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진실게임(2)
“대장. 일어나십시오. 보기 안 좋습니다.”
“제, 제발 재고해줘. 다른건 다 되지만 그건….”
“대장. 아직 우리의 이야기가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방해가 될 뿐입니다. 나가주십시오. 아니, 차라리 저희가 나가겠습니다.”
“아, 아냐! 아냐아냐. 내가 잘못했는데 너희들을 귀찮게 할 순 없지. 나, 나갈게. 내가 나갈게. 어.”
오체투지하고 있던 헨드릭이 후다닥 일어났다. 문 쪽으로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뒤쪽으로 고갤 돌려 간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야와 셰이는 나가려면 빨리 나가라는 듯 일말의 동정도 관심도 표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털썩 고개를 숙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가셨습니까.”
“네. 갔어요.”
“후우우….”
헨드릭의 기척까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둘은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맨 처음 그에게 쉬었던 한숨과는 느낌이 달랐다.
“생각 이상으로 우리의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시는 걸 기뻐해야할지 난감해야할지 헷갈립니다.”
“으음, 그만큼 우릴 신경 쓰시는 거라고해야겠죠? 솔직히 말해서, 대장님이랑 세스티아님 두 분이 입 꾹 다물고 있었으면 우리가 알아차릴 방법은 없었을 텐데… 굳이 먼저 와서 용서를 구하는 건 그만큼 우리한테 죄책감이 들었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는 거 아닐까요? 우릴 소중히 여겨서? 게다가….”
셰이가 다시 한 번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적어도 저는 세스티아님을 배척할 명분이 약하니까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셰이. 우린 그날 동시에 대장의 여자가 된겁니다.”
“언니의 묵시적인 허락과 양보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은 안 됐겠죠. 그건 맞잖아요?”
“….”
“뭐, 세스티아님과의 일은 지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순간적인 관계인 거 같아요. 세스티아님이 용사대에 들어오시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정황상 들어오실 수 없으실 거 같거든요.”
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교단의 수녀였고, 교단이 돌아가는 시스템과 현 사건에서 세일럼 지부의 수녀장이라는 자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용사대에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한동안은.
“그걸 떠나서, 아쉽긴 합니다. 그분의 기도는 여러모로 대단했으니….”
“그건 맞아요. 하지만, 이런 말하는 건 그분을 뒤에서 헐뜯는 거 같아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분이 용사대에 정식으로 들어오시면, 지금의 평화가 깨질 것 같거든요. 무슨 느낌인지 알죠?”
카야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다 살짝 강한 끄덕임이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것 같지만.
“셰이.”
“네?”
“어쩌면, 우린 전초전을 치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전초전이요?”
“세 번째, 대장님까지 포함하면 용사대에 네 번째 용사가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세스티아님이 임시로 합류했던 것처럼.”
“아.”
“세스티아님은 임시였지만, 언제가 됐든 정식으로 합류하는 인물이 생길 겁니다. 던전의 더 깊은 곳으로 향하기 위해선 세 명은 부족한 감이 있으니까. 이번에도 절실히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치만, 네 번째 용사가 꼭 여자라는 법은 없잖아요?”
“셰이. 셰이는 저보다 빨리 눈치 채놓고, 여기서는 눈치 채지 못한 겁니까?”
“네?”
카야는 찻잔을 집어들다가 비었다는 걸 알고는 한숨을 쉬며 내려놓았다. 셰이가 잽싸게 차를 따라주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한 카야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대장이 최우선입니다.”
“저도요.”
“그런데 네 번째 용사로 남자가 들어온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던전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용사대 내부에 그 어떤 불협화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건, 셰이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야 불리한 상황에 몰렸을 때, 공포에 잠식될 때 바로 박살나지 않고 오래 버틸 수 있잖아요.”
“그러니 우린 네 번째 용사와도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대장이 아닌 다른 남자와. 아무리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해도, 좁고 어둡고 사방이 적인 공간에서 생사를 함께하는 친한 남녀 동료… 대장과 우리 사이도 그렇게 급격히 가까워졌지 않습니까.”
