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신중한 준비(7)
“흐으….”
“언니!”
“셰이…? 아아….”
“일어나지 마요! 치유하긴 했지만 아직 완벽하게 된 건 아니니까!”
“대장, 대장은어디 있습니까?”
“언니 여기 데려오고 나서 다시 나갔어요.”
헨드릭이 떠나고 약 세 시간 후에 카야가 깨어났다. 그녀는 깨어나자마자 헨드릭을 찾으며 움직이려 했지만 셰이에게 저지당했다.
“….”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 답답했지만 셰이는 자신이 나서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조용히탁자를 침대 옆으로 옮긴 다음, 그 위에 간식거리를 올려놓았다.
‘역시.’
아르는 체구에 비해 식탐이 상당했다. 그동안 제대로 못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늑대인간이 원래 그렇게 많이 먹는 건지는몰랐다. 셰이보다도 많이 먹었다. 그런 아르가 간식거리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카야도 마찬가지였다. 어제 저녁부터 계속 굶은 터라 많이 배고픈 상태였다. 참회할 때는 끔찍한 고통 때문에잊을 수 있었지만, 치유 받고 나니 배고픔이 밀려온 것이다.
둘의 시선은 자연스레 탁자에 쏠렸고,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러면서도 둘 다 간식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셰이는 웃어야할지 한숨을 쉬어야할지 가늠이 안 됐다.
“으음~맛있다!”
결국 그녀는 더 자극하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맛있는 간식은 아니었지만일부러 맛있는 척 연기하며 과장된 동작으로 씹어먹었다. 카야의 목울대가 움직이고 아르가입맛을 다셨다.
“어라. 너무 맛있어서 이러다 내가 다 먹어버리면 어떡하지?”
헨드릭이 들었다면 무슨 연기가 그러냐며 폭소했을 정도였지만, 어느새 다시 간식을 바라보며 서로의 눈치를보고 있는 카야와 아르에겐 잔인한 카운트다운의시작이었다.
“으음~ 어차피 좀 있다가 점심 먹어야 하니 치우고 나중에 먹어야겠다.”
그러다 셰이가 아주 느릿느릿 간식을 다시 집어넣으려하자, 드디어 움직임을 보였다.
카야였다.
“셰이.”
“네?”
“굳이 셰이가 수고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대로 놔둬도됩니다.”
“으음, 그렇지만 먹지도 않을 건데이렇게 놔두다간 상하잖아요. 탁자도 원위치 시켜야 할 거 같고.”
“그러니까.”
카야는 진작 셈이 끝났는지 손을 뻗어 재빨리 간식을 3등분했다. 그중 자기 몫만을 가져간 카야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대로, 먹어버리면 되니까. 치울 필요는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점심이야 또 먹으면 되니까.”
“흐흥~”
“그 웃음은 뭡니까.”
“아무 것도 아니에요~”
히죽 웃은 셰이는, 자신 앞으로 내밀어진 간식을 멍하니 보고 있던 아르와 눈이 마주쳤다.
“안 먹어요?”
“…진짜, 내가 먹어도 돼?”
“그럼요? 언니가 손수 나눠주기까지 했잖아요? 아르 몫이라고.”
아르의 시선이 카야에게 닿았다. 꼭꼭 간식을 씹어 먹는데 집중하고 있던 카야 또한 시선을 느끼고 아르와마주봤다.
“이거, 언니가 샀던 거잖아요. 맞죠?”
끄덕-
“그리고 아르도 먹으라고 3등분 한 거구요. 맞죠?”
…끄덕
셰이는 웃음을 참았다.
“아르는 저 간식을 먹어도 되는데. 저라면 어떤 행동을 하고 먹을 거 같아요. 그게 뭘 거 같아요?”
“…날 어린이 취급하는 건 그만둬.”
아르는 짜증이 났다.
납치당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 하루가 너무나 편안한 게 짜증났다. 자기를 억지로 데려오고 자꾸 애 취급하는 금색 교단 여자가짜증났다. 다짜고짜 죽일 듯이 공격한 다음 죄책감이 생겼다며 자해하고 돌아와 기절해버린 회색교단 여자가 짜증났다. 자신을 변호해주고 그나마 제일 친절한 것 같았던 남자는 이 짜증나는 두 여자들 사이에 자신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돌아다니는 게 짜증났다.
자신이 늑대인간이라는 것에 자부심도, 혐오심도 없이 그저 사람으로 살아왔던 아르에게 호기심이랍시고 이것저것 시답잖은 걸 물어보는 것도 짜증났다.
