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6화 〉신중한 준비(3) (96/218)



〈 96화 〉신중한 준비(3)

쿵쿵쿵-

“정말로, 해할 생각은 없어요. 여신님께 맹세할 수도 있어요. 이야기만 할 생각이에요.”

아르는 패닉에 빠졌다.

‘어, 어떻게? 분명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믿지 말 것.

이건 오래된 습관이자 생존방침이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집까지 쫓아와서는 해할 생각이 없다고, 여신님께 맹세할 수 있다는 말을 지껄여봐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어려서부터 아버지께 수많은 이야기들, 그 중에서도 교단에게 피해를 입었던 이들은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우리 집을 습격해서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놈들도…!’

인적 없는 외딴 곳에 숨어 사는 것도 모자라 그런 집에서도 비밀 공간을 만들어둔 덕에, 습격을 미리 감지했던 아르의 아버지가 아르를 무사히 숨겨놓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혹여나 쓸데없는 복수심을 가질까봐 누구에게 당했다는 말은  했지만, 아르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 사후, 아버지를 습격한 이들을 끝내 추적해서 어떻게 생겼는지 눈에 담았으니까.

그래서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부딪쳐놓고 도망간 것을 따지러 왔다면, 화를 내러 왔다면 납득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폐가만도 못한 거처엔 비밀공간도, 비상탈출로도 없었다.

은신도, 도망도 불가능에 가뜩이나 지친 상태에서 무리하게 도망치느라  상태도 최악.

‘그렇다고 무력하게 죽기는 싫어.’

온몸을 떨던 아르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다. 가냘픈 가슴이 한 차례  차례 들락날락할 때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점점 더 싸늘해지고 날카로워졌다.

쿵쿵쿵-

“안에 계신  같은데… 열어주실  없어요? 정말 싫으시면, 문 너머로 이렇게 이야기라도 해주셔도 되는데.”

저 교단 성전사는  봐도 방심을 유도하는것이다. 선량한 척 대화하다가 문이 열리길 부탁하거나 수틀리면 문을 박살낼 것이다.

“하아… 어쩌지.”

아르는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이대로 저 교단 여자가 포기하고 돌아간다면 그거야말로 최선이었다. 비록 나중을위해 거처를 옮겨야겠으나, 싸우지 않는 게 어딘가.

‘돌아가. 제발. 돌아가줘…!’

아르는 단 한 번도 사람과 싸운 적이 없었다.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픈 건 싫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그냥 이대로 세일럼 밖으로 도망가고 싶었다.

“어쩔 수 없지…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찾아온  실례이긴 하니까.”

자박자박-

한숨 소리와 함께 발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게 들렸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갔다고? 문도 안 부수고? 정말로?’

진짜 간절히 바라서 이루어진 것일까?

발소리가 없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문에 귀를 대고 대기하던 아르는, 정말로 교단 여자가 사라졌다고 확신한 후에야 문을 열었다. 무섭긴 했지만 급하게 돌아오느라 당장 오늘저녁 먹을 것도 사오지 못했다. 집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배고파….’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지 피로감이랑 각종 통증이랑 허기가 한꺼번에 밀려와순간 휘청거렸다.

“아.”

재빨리 균형을 잡으려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지저분한 땅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뭐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넘어지다니, 어처구니없으면서도 눈을 꽉 감으며 다가올 고통에 대비했다.

“…아?”

“휴우, 이런 방법은 쓰고 싶진 않았지만… 유스티티아님, 용서해주실 거죠?”

하지만 아르가 부딪친 건 더러운 땅이 아니라 푹신한 누구의 피부였고, 순간 안도하기가 무섭게 위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기겁하며 뛰어오르려 했으나 이미 꽉 붙들려있었다.

“이, 이거 놔!”

“해치지 않아요?”

“교, 교단 사람이 거짓말을…!”

“제가요? 무슨 거짓말을 했는데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을 어쩌고 하면서 돌아갔잖아! 혹시나 해서 몇 십  넘게 기다리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실례인 거 같다고 말한 건 맞지만, 돌아가겠다는 말은  적 없는데요?”