“그거야 대장이니까.”
“우리야 확실히 구분한다지만, 대장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겠습니까? 불안할 겁니다. 극도로 불안할 겁니다. 특히나 방금 전 대장이 보여준 반응을 생각하면.”
“….”
호로록-
“그래서 우리 둘도 한 번에 받아들인 겁니다. 둘 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불안해하고 싶지 않아서. 용사대를 깨고 싶지 않아서.”
“으음.”
“대장은 이성적이고 냉철한 것 같으면서도 감정적이고 여린 마음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용사대를 이끄는 대장이라는 책임감이 대장의 이성적인 면을 지탱하고 있지만, 만일 그 부분이 조금이라도 무너진다면… 그 부분이 무너진 대장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껏 알고 지내던 대장이 아닐지도모릅니다.”
“그래서, 네 번째 용사도 필연적으로 여자가 될 것이다… 이 말이네요?”
“대장은 의도한 바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분명 여자를 데려올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러면 결국… 그 여자랑도, 잘 지내야 한다는, 그런 말이잖아요.”
“예. 대장의 운명을 위해서. 제 운명과 셰이의 숙원을 위해서.”
따각-
다시 빈 찻잔을 내려놓은 카야가 셰이의 양손을 잡았다.
“물론 네 번째 용사가 대장을 사적으로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하지만 저도 그렇고 셰이도 그렇고… 대장은 함께 있으면 반하지 않는 게 힘든 남자입니다.”
“그건 그래요. 잘생겼고 자상하고 따뜻하고 책임감도 있고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그, 그것도 기분 좋고….”
“흐흠!”
헨드릭이 들었으면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다가 어깨를 으쓱였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 그녀들은 곧, 그의 면전에서 쏟아냈던 섬뜩한 계획과는 다른 계획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
‘역시 소설은 소설일 뿐이었어.’
나는 아예 건물 밖으로 피신했다. 수많은 하렘 소설 속 주인공들과 그들을 그려낸 작가들을 씹어댔다.
마냥 순종적이고 하렘에큰 거부감 없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물론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지만! 잘못을 한 건 나지만!
내가 밖으로 나간 사이 얼마나 더 끔찍한 말들이 오고갔을지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던 나는 명확한 사리분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신님. 여신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방황하며 걷다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라엘라님 여신상이었다. 무심코 올려다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딱 봐도 자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얼굴과 그보다 더 자애로운 몸매를 보유하신 여신님께서는 한 손엔 로자리오를, 다른 한 손엔 무지막지한 철퇴를 들고 계셨다.
전적으로 내 기분 탓이겠지만, 여신님께서 당장이라도 저 철퇴로 내 머리를 빠개버릴 것만 같았다.
‘여신님. 아니, 장모님!’
신벌은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단순한 여신상이 움직여 내 머리를 빠개는 일도 없었다. 나는 미쳐버린 것일까. 그 당연한 사실에 위안을 얻고는 나만의 고해성사를 하기 시작했다.
‘뭔 말을 해도 변명인 건 알지만, 그래도 어젯밤의 세스티아는 도저히 내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라엘라님께서도 지켜보셨다면 어느 정도는 납득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당연히 제가 잘했다는 건아닌데….’
생각을 그만뒀다. 생각을 이어갈수록 전형적인 쓰레기변명으로 귀결되는걸 느꼈다. 라엘라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스스로 죄를 뉘우치게 만드셨다. 역시 여신님.
게다가, 딸 중 한 명이랑 연인 사이인데 또 다른 딸과 몸을 섞었으니 싸다귀 맞아도 할 말이 없는데, 관용을 베풀어주고 계셨다.
‘라엘라님.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 헌금을 더 내면 될까요? 아, 돈으로 어영부영 넘기려는 게 아닙니다! 라엘라님은 제 진심을 아시잖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 꼴이 웃겼다. 나는 지금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겨가며 미친 공포무새들로부터 세일럼을 지켜냈다는 위대한 업적을 세운 용사대 HAT의 대장이었다. 그런 내가, 관음증변태새끼의 공포도 끝내 저항한 내가!
