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진실게임(4)
“난… 나는.”
셰이가 제시한 마지막고비.
그 질문엔 연인이 아닌 다른 여자를 말도 없이 안았다는 질투심과 서운함을 비롯한 자신들의 감정이 담겨있었고, 자신들에 대한 대우와 내 근본적인 목표 및 각오 양쪽 모두를 묻고 있었다.
‘당장 멀리 안 가서 세스티아를 어떻게든 영입하고 싶어한다면? 그리고 카야랑 셰이가 그걸 반대한다면?’
셰이의 말마따나 가정해보자. 세스티아나 세스티아급의 용사가 용사대에 들어오면 어두컴컴한 앞길이 어느 정도 밝아지리라는 건 명백한 사실. 하지만 그걸 다른 두 사람이 반대를 한다면….
‘하나를 얻기 위해 둘, 아니 그 이상을 잃는 거겠지.’
카야나 셰이나 성격은 다르지만 적어도 내겐 순종적이었다. 내가 비이성적인 명령을 내린 적이 없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녀들이 날 존중해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지금까지 고생한 그녀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면… 지금껏 고생한 게 퇴색되지 않겠나.
무엇보다, 그녀들이 무턱대고 반대할 위인도 아니었다. 단순히 싫다고 반대를 외치는 인물도 아니었다. 반대를 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녀들이 날 믿듯, 나도 그녀들을 믿으니까.
들어올지 말지 결정 안 된 외부인보다, 이미 함께 고생을 한 내부인인 그녀들의 말이 더 중요하니까.
그렇다고 내가 그녀들의 의견을 무작정 따르겠다, 그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말이라면 별 의심 없이 따르던 그녀들이 굳이 나서서 한목소리로 반대를 표할 정도면, 내가 영입하고 싶어하는 용사가 어딘가 하자가 있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맞지 않나,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쪽에 가까웠다.
그래도.
“일단 너희들에게 설득을 시도하겠지. 내가 놓치면후회할 정도의 용사라면, 셰이 너 정도 되는 용사라는 건데. 아쉬워서라도 곧장 포기하지는못할 거 같아. 내가 왜 이용사를 욕심내고 있고, 우리 용사대의 전력을 어떤 식으로 증강시킬 수 있으며, 기존의 우리와 어떤 식으로 호흡을 맞출 수 있고 그래서 종합적으로 기대하는 바는 어떻다… 그러니 나는 꼭 영입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 말이지. 하지만 너희들이 내 설득을 듣고도 여전히 반대한다면….”
일단 설득을 해볼 것이다. 그래도 안 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인물을 찾아야지. 아쉽긴 하지만 세상에 뛰어난 용사가 한 명만 있는 것도 아니고, 너희와 갈등을 일으키면서까지 고집할 정도도 아니거든.”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 손도 여신상을 꼭 붙들고 있었다. 이 이상 질문이 계속된다면, 정말로 영혼이 빠져나갈 거 같았다. 얌전히 판결을 기다렸다. 판사님, 전 이제 더 변론할 게 없습니다….
숨 막히는 연쇄질문마들의 질문이 끊겼다. 침묵이 흘렀다. 끝났나? 아니면, 뜸 들이기인가? 대체 어떤 공격을 준비하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만약 뜸 들이기라면 다음은 카야 차례였다. 힐끔 카야 쪽을 쳐다봤다.
‘…어?’
카야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원체 작은 탓에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귀는 아니었다. 살짝 뾰족한 그녀의 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토마토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붉어져 있었고.
그리고 셰이는….
“내가, 놓치면 후회할 정도의 용사… 헷, 놓치면 후회할 정도의 용사… 놓치면 후회할 정도의 용사….”
나한테 들릴 정도로 대놓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회초리를 손바닥에 탁탁 부딪칠 때의 소름끼쳤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뭐, 뭐지. 몰칸가?’
갑자기 이렇게 180도 바뀌어도 무서운데. 도대체 어느 쪽이 진짜 태도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금 반응만 보면 일단 대답을 잘 한 거 같긴 한데, 괜히 나섰다가 급정색하면 안 좋은 의미에서 치명타 데미지를 받을 거 같았다. 그래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묘한 분위기의 침묵은 금방 끝이 났다.