“….”

아르는 자신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꽤나 멍청한 표정이지 않을까.

교단 사람인 주제에 그런 속임수를 썼다며 화를 내야 할까? 아니면 거지꼴인 자신을 이렇게 껴안아 더러워진 값비싼 드레스를 물어줘야 하냐고 발악을 해야 할까?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던 것처럼 자신도 죽일 거냐고 처음부터 물어봐야 하나?

아르는 바동거렸다. 하지만 셰이의 힘은 강했다. 거기에 아르는 잔뜩 지친 상태였고 이미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자세였다.

그녀의 최후의 저항은 일 분도 채 가지 못했다.

‘제대로 된 용사도 되지 못하고 여기서 끝인가… 아버지… 벌써 죽어서 죄송해요.’

아르는 차오르기 시작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눈에 힘을 빡 주었다.

“…기왕이면 깔끔하게 죽여.”

“네?”

“교단에 데려가지 말고, 그냥 여기서 죽이라고. 어차피 죽일 거, 이 정도도 못 들어주는 건 아니겠지.”

아르의 어조는 제법 비장했다. 몸은 가녀렸지만 차갑고 날카로운 기세, 그리고 도도한 얼굴까지 합쳐지자 비장미가 제법 더해진 것이다.

겉모습이 굉장히 꼬질꼬질하고 교단 여자에게 안겨있다는자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네? 죽이긴 왜 죽여요?”

“뭐?”

하지만교단 여자, 셰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채 여상히 반문했다.

“맹세했잖아요? 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좀 나누고 싶다고.”

“아니….”

아르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 이게 아닌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한테 들었던 교단 사람은 이러지 않아야 할 텐데?

“그, 그래! 여신에게 맹세할 수도 있다고 했지 진짜 맹세한 건 아니잖아!”

“아? 그랬나요? 뭐 그럼.”

왜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만면에 빛과 공정한 정의를. 유스티티아님. 제 품에 안겨있는 소녀를 해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요. 자, 보였죠? 잠시 반짝인 거? 유스티티아님께서 제 맹세를 받아주신 거예요.”

“진짜로, 맹세를?”

“네. 그러니까 정말로,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러는 거예요.뭐 때문에 절 두려워하는진 모르겠지만… 조금은 안심할 있겠어요?”

아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눈앞의 여자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교단 인간이 아닌 건가? 아니, 방금 전 맹세하던 모습은 누가 봐도 교단 사람이었는데.

아버지는 아르에게 영웅이자 진리였다. 아버지가 알려주신 게 틀릴 리가 없는데….

꾸우우우-

“아~ 시간이 이렇게 됐네. 많이 배고파요?”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배고픈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겠지!”

“그러네요. 많이 배고프긴 해요. 누구 때문에 몇 시간 동안 조용히 숨어있어야 해서.”

“그게  내 탓이야!”

“응? 당신 탓이라고 말한 적 없는데요?”

“이, 이이이!”

아르는 왠진 모르겠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교단 여자에게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말재주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는  이전의 문제였다.

“어디 보자… 아, 이런 곳에서 잠 자면 위험하지 않아요?”

“누구 멋대로 남의 집을!”

“방호도, 방음도, 방풍도 전혀 안 될 거 같은데요.”

셰이는 여전히 아르를품에 안은 채 아르의 집을 둘러보았다. 사실 둘러보고말고 할 것도 없었다. 집이라는 표현도 사실 엄청난 어폐일 정도의, 그 이전에 건축물로 인정해도 되나 싶을 정도의 공간이었으니까.

“이러지 말고 제가 머무는 곳에 가서 맛있는 밥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아, 그 전에 깨끗하게 씻고요. 비용은 제가 지불할 테니까.”

“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으음.”

셰이가 싱긋 웃었다.

“궁금해서요.”

“뭐…?”

“혀 조심해요?”

“그게 무, 아얏!”

거지 소녀를 안아든 고귀한 아가씨가 엄청난 속도로 빈민가를 빠져나갔다.

**

‘확실해. 로자리오가 계속 반응하고 있어.’

