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신중한 준비(1) (94/218)



〈 94화 〉신중한 준비(1)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하마터면 라엘라님의 품에 안길 뻔한 날 이후 하루가 지났다. 나는 숨이 막혀 의식을 잃었던 것 치고는 멀쩡히 회복했고 어제의 일도 그냥 내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덤덤히 받아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역으로 카야와 셰이가 엄청난 죄책감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특히나 셰이의 죄책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나를 질식사시킬 뻔했다는, 그것도 보지로 숨을  쉬게 해 죽일 뻔했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잠도 설치고 밥도  먹고 계속 날 향해 무릎 꿇고 있었다.  정도까진 아니었던 카야도 덩달아 셰이를 따라하고 있었고.

“죄송해요죄송해요죄송해요죄송해요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아이고야. 다른 의미로 머리가 아팠다.

공포스러웠던 모습이 없어진 건 다행이었지만, 이런 모습도 딱히 보기 좋은  아니었다.

“카야, 셰이.”

“죄송합니다. 대장님.”
“죄송해요죄송해요죄송해요.”

“정신 나갈 같으니까 그 죄송하다는 소린 이제 그만!!!”

히끅.

눈물콧물이 말라붙고 머리가 부스스했지만 여전히 예뻐 보이는 반칙 같은 그녀들의 아름다움에 잠시 감탄한 다음, 그녀들에게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이제 일어서.”

“….”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너무 과해. 이럼 서로 더 불편해져. 진짜 그러고 싶어? 계속 말도 안 하고, 팔짱 끼지도 않고 안지도 못하고 키스도 못하고….”

“아윽!”

황급히 일어나려던 카야와 셰이가 우당탕탕 소릴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너무 오랜 시간 무릎 꿇고 있었던 나머지 하체에 피가 안 통해 일시적 마비가  것이었다.

“어휴… 진짜 나나 너희나 무슨 꼴이냐 이게….”

“면목 없습니다….”

대장은 아무리 사연이 있다 해도 좆을 좆대로 놀렸다가 별의별 공포체험을 다하다 어처구니없게 질식사 당할 뻔하고, 동료들은 내게 벌을 준답시고 몰입하다가 흥분한 나머지 내가 셰이의 밑에 깔려 숨을 못 쉬고 있는 걸 파악 못 해가지고….

남들이 들으면 구라도 적당히 치라면서 코웃음 칠 정도의 촌극이었다.

“둘 다 이리 와서 누워. 다리 주물러줄게.”

“괘,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금방 낫습니다.”

“하나하나 명령하게 하지 말고. 미안해서 그러는 거니까.”

“….”

“어서.”

그렇게 오늘 오전은 그녀들의 다리를 주물러주고 거세게 꼬르륵거리는 배를 진정시키느라 순식간에 지나갔다. 던전도 아닌데 멘탈이 나가버린 그녀들을 돌보느라 하루 통째로 삭제된 건 덤이었다.

하루면 싸게 먹힌 건가?


**

[카야Kaya]
종족/성별 : 하프엘프여성
클래스 : 전투 수녀(Battle Vestal)
레벨 : 5
최대체력 : 17
공격력(2) : 8~14
방어력(1) : 7
속도 : 4(3+1)
기사회생/각성 : 12%
정찰확률 : 23%
긍정적 특징 : 기민한 몸놀림(속도+1)/냉철함(체력 50%이하 적에게 데미지+1)/공포를 극복한 자(모든 멘탈리티 하락속도 25% 감소)/굳건한 신념*(이름에 '공포'가 들어간 괴물을 대상으로 멘탈리티 저항 20%)
부정적 특징 : 어둠 공포증(밝기 50% 이하에서 멘탈리티 하락속도 25% 증가)/집착(특정 대상에게 통제 불가능한 행동을 함)/흔들리는 신념*(낮은 확률로 치유받기를 거부하거나 치유하기를 거부함)


[셰이Shae]
종족/성별: 인간 여성
클래스 : 성전사(Crusader)
레벨 : 5
최대체력 : 21
공격력(1) : 6~12
방어력(1) : 9
속도 : 4
기사회생/각성 : 14%
정찰확률 : 25%
긍정적 특징 : 천재(모든 수치+10%, 최소 1)/굳건함(방어력+1)/필사적임(확률적으로 사경 무시)/처단자(치명타 데미지 +10%)
부정적 특징 : 발작(낮은 확률로 멘탈리티 하락)/의존(멘탈리티 -50 미만일 때 속도-1)/가학성애(낮은 확률로 통제를 벗어나 공격함)

인던을 들어가기 전에 4레벨이었던 우린 전원 5레벨이 되어 있었다. 체감 난이도 치고는 그렇게까지 풍족한 경험치는 얻지 못했지만, 인던의 경험치 감소와 9레벨 치유 수녀의 존재로 어느 정도 까였을 걸 감안하면 레벨  한 것 자체를 감지덕지 받아들였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그렇듯, 특징이었다.