그리고 이 짜증나는 사람들이 머무는 짜증나는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어 짜증났고, 심지어 배가 고파자신을 공격했던 사람이 내민 간식에 눈이 멀어버렸다는 게 너무나 짜증났다.
날 마치 간식 앞에서 망설이는 어린이라도 되는 것 마냥 바라보는 저 금색 교단 여자의 표정! 으으으!
‘나도 자존심이 있어!’
아르는 반쯤 내밀었던 고개와 손을 되돌렸다.
“됐어. 내가 어제 거지꼴이었다고 해서 거지는 아니니까.”
**
“그래서? 그 다음 어떻게 됐는데?”
내가 사온 빵은 카야와 아르의 뱃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녀들은 재빨리 빵을 해치우곤 다시 침대에서 옷 가지고 투닥거리고 있었다.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분위기 싸해진 거 아냐?”
“그때 언니가 한방에 뒤집어버렸죠?”
“카야가?”
**
“그쪽을 거지라고 한 적 없다. 세 명이니까 3등분을 한 것일 뿐,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된다.”
“그렇게 말해도 안 먹는다니까?”
“그리고.”
카야는 주춤주춤 침대에서일어나더니 아르에게 다가갔다. 아르는 드르륵 의자를 뒤로 끌며 물러났지만, 그보다 카야가 다가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언니!”
“괜찮습니다.”
절뚝이던 카야가 양손으로 의자를 잡아 고정시키며 아르를 내려다보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눈높이를 맞췄다. 지근거리에서 차디찬 회색 눈을 마주친 아르는 순간 움츠러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절대 움츠러들지 않겠다는 각오의 표현이었지만, 그 각오가 발휘될 일은 없었다.
“그대를 짐승이라 모욕한 걸 사과합니다.”
“아?”
“또한 과도하게 공격한 걸 사과합니다.”
“에.”
“오로지 내가 겪었던 경험에 의존해 그대를 죄인으로 몰고 간 것을 사과합니다.”
“….”
“같이, 먹지 않겠습니까.”
카야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아르 몫의 간식을 아르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저는 카야라고 합니다. 아르.”
**
“이야… 그것 참 카야답네.”
“맞아요. 아르도 사과를 받아들이고 함께 간식 먹으면서 어색하게 조금씩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어느새 저렇게 되었네요?”
“다행이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야는 생각보다 빨리 털어냈고, 아르는 생각보다 빨리 받아들였다. 신뢰 관계는 당연히 없겠지만,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는 게 어딘가.
‘급하게 굴지 말자.’
천천히.
아무리우리가 네 번째 용사가 절실하다 해도, 어젯밤과 같은 일이 또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가뜩이나 우리 용사대의 목표가 여기 사람들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다보니, 금화를 노리는 절대다수의 용사들은 걸러지는 마당이었다.
‘일련의 흐름들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아르가 이대로 4번째 용사가 될 수도 있단 말이야. 흔해빠진 용사와는 다른 느낌이기도 하고. 조합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아직은 근거도 뭣도 없는 그저 감이었지만, 서투르지만 집중해서 바느질을 하는 아르와 그걸 지켜보는 카야와 셰이의 모습을 보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며칠이 더 지났다. 나뿐만 아니라 카야도 다시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한번은 너무 답답해서 용사지원소에 용사대원 모집 요강 같은 걸 붙여보면 어떨까 싶었지만, 던전이 있어서 먹고 사는 도시에서 던전을 없애버릴 수도 있는 용사대를 대놓고 홍보하긴 좀 그랬다.
‘정녕 운명적 만남뿐이냐….’
이런 방식으로는 백날 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던전 말고, 수준 낮은 인던 찾아서 아르랑 같이 돌아보자. 그럼 프로필이 뜰 거고, 아르 스펙이랑 스킬 구성이 2구역을 같이 돌만하다고 판단되면 아르에게 집중. 그게 아니라면, 아르는 빨리 포기하고 원하는 클래스를 하나로 특정한 다음 그 클래스만 집중적으로 찾는 게 낫겠어.’
평소보다 일찍 여관에 돌아온 나는 마침 셰이와 점심을 먹고 있던 아르에게 물었다. 아르는 요 며칠 사이 아주 조금씩 경계심을 풀고 있는 듯 했다.
“의뢰? 다 같이?”
“그래. 아르 너도 그동안 의뢰로 돈 벌었다며.”
“맞아.”
“준비되면 바로 가벼운 의뢰 하나할까 하는데. 어때?”
“당신들은, 용사대잖아. 던전가는 게 더 이득 아냐?”
“네 실력을 보고 싶어서.”