“후우우….”
“하아아….”
둘이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나서는 내 팔을 하나씩 잡고 일으켰다.
“카야? 셰이?”
“아무래도… 여기서는 더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네요.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다음 장소? 다음이라니 대체.”
“쉿. 대장님은 얌전히 따라오세요.”
“자, 잠깐! 굳이 또 이걸 쓸 필요가…!”
“쉬이잇. 대장님… 뭐든지, 저희들이 하라는대로 다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고작 눈 좀 가리고 손목 좀 묶을 뿐이잖아요?”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만이라도!”
“그걸 알려줄 거면 눈은 왜 가릴까요, 대장님.”
그건 그랬다.
“자. 이제 대장님은 제 등에 업힐 거예요.”
“뭐? 업히라고?”
“그대로 가도 되긴 하는데 오래 걸리니까요. 게다가 겉모습만 보면 중죄인을 어디론가 호송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그건 좀 그렇잖아요? 그치만 업히면 환자를 업고 가는 것처럼 보일 테니 괜찮을 거예요. 겉에 피도 좀 묻히고요. 자. 힘 빼고 편안히 서 계세요. 업기 편하게. 언니. 부탁해요?”
“걱정 마십시오. 금방 따라가겠습니다.”
“….”
할 말을 잃은 나는 그녀 말대로 온 몸에 힘을 뺐다. 곧 셰이의 탄탄한 등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대로 갖고 놀아.’
유/진 엔딩만 아니라면, 언젠간 볕들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을 놓기로 했다.
아 셰이 냄새 좋다.
**
헨드릭을 업은 셰이가 어디론가 사라진 사이, 카야는 일행의 짐을 챙기고 떠나겠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수녀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목소리에 안에 들어간 카야는 서류더미에 파묻혀 한숨을 내쉬고 있는 세스티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카야 자매님, 왔나요?”
“예, 세스티아 자매님. 몸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이만 떠나려 합니다.”
“으응, 굳이 그렇게까지 허겁지겁 나갈 필요는 없는데 말이죠….”
카야는 묵묵히 서있었다. 이미 답이 확정되어 있음을 깨달은 세스티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카야 자매님.”
“예.”
“원망, 하시나요?”
“….”
“제가 이런 말 할 자격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헨드릭님을 너무 원망하지 말아주세요. 원망하려거든, 저를 원망해주세요. 안 된다는 걸 억지로 붙든 제 잘못이니까요.”
“그 말대로, 대장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세스티아 자매님.”
“…그러네요. 괜한 참견이었어요. 미안해요.”
세스티아가 엄숙히 고개를 숙였다. 카야의 말대로였다. 자신은 임시 대원에 불과했고, 사건이 끝난지금은 그마저도 아닌 외부인에 불과했다. 아무리 같은 교단의 자매라고 해도, 자신이 상급자라고 해도 괜한 참견을 한 셈이었다.
그런 걸 떠나서, 오로지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젊고 귀엽고 훌륭한 후배들의 마음을 상처입혔다. 카야, 셰이. 미안해요. 그리고 라엘라시여, 부디 제게 냉철한 관용을.
“그와는 별개로 감사했습니다. 세스티아 자매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거라는 걸 잘 압니다. 그래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받아넘긴 카야는, 아주 살짝 밑을 바라보던 시선을 끌어올려 세스티아의 눈과 마주쳤다.
“전, 라엘라님을 믿고 따르는 전투 수녀이기 이전에 한 남자를 진심으로 섬기는 여자입니다. 이 점을 깊이 유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념할게요.”
“그럼,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세스티아는 카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라엘라님을 믿고 따르는 전투 수녀이기 이전에라… 헨드릭님은 정말 여러 의미에서대단한 남자네요.”
부럽기도 하고요.
그녀는 눈앞에 쌓인 서류들을 보다 잠시 밀어내 엎드렸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쉬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책임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으니까.
**
셰이의 목덜미 냄새를 맡으며 아무 생각 없이 매달려있던 나는 어느 순간 족쇄에서 해방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왜 늦게 깨달았냐면, 넋 놓고 있어서기도 했지만 검은 천이 없는데도 주위가 엄청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거의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여관?’