셰이의 보지 프레스를 당했을 때만큼이나, 골이 아파왔다.

“굳건한 신념과 흔들리는 신념이라니…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상반되는 특징이 붙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부지런함과 게으름 같은 게 동시에 붙을 수는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쪽이 밀려 지워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그런 상반되는 특징은 대부분 효과가 유사했다. 플러스 마이너스만 바뀌는 경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카야의 특징은 그렇지 않았다. 효과가 달랐다. 거기에 *표시가 붙어 있었다. 이건 특별한 특징, 혹은 절대 삭제되지 않는 고정 특징이라는 뜻이었다.

‘내  특징 방랑자에 *표시가 붙긴 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이세계 놈이라서 붙었을 확률이높은 거고….’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혼란스러웠다. 짐작이 아예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인던에서 있었던 일들이 큰 영향을 끼쳤던 거겠지.’

던전도아닌 지상의 숨겨진 공간에서 공포새끼가 버젓이 강림하려는 것도 그렇고,  많은 수의 성직자들이 타락하는 모습과 베스티아의 비극은… 성직자 입장에선 또 다른 느낌이겠지. 결국은 이겨내긴했지만, 찝찝함 정도는 남아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거기에 또 골치 아픈 건….

‘가학성애라니… 세상에. 셰이야, 널 어쩌면 좋아?’

아무래도 셰이는 눈을 떠서는  될 영역에 눈을 떠버린 게 아닐까. 처단자라는 좋은 특징도 함께 붙었지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세스티아스러운 특징은 안 붙어도 됐을 텐데.’

프로필에서 시선을 뗐다. 특징도 중요하긴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게  배는 더 중요했다.

“어디 보자… HAT 용사대?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형식상 확인 절차니 다시 한 번 상세히 확인하겠습니다. 한 분씩 직접 서류를 확인한 다음 서명해주시길 바랍니다.

현상금 사냥꾼 용사대장 헨드릭Bounty Hunter Hendrik

전투 수녀 용사 카야 에펜젤Battle Vestal Kaya Epentzel

성전사 용사 셰이  아우렐리에Paladin Shae de Aurelye

맞습니까?”

셰이  네임이저랬구나. 감추고 싶은 거 같아서 그동안 물어보지 않았었는데 의도치 않게 들어버렸다. 역시 셰이도 갑자기  네임이 튀어나오자 얼굴이 살짝 경직되긴 했으나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맞다는 뜻이리라.

‘막연히 기품 있는 외모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귀족 아가씨 출신이었잖아?’

이단 때문에 나락에 떨어진 귀족 아가씨. 풀 네임으로 출신을 알았을 뿐인데 그녀가 겪었을 스토리에 msg가  스푼 더 추가된 느낌이다. 궁금하긴 했지만 티 내진 않았다. 언젠가 스스로 말해줄 때가 오겠거니 했다.

“서명도 끝났고,전부 확인됐습니다. 자애와 관용의 여신 라엘라님의 교단, 세일럼 지부 관용의 길의 길잡이 세스티아님의 보증 아래 여러분 모두의 장비는 이곳에서 두 단계 올릴 수 있습니다.”

세스티아가 내민 보상, 그 첫 번째.

“여기, 여기 있습니다.”

“다소 일정이 밀려 있어서, 일주일 뒤에 찾아와서 이 증표를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바로 장비 업그레이드였다.

나는 장비지원소 직원이 내민 작은 종이쪼가리를 소중히 품에 간직했다. 일주일간은 무기와 갑옷 없이 지내야 하니 벌써부터 허전한 기분이 들었지만, 겨우 일주일이었다. 일주일이 아니라 이주일이라고 해도 얌전히 기다릴  있었다. 1구역 클리어 후 레벨 업했던 것처럼 또 한 번 스펙이  업그레이드 된다는 기대감에 절로 어깨춤이 나왔다.

‘흐흐, 이게  금화짜리냐!’

물론 우리가 가진 돈으로 업그레이드를 한 후에 세스티아의 보증을 이용해볼까 생각은 해봤지만, 직원이 ‘보증인의 보증은 지금 수준에서 두 단계’라고 못박았기 때문에 입맛을 다셨었다. 그래도 지금 것만 대충 계산해도 200금화어치는 되지 않을까.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라니 기대감은 더 커졌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카야랑 셰이도 들뜬 표정이었다.

