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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화 〉신중한 준비(6) (99/218)



〈 99화 〉신중한 준비(6)

여러모로 싱숭생숭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특히나 아르가 잠들기 전에 얘기했던 제 과거사의 조각들이 아직도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언니는 아직도 안 돌아온 건가요.”

“어.”

어젯밤 셰이가 아르를 씻기고 있을 때 혼자 있고 싶다며 뛰쳐나갔던 카야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얌전히 수프를 떠먹고 있던 아르는 카야 이야기가 나오자 동작을 멈추더니 우리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 그래. 누가 잡아먹는 것처럼. 누가 안 뺏어먹으니까 괜찮아.”

“흥.”

어제의 아르와 오늘의 아르는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불쌍한 거지에서 도도한 소녀로 탈바꿈했다. 동시에 반항기가 줄어든 모습이었다.

온수 목욕? 따뜻한 밥? 푹신한 침대?

뭐가 그녀의 마음을 좀 누그러뜨렸는진 몰라도,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셰이, 그럼 너는 어쩔 생각이야?”

“일단은 아르에 대해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대장님은요?”

“일단은 나도 계속 물색은 해봐야겠지. 이제 겨우 하루 지났잖아? 카야가 어딨는지도 찾아봐야겠고.”

“언니라면 어디 가서 험한 꼴은 당했겠지만, 걱정돼요.”

“짐작 가는 곳이 있긴 해.”

셰이 말마따나 아예 정보가 없는 늑대인간인 아르에 신경 쓰는 것도 중요했다. 하지만 아르는 일단 셰이에게 맡기기로 했다. 카야에게 말했던 것처럼 후보는 많을수록 좋았다. 아르가 괜찮아보여서 몰빵했다가, 우리 용사대랑 전혀 어울린다면 그동안쏟은 시간과 돈과 감정이 아깝지 않겠는가. 만약 늑인이 1‧2열에서만 활동 가능한 클래스라면, 후열 전용 스킬을 구하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카야나 내가 바보가 되니까… 그건 안  일이었다.

‘전투 수녀도 힐링 스킬이 있긴 있지만 치유 수녀보다 효율이 떨어지고, 구한다고 바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 거기에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스킬이 너무 좋아서 힐보단 철퇴로 후두려 패는 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파티 유지력. 혹은 유틸성.

과연 늑인이라는 클래스가   하나를 보유하고 있을지.

“그럼, 이따 보자. 아르도 셰이 말 잘 따르고.”

“네, 대장님!”

“….”

내 말이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린 아르를 지나쳤다.

‘하루아침에 납치당한 꼴이니 기분 좋을 수가 없겠지. 아무리 의도랑 대우가 좋다고 해도 말이야.’

데려올 때는 어떠한 폭력도 없었다곤 했지만… 그건 차차 이야기를 더 하면서 풀어가야 할 문제였다.

나는 내가 맡기로 했던 남쪽 구역으로 다시 향하려다가 방향을 틀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걷다보니 라엘라 교단 수도원이 나타났다. 입구에 성전사들이 지키고 있다는 유스티티아 교단 수도원과는 다르게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라엘라 교단의 수도원,  안쪽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제발로 여길 찾아올 줄이야.”

며칠 지나지 않았건만 정말 공포스러웠던 곳을  의지로 찾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가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여기인 것을.

끼이이익-

괜히 소름끼치는 문소리에 흠칫했다. 너무 쫄보인 거 같아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안쪽을 둘러봤다. 카야는 보이지 않았다.

“카야.”

하지만 저 안쪽에서 아주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렸던 곳을 찾은 다음, 칸막이를 열었다.

“…카야.”

가장 구석진 칸막이, 그 좁고 어두운 곳에서 카야는 여신상 앞에 무릎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알몸으로.

“카야!”