아주 희미하게나마 침대의 윤곽이 보였다. 묘하게 익숙한 게, 우리가 묵었던 여관의 침대처럼 보였다.
“카야? 셰이?”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침대의 윤곽을 기준 삼아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대체….’
시간이 좀 흐르고 긴장감과 망상으로 인한 셀프 공포심이 줄어들었다. 이쯤 되니 대체 얘네들이 무슨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나 싶었다.
‘이런 걸로 분이 풀린다면 백 번이고 하겠지만, 그래도 영문을 좀 알고 싶은데….’
이렇게 된 거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일단 쉬기로 했다. 어제 밤새 기 빨린 것도 있고, 오늘 정신이 빨린 것도 있어서 그런지 벌써부터 자고 싶었다. 주춤주춤 걸어 다시 침대를 찾았다. 수도원 침대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쓸 만한 침대에 엉덩이를 내린 순간.
물컹-
“앙!”
“헉!”
일반적인 침대 감촉과는 전혀 다른, 물컹한 감촉과 함께 이상한 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튀어올랐으나 한 쌍의 억센 무언가가 날 붙잡아 끌어당겼다.
“뭐야! 뭐야!! 아악! 셰, 셰이야? 카야야? 너희 대체 왜 이런… 아, 안 돼!”
날 붙잡는 억센 무언가는 두 쌍으로 늘었다. 한 쌍은 날 꽁꽁 억매고 있었고, 다른 한 쌍은 내 옷을 거칠게 벗겼다. 거의 찢어버릴 기세였다. 그리고….
철컥-
‘철컥?’
옷이 다 벗겨진 것 때문에 온몸에서 느껴지는 물컹함이 몇 배는 생생하게 느껴져 곤란하던 참에, 뭔가 들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소리가 귀에 포착됐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내 망상이 망상이 아니게 되어버린 건가? 그, 차마 살 떨리는 행위를 수도원에서 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고?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무인 고해소에서 마지막에 카야랑 셰이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고!’
필사적으로 부정해봤지만, 정작 나온 말은 내가 들어도 굉장히 절박하고 비굴했다. 존나 힘으로,억지로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그녀들이 여자라서 물리적인 힘을 발휘하기 힘든, 그런 이유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카야랑 셰이는 그냥 힘이 존나 센 여자들이었다. 각각도 센데 둘이 양쪽에서 단단히 구속하니 꼼짝도 하지 못했고, 불안한 철컥 소리는 계속됐다.
“에, 에이. 카야? 셰이? 차라리 그 뭐냐. 각방을 쓰라면 쓸게!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을게! 응? 정말이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 그, 그래! 여신님께 맹세도 할게! 앞으로 이런 일 다시는 없을 거라고!”
철컥- 철컥-
“아 미, 미안하다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아. 적어도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알려줘야…!”
철커덕- 철컥-!
양쪽 손목이강제로 당겨졌다. 그리고 손목에 무언가 차가운 게 채워졌다. 상반신에 머물던 물컹거림이 하반신 쪽으로 내려갔다. 오싹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팔에 힘을 줬다. 챠르륵- 무언가 쓸리는 소리와 함께 팽팽히 당겨지는 게 느껴졌다.
‘설마, 진짜로?’
스스로 볼 순 없지만, 아마 난 지금 알파벳 Y를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내 꼴을 상상하고 있는 사이 양쪽 발목에서도 똑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혹시나 발을 당겨보았지만 손목과 똑같았다.
이제는 Y자가 아니라… 大자에 가까웠다.
‘씨발, 소설 속에서나 보던 걸 실제로 겪게 될 줄이야…!’
그땐 참 낄낄거리며 흥미진진하게 봤었는데, 당사자가 되니 공포 그 자체였다.
“카야. 셰이. 이, 이건 좋지 않아. 이건 분명 서로에게 깊은 앙금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내 말을 가차 없이 끊었고, 어두웠던 방이 촛불을 킨 정도의 수준으로 밝아졌다.
“…카야? 셰이?”
“조, 조용히 하세요!”
난, 진심으로.
눈앞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