀어나간 피가 마비에 걸린 놈들 위에 흩뿌려졌다.
씨발, 존나 멋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