그리고 그녀의 알몸 여기저기에 살벌한 회초리 자국과 채찍 자국이 남아있었다. 피멍은 기본이고 핏물과 진물이 흘러내리는 곳도 있었다.

“아… 대장…?”

“너, 도대체!”

“아직… 참회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참회는 무슨!”

그나마 여길 먼저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막연히 자신의 행동을 곱씹어볼 거라 생각은 했다만, 이렇게 심각한 ‘참회’를 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나는 저항하는 카야를 억지로 안아들었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해서 이러는 거야? 어?”

“….”

“왜 그렇게까지 네 몸을 해치는 거야? 이렇게까지  일이었냐고!”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우고 죽일 뻔한 일입니다. 대장이랑 셰이가 말려주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죽였을 겁니다. 제 죄는 큽니다. 그래서.”

“넌 내 거야.  몸도 내 거라고.”

“대장.”

“여신님께고해를 하는  좋아. 근데 이건 아냐. 당사자한테 사과를 해. 대화를 하고 오해를 풀고 용서를 구해. 이렇게 자해해서, 뭐가 바뀌어? 양심이 채워져? 아르를 공격했던  행동 자체가 사라져? 아니잖아!”

“읏….”

하룻밤 떨어져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래서 하루라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카야는 정말 여러 모로 내게 사랑스럽고 든든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과격하고 무서울 때가 있었다.

“세스티아님한테 가서 치료해달라고 하자.”

“아니, 아닙니다. 한창 바쁘실 텐데 이런 부탁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 혼자서 할  있습니다.”

“정말이야? 또 자해하려는  아니고?”

“자해가 아니라 참회였습니다만….”

“스읍!”

씨발, 이딴 끔찍한  참회라니. 이곳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가끔씩 드러나는 엄청난 간극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디 돌아다닐 생각도,   생각도 말고 여관에서 푹 쉬어. 셰이한테도 치유 받고. 알았어?”

“….”

“왜 대답이 없지?”

“알겠, 습니다. 대장.”

“그래. 이따 저녁에 확인할 테니까, 제대로 치유 받아. 진짜로 확인할 거야.”

**


“언니….”

아르의 옷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던 셰이는 온몸이 만신창이가  카야를 보고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품에 안고  헨드릭이 제대로 치유하라고, 어디  가게 잘 지켜보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상당히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 이쪽으로 와요.”

“싫어.”

아르는 즉시 거절했지만 셰이는 들리지 않은 것처럼 아르의 손을 잡고  옆으로 끌고 왔다. 아르는 카야와 가까워지는 게 거북한지 계속 벗어나려 하자 셰이는 아예 제 품에 가둬버렸다. 아르는 한숨을 쉬었다.

“…언니는 어제 아르를 공격한 걸 많이 후회한 모양이에요. 이렇게 깊은 참회를 했을 정도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참회하는 것.

두 눈이나 두 귀를 멀게 하는 것.

사지 중 한 이상을 절단하는 것.

카야가 한 참회는, 신체를 영구적으로 손상시키는 것들을 제외하면 가장 강도 높은 참회였다.그만큼 카야가 겪은 충격도, 후회도 크다는 뜻이었다.

셰이는 자신의 섣부른 맹세와 고집 때문에 카야가 상처를 받은 것 같아 미안했다. 사실상 혼절해버린 카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는 좋은 사람이에요. 표정 변화가 적고 말도 적고 기본 표정이 차갑게 보여서 오해하기 딱 좋지만, 대장님이랑  잘 챙겨줘요.”

“….”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아무리 언니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르에겐 와닿지 않겠죠. 알아요. 사람에 대한 평가는 남한테 듣는 것보단 직접 경험하며 느끼는 게 더 정확하니까.”

셰이는 아르를 풀어주었다. 후다닥 벗어나 경계하는 아르에게 셰이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직접 공격만  했다 뿐이지, 제 호기심 때문에 아르 당신을 상처 입혔어요. 미안해요.”