“대장.”

“어?”

“장비는 이걸로 어느 정도 수준에 걸맞게 끌어올려질 것이고, 저희들 수준도 한 계단  올랐으며 용사대 자금도 조금은 더 넉넉해졌습니다. 이제, 네 번째 용사는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그러네요. 어떤 용사가 들어올지 궁금하긴 해요.”

 번째 용사.

장비지원소에서 나와 용사훈련소로 가던 길, 카야가 꺼낸 화두에 잠시 생각에 빠겼다.

인던에 들어가기 전에도 물색하긴 했지만, 쓸 만한 인재, 아니 대박 인재는 당연히 그렇게 쉽게 굴러다니지 않았다. 그뿐인가. 처음에 혼자여서 꼴리는 대로 카야를 영입했을 때는 몰라도, 이제 우리는  명이었다. 나머지  자리는 지금 우리 조합 때문에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최후방에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유틸성이 뛰어난 클래스였다.

카야와 셰이가 사실상 1‧2열에 고정되고, 나 또한 4열이 들어온다면 거의 3열에고정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4열에서 제 활약을 펼칠 수 있는 클래스는 dlc클래스 포함 16개 중  이하로 뚝 떨어졌다.

‘보물 사냥꾼, 석궁수, 저주술사, 치유 수녀, 음유시인.’

4열에서  포지션 급으로 활약할 수 있는 건 일단  5개가 있었고.

‘암살자.’

주 포지션급은 아니지만 어찌됐든 4열에서 활약할 수 있는 암살자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지금 우리 파티에 필요한 유틸성이 부족해서 기용할 일은 없을  같지만.

‘늑대인간, 던전상인, 강화인간.’

거기에 딱히 정보가 없는 탓에 일단은 후보에 들어간 dlc 추가 클래스까지. 이름만 봤을 땐 늑대인간이나 강화인간은 전열에 서는 게 어울리긴 하지만, 섣부른 추측은 금물이었다.

“어차피 장비를 되돌려 받기까지 일주일이란 시간이 있어. 충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짧은 시간도 아니라고 생각해.”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 용사대의 네 번째 용사잖아. 꼭 나만 영입해야 한다는 규칙 같은  없어. 너희들도 괜찮은 용사가 있다 싶으면 데려오는 거야.”

“저희도요?”

“그래! 아 이참에 아예 규칙을 만들자.  번째 용사는 우리 셋의 만장일치 찬성이 있을 때 용사대에 들어올 수 있는 걸로.”

“대장. 혹시 저희 말을 신경 쓰고 계시는 거라면.”

“아니, 진짜로  생각이야. 세일럼에서 용사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들 중, 진심으로 던전 공략 그 자체를 목표로 잡은 이가 몇이나 될 거 같아? 거의 없을 걸? 그래서 셰이 너도 나한테 합류하고 싶었던 거잖아.”

“맞아요. 그건 교단 출신 용사들도 마찬 가지예요. 던전을 ‘파악’하는 것에 그치고 있죠. 위험하니까. 그리고 던전 자체가 공략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애초에 세일럼이 비정상적인 번성을 이루는 건 순전히 던전에서 나오는 금화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동료들이 별종이었다. 누구 하나 후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입에 담았다고 해서 내 제약 때문에 최고난도 던전에서 그렇게 구르며 고생하고 후퇴하지도 못했겠지만, 하고 싶은  못한 거하고 처음부터 임전무퇴의 자세를 갖춘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그녀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무기를 놓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며 후퇴를 갈망하지 않았다.

왜?

이들은 금화가 제1목적이 아니었으니까. 둘의 원동력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이단을 깨부수고, 던전을 돌파하길 원했으니까.

나처럼.

“맞아. 그러니까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선, 적어도 우리 모두의 기준에서 합격선을 넘어야 한다는 거야.”

둘은 내 말에 공감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던 카야의 얼굴이 약간 시무룩해졌다. 남들이 보면 무슨 표정 변화가 있었나 싶었겠지만 동고동락했던 나랑 셰이는 바로 알아차렸다.

“언니, 갑자기  그래요?”

“그게….”

카야가 우물거렸다.

“저는… 두 분하고 세스티아님 말고 아는 사람이,  명도 없습니다….”

“하, 한 명도요? 단 한 명도?”

끄덕….

아….


젠장. 존나 공감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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