날 사랑하는 여자들에게서 공포를 느끼며 발발 떨고 있었으니!
‘가만. 날 가둔다는 말을 처음에 꺼낸거, 카야였지.’
허겁지겁 그녀의 프로필과 관계도를 체크했다. 부정적 특징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집착’과,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나고 있는 ‘카야 : 5’라는 관계도의 조합을 보니 한 가지로 귀결됐다.
‘이거, 소설 속에서만 보던… 얀데레라는 거냐?’
히끅.
무표정인 채 철퇴를 들어올리는 카야의 모습을 떠올렸다. 실제로도 잠식상태에서 나랑 세스티아가 붙어있던 모습을 철퇴를 든 채 뚫어지게 쳐다본 전적이 있으니, 상상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얼굴을 뭉개버리면, 다른 여자는 더 이상 접근하지 않을 것 같은데… 대장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 저는 괜찮습니다. 대장이 어떤 모습이여도, 제게 대장은 여전히 멋지고 제일 소중한 남자니까. 대장을 향한 사랑은변함이 없고, 절 향한 대장의 사랑도 변함이 없으면 대장의 얼굴 정도는 뭉개져도 상관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게 잘못했다며, 모든 걸 달게 받아들이겠다 선언한 대장은 대답만 하면 됩니다. 예, 아니면 응으로.’
흐끅.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카야가 저런 말을 한 적도 없고, 할 리도 없지만 그냥 그렇게 상상해버렸다. 한 번펼쳐진 상상의 나래는 멈출 줄을 몰랐다.
‘언니.이참에 아예 지져버려서 흉터를 새기는 건 어떨까요?’
‘흉터?’
‘네. 목 주변에 저희 이름을 새기는 거예요. 인두로 말이죠.’
‘으음, 아무리 그래도 인두질은 노예한테나… 아. 셰이. 미안합니다.’
‘으음? 아니에요. 뭐 어쨌든 대장님에게만 새기는 건 불공평하니까, 제 목에도 새길 생각이에요. 대장님 목 왼쪽에제 이름을, 오른쪽에 언니 이름 새기고 저희 목에 대장님 이름을 새기면 공평하잖아요?’
‘음, 더 말해보십시오.’
‘그 누가 봐도 서로가 서로의 것이라는 걸 강렬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저희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을 새길 공간 자체를 막아버리는 거예요.’
‘또 다른 여자를 들일 거면, 목 말고 얼굴 전체를 희생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경고입니까.’
‘바로 그거예요! 동시에 허튼짓하면, 우리 목에 다른 남자 이름을 새겨버릴 수 있다는 경고도 되는 거죠! 지금 당장 얼굴을 뭉개버리는 것도 좋지만, 괴물 잡는데 지장이 생기잖아요. 밥 먹는데도 불편할 거구요.’
‘셰이, 당신은 천잽니다. 지금당장 화로와 인두를….’
‘헤헤, 제가 가져올게요! 언니는 계속 감시해주세요.’
“안 돼… 안 돼!!!”
“어디 가셨나 했더니… 여기 계셨습니까.”
“으아악!!!”
공포가 심은 환상에도 저항했던 내 정신력은, 스스로 만들어낸 조악한 상상력에 무릎 꿇기 직전이었다.딱히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나 생생하고 현실감 넘치는 상상을 할 줄은… 아니 상상이 맞나? 진짠 거 아냐?
“유진!”
“허억!”
이 세상에서 나를 제외하면 단 한 명만이 알고 있는 이름에 정신이 바짝 들자마자 살짝 차가운 두 손이 내 뺨을 강하게 잡고 끌어당겼다. 회색 눈동자가 날 직시하고 있었다.
“유진. 대답하세요. 유진.”
“어, 어어.”
“따라오세요.”
“어?”
“어서요.”
카야는 내 손목을 잡고 어딘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