셰이는 금화  개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대장님은 아마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실 거예요. 그러니 그 전에 돌아가면 좋을 거 같아요.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돌아가실 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나 때문에  여자랑 싸우기까지 했으면서, 남자가 없을  풀어준다는 말이야? 돈도 이렇게 많이 주면서?”

“네.”

“왜?”

“그야 처음엔 아르가 계속 도망가니까, 어쩌다보니 데려오게 됐는데… 서로 대화하고 알아가는덴 꼭 한 장소에서 같이 머물 필요는 없잖아요? 주기적으로 만나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뇨? 그런 거 없어요. 정말이에요. 지금 당장 저 금화를 갖고 나가도 돼요. 뒤쫓지 않아요.”

아르는 팔짱을 끼며 셰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셰이는정말로 아르에게 신경을 꺼버리고 카야를 간호하기 시작했다. 아르는 혼란에 빠졌다.

‘대체… 어쩌자는 거야?’

셰이는 진심이었으나 아르의 입장에선 어제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제 셰이에게 붙잡혔던 것도 셰이가 떠난 척 하고 숨어있던 속임수 때문이었는데, 지금도 그런 속임수가 아니라는 확신이 안 들었다.

팅~

아르는 괜히 금화를 튕겼다 받았다 하며 계속 셰이를 감시했지만….

“열이 내려갈 생각을 않네….”

셰이는 카야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몰라. 조금  지켜봐야해. 혹해서 나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아르는 어제 일을 잊지 않았다.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은 떠나지 않고 이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결코, 푹신한 침대와 맛있는 밥을 공짜로 누릴  있는 것 때문은 아니었다. 정말로.


**

‘쯧. 오늘도 허탕인가.’

오전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 돌아다녔다. 용사지원소도 들려보고 의뢰소도 들려보고 각 교단이나 던전 입구 등 많은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살폈지만, 삘이 오는 사람이 없었다.

‘용사지원소처럼 간단 프로필이라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성별과 종족은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니 정확한 클래스만 알아도 어느 정도 명확하게 거를 수 있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쉬웠다. 같은 용사대가 아닌 이상 수준이나 클래스, 보유 스킬 등을 묻는 건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실, 그런 것보다도 카야가 계속 신경 쓰여서 제대로 눈에  들어온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셰이가 잘 해줬을까.’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카야가 가장 좋아하는 빵을 샀다. 아무런 특징도 없고 맛도 그냥 그런,  기준에선 그냥 영양소 채우기용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빵이었으나 카야는 이상하게 이 빵을 잘 먹었고, 제일 빨리 집어먹었다.

‘내가 어젯밤에 했던 말 때문에 죄책감을 받은 거니, 잘 달래줘야겠지.’

이 또한 깊은 흉터가 되지 않도록, 잘못 놔둬서 고름이 생기지 않도록. 안 그래도 카야는 상처가 많은 여자니까, 조심스럽게다룰 필요가 있었다.

자해의 흔적을 보고 카야에게 엄하게 말했던 것도 사실 신경 쓰였던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따끈따끈한  봉지를 들고 방에 도착한 순간, 깨끗하게 날아갔다.

“그러니까,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이익, 나도 할 수 있어!”

“그 말이 벌써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이리 주십시오.”

“내가 입을 건데, 왜 자꾸 그쪽이 해주겠다는 거야!”

“멀쩡한 옷이 점점 헝겊으로 변해가는데,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까. 게다가 옷에 피가 묻으면 세탁도 해야 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은 아르가 카야가 입던 옷 중 하나를 붙잡고 서툴게 바느질을 하고 있었고, 카야가 옆에서 훈수를 두고 있었으며 그런 둘을 셰이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 대장님. 오셨어요?”

“어, 어어….”

“헤헤.”

셰이가 헤프게 웃었다.

“저 둘, 꽤 친해졌어요.”

아니, 그니까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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