“….”
“너도 알고 있잖아. 아르, 너, 우리 용사대의 네 번째 용사 후보라고. 같은 용사대가 아닌데 바로 던전에 데려갈 수는 없어.”
한번 들어가면 공포의 상자방에서 쫓겨나지 않는 이상 세일럼으로 못 나오기 때문에 못 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내가 좀 지식이 있는 편이라 다른 클래스들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대강 알거든? 근데 늑대인간은 네가 처음이라 정보가 아예 없어. 그래서 확인하고 싶은 건데, 안 될까? 보상은 균등분배 할 거야.”
“난 한 번도 던전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의뢰 하면서도 괴물을 적극적으로 죽이지 않았어. 혹시 내가 늑대인간이라는 이유로 과하게 기대하고 있다면….”
“걱정 마. 직접 눈으로 본 걸로 판단할 거야.”
‘아르. 그 기대는 솔직히 거지꼴로 나타나서 카야에게 단숨에 제압당한 그 순간에 박살났어. 내가 기대하고 있는 건 네 스킬 구성이 어떻게 되느냐야.’
마음의소리는 애서 묻어두었다.
“혹시 무기는 뭘 써?”
“채찍.”
“채찍?”
“…가끔은 단검도.”
왠지 늑인은 손톱으로 싸울 것 같다는막연한 이미지 때문일까? 정말 의외였다. 단검은 보물 사냥꾼이나 암살자가 애용하는 무기였고, 채찍을 사용하는 클래스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혹시 변신하고 나서는… 아차. 우리앞에서 변신한 게 처음이라고 했지.”
“흥.”
늑인 무기가 채찍이라고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데이터의 근거가 아르 한 명뿐이었고, 아르는 심지어 변신하고 싸워본 적도 없었다.
‘혹시 인간 폼일 때 중장거리, 늑대 폼일 때 근거리인가? 아니면 폼 상관없이 순전히 보유 스킬에 따라 달라지나?’
제법 흥미로웠다.
“무기는?”
“집에 있어. 누가 묻지도 않고 강제로 데려오는 바람에.”
“쓸 만해?”
“쓸 만하지 않더라도 망가지지 않는 한 계속쓸 거야. 겨우 챙긴 유품이니까.”
“아. 음.”
“갔다 오면 되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 동행도 내 쪽에서 요청한 거고, 억지로 데려온 것도 셰이여서 셰이에게 가져오라시켰다. 하지만 아르가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
“믿진 않겠지만, 최대한 빨리 돌아올 거야.”
아르가 침대 위에 널브러져있는 옷을 가리켰다.
“저거, 카야가 돌아오기 전까지 완성하기로 했으니까.”
타타탓-
며칠 사이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진 아르가 여관을 뛰쳐나갔다. 셰이가 순간이지만 모습을 놓쳤다는 말이 전혀 과언이 아닌 게, 정말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있잖아, 셰이.”
“네?”
“왜 우리는 당신들인데, 카야만 카야로 부르는 걸까?”
“그건… 처음으로 간식을 준 게 언니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일리 있는데?
**
“어이, 걔 어딨어 걔.”
“누구.”
“걔, 그 뭐더라. 조그맣고 까만 머리에 감 좋은 년 있잖아.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아. 아르? 걘 왜.”
“그동안 계속 끼고 다녔는데 왜안 보이나 해서. 있으면 편하고 좋잖아. 하는 거에 비해 돈도 적게가져가서 좋은데.”
“글쎄. 딱히 우리가 같은 용사대인 건 아니니 강제로 참가시킬 권리는 없어. 대체가 없는것도 아니고.”
“그렇게 형편 좋은 얘기 말고, 걔 데리고 온 다음에 출발하자. 이번 의뢰,저번보다 더 짭짤하잖아? 이만한 보상 받기 흔한 일 아닌데, 싼값에 실력 보증된 년 써야지!”
“아르가 실력자인 건 맞지만, 양날의 검이야. 저번의뢰 때 배당도 반이나 깎았어. 벌써 까먹은 거야?”
“에이, 걘 밥만 제때 먹여도 괜찮다니까?”
“몰라. 이미 명단까지 제출했어.”
“쓰읍. 명단이야 출발하기 전에 수정하면….”
“그렇게 떼먹고 싶으면 직접 데리고 오든가.”
“에이 씨발 같이 나눠먹었으면서 나만 나쁜 놈 만드네…?”
“왜 그래?”
“저기 저거, 걔 아냐? 어이! 거기 검은 머리! 거기 서봐! 야! 씨발, 거기 안 서?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