인적이 적은 곳을 골라가며 여관으로 귀환하고 있던 셰이는 품속에서 자꾸 꾸물거리는 소녀가 생각 이상으로 평범과 거리가 먼 존재라는 것을 느꼈다.

‘언니보다도 더 몸집이 작은데,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 보이는 걸 감안해도 무슨 힘이….’

겉으로 볼 땐 소녀가 편안히 안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셰이의 긴 장갑을 걷어보면 그녀의 전완근을 비롯한 팔 근육들이 굉장히 수축되어있다는 게 바로 눈에 띌 것이다. 헨드릭이 봤다면  근육 갈라진 거 개섹시하다면서 헉헉댔겠지만, 셰이는 과연 자신의 호기심 때문에 소녀를 동료들에게 데려가도 되는지 살짝 걱정이 되었다.

‘사악한 존재는 아닌 것 같은데, 계속 반응은 하고 있으니.’

수많은 교리들이 셰이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대체 뭘까?’

…말 그대로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사실 셰이는 교리 부분에서는 전혀 우등생이 아니었다. 그녀의 스승이었던 성전사장도 교리 공부보다는 몸의 단련을 2:98 정도로 중요시했으니.

어찌됐든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 선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셰이였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아,  안 했어요? 제가 머무르고 있는 곳까지 간다고 말했잖아요?”

“그니까 거기가 어딘데 이렇게 빙빙 돌아가는 거냐고!”

“불안해할 것 없어요. 대장님이랑 언니는 좋은 사람이니까요.”

“…뭐? 대장님? 언니?”

“꿈틀거리지말아요.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놔! 놓으라고!”

“괜찮아요.”

“이, 이건 납치야! 납치라고!”

“씻겨주고 먹여줄 건데요?”

“으아아으으읍!! 으읍! 읍!”

셰이에게 일행이 있다는 소릴 들은 아르의 몸부림이 심해졌다. 슬슬 여관에 가까워지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셰이는 언제나 그렇듯 미소를 띄우면서 자연스럽게 아르의 입을 가로막았다.

아르가 절박하게 몸을 흔들며 소리를 질러보려 했지만,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한 명 추가할 건데, 3은화면 될까요?”

이윽고 여관에 도착한 셰이는주인장에게 추가요금을 지불하곤 방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좀 늦었는데, 저녁은 어찌하시겠습니까?
- 셰이 오면 생각하자.

문 너머에서 헨드릭과 카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여관에 들어온 이후부터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린 아르의 눈동자가 격렬히 떨리고 있었다.

‘나, 나를 이런 좁은 곳에 가둬서….’

이 이상한 교단 여자가 자신을 해하지 않는다고 했지, 동료들이 해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지 않았나.

똑똑-

“대장님! 셰이에요!”

- 들어와.

 이상하고 힘도 센 교단 여자가 대장님이라고 부를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로 강력한 사람인 거지?

안 돼. 붙들려버려. 설령 지금은 진짜로 해하지 않는다고 해도, 본성이 조금이라도 드러내면 무조건 죽이려 들 거야…!

‘해하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고 했어.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계속 이렇게 안고 있진 않을 테니 언젠간 내려놓을 거야. 밖에서 봤을 때 적어도 2층 이상엔 창문이 존재했으니, 들어가자마자….’

아주 조금은 체력을 회복한 아르는 언제든지 뛰쳐나갈 각오를 다졌다.

“생각보다 조금 늦었… 셰이?  소녀는.”

“아, 언니. 제가 서쪽 빈민가에서… 악!”

아르는 있는 힘껏 셰이의 팔을 물고 창문을 향해 돌진했다.

“어딜.”

쿠웅-!

“아윽!”

그러나 아르의 탈출시도는 허무하게 가로막혔다. 셰이가 공격당하자마자 일어난 카야가 아르의 뒷머리를 낚아챈 다음 바닥에 내팽개쳐버렸으니까.

“으으….”

“셰이, 설명하십시오.”

아르를 내려다보는 카야의 얼굴은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그녀의 손엔 녹색 빛으로 물든 로자리오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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