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진실게임(1)
“아이고….”
눈을 떴다. 온몸이다른 의미로 쑤시고 뻐근했다. 하지만 몸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그리고 혼자였다.
“세스티아?”
그러고 보니 여긴 세스티아의 방이 아니라 내 방이었다. 당연히 침대보와 이불도 깨끗했다. 욱신거리는 몸이 아니었다면, 서랍 위에 놓인 쪽지 한 장이 아니었다면 어젯밤의 일은 꿈이라고 치부했을지도 몰랐다.
「품에 꼭 안겨있는 것도 좋았지만, 떨어지는 건 무척 아쉬웠지만 그건 어젯밤까지니까요. 헨드릭님이 이 쪽지를 볼 때쯤이면 카야 자매님이랑 셰이 성전사님도 깨어 있지 않을까요?」
쪽지는 세스티아의 정갈한 글씨체로 가득했다. 그 와중에 먼저 깨어나서 내 몸도 닦아주고 내 방으로 옮겨주고 쪽지까지 썼을 그녀를 생각하니, 참 대단한 여자다싶었다. 거기에 식었지만 부드러운 빵과 물까지. 때마침 꼬르륵 울리는 뱃소리에 나는 허겁지겁 빵을 찢어먹었다. 그녀의 드넓은 가슴만큼이나 넓은 배려심에 감사했다.
‘옆방으로 가보자.’
과연 9레벨은 9레벨인지, 나한테 그렇게 당해놓고 나보다먼저 일어나서 이렇게까지 한 걸 보면 세스티아는 아마 지금쯤이면 뒤처리를 시작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나와 잊을 수 없는 하룻밤을 보냈다고 해도, 자식도 잃은 처지에 벌써부터 수녀장으로서의 책임을 도맡아야 하는 그녀가 걱정됐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그녀를 도와줄 것도 딱히 없어.’
인던은 컴플리트 클리어 됐고,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동료가 아니었다. 다시 만나면 전처럼 존대를 해야겠지. 특별한 용무가 있지 않는 이상, 이곳에 더 머무르는 건 민폐가 될 것이다.
똑똑-
- 누구십니까.
- 대장님 아니에요?
“그래. 나야.”
- 들어오세요!
카야와 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톤이 밝은 걸 보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당히 회복된 것 같았다. 반가움에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들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빈 그릇이 보이는 걸 보니 나처럼 빵 같은 걸 먹었던 것 같다.
“대장님!”
셰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달려…오지는 못하고 엉거주춤 다가와 답싹 안겼다. 꼭 낑낑대는 대형견 같아서 하하 웃음이 나왔다. 반가움을 적극적으로 표시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
“진짜 큰일 날 줄 알았는데… 무사해서 다행이다. 둘 다.”
“대장님도요!”
나랑 셰이를 바라보며 부러운 듯 바라보던 카야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그녀는 은근슬쩍 팔을 뻗어 내 허리에 두르며 내 가슴팍에 볼을 비볐다. 이번엔 실실 웃음이 나왔다. 셰이가 대형견 같았다면 카야는 고양이 같았다. 뭔 소리냐면, 어찌됐든 귀여웠다는 말이지. 그렇게 왼팔엔 셰이, 오른팔엔 카야를 품고 잠시간 양손의 꽃을 음미했다. 아무도 불구가 되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대단한 정신력이었고, 위대한 분투였다. 그리고 여신님께도 감사드렸다.
“카야, 셰이. 너희들에게 말할 게 있어.”
가장 중요한 그녀들의 무사를 확인했으니 세스티아와의 일을 얘기할 차례였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그녀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런 건 최대한 빨리 꺼내서 해결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난 사실 어제 새벽에 처음으로 깼고, 밤에 한 번 더 깼어.”
“네? 대장님 회복력이 그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내가 너희들보다는 덜 다쳐서 그런 걸 수도 있지. 내가 조금 다쳤다는 건 아니지만 너흰 진짜 심각했거든. 세스티아가 제일 심각하긴 했지만, 우리보다 수준이 훨씬 높아서 그런지 회복력이 남다르더라.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고.”
맨정신에 연인들에게 외도를 고하려니 죽을 맛이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탔다. 세스티아의 과거사를 들었을 때와는 다른 의미에서 숨이 턱 막혔다.
“무슨 중대한 말씀이기에 그러십니까?”
“저희에게 못할 말이었으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도 않으셨을 텐데… 좀 껄끄러운 얘기예요?”
“쓰읍. 그러니까.”
셰이는 벌써 조금이나마 눈치를 챈 거 같았다. 어젯밤엔 다시 한 번 쓰레기가 되겠다고, 이들에게 모든 걸 말하고 사죄를 청하겠다고 다짐했건만 막상 그때가 다가오니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회피할 수는 없지.’
눈 딱 감고, 그녀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장?”
“대장님?”
“미안. 일단 정말 미안하다는 말부터 박고 시작할게.”
사과를 할 때는 명확한 사과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표현하는 게 핵심이라 생각했다. 어설픈 자기 변명이나 남탓 시전을 내포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사과가 되겠지.
“어젯밤, 너희들이 곤히 자고 있을 때… 세스티아를 안았어.”
“…예?”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은 카야와 팔짱을 낀 채 무표정으로 날 쳐다보는 셰이. 침을 꼴깍 삼키며 하나둘씩 어젯밤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풀었다. 베스티아와의 관계는 적당히 각색하고 세스티아의 과거 이야기는 묻었다.
“변명하려는 건 아냐. 당당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무슨 이유에서 그랬고, 왜 사죄를 청하는지 말하고 싶었어. 이미 저질러놓고 뒤늦게 사죄를 청하는 거 자체가, 너희에게 상처가 됐겠지만….”
“대장.”
“용서하고 말고는 너희들 권한이라 내가 더 할 말은 이것 밖에 없네… 미안. 정말 미안해.”
할 수 있는 말은 다 털어놨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는 없었다. 털어놨다고 해서 마음의 무게가가벼워지지 않았다. 털어놓은 만큼, 새로운 죄책감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숨 막힐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하고 반가움을 표시했던 훈훈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 장본인인 내가 할 생각은 아니지만, 힐끗 본 카야와 셰이의 무표정은 존나 무서웠다.
‘쌍방이라면, 1:9만 돼도 어떻게 입을 털 수 있을 텐데… 빼박 내가 쓰레기짓 한 거라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침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삼켰다. 어떤 판결이 내려지든 곱게 수용할 생각이었고, 그 전까지는 쥐 죽은 듯이 대기하려 했다.
“후우우….”
“하아아….”
카야와 셰이의 깊은 한숨이 동시에 터져나왔다.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대장.”
“예!”
“만에 하나라도 없을 일이지만, 제가 라엘라님의 길을따라 걷는 수녀로서 실의에 빠진 대장이 아닌 남자 동료에게 몸으로 위로해준다고 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아주 평온한 어조로, NTR 당하면 어떨 거 같냐는 카야의 훅 들어오는 첫 질문에 어질어질했다.
어떨 거 같냐고? 상상해봤다.
제4의동료가 남자가 들어왔는데, 그놈이 세스티아와 비슷한 사연이 있었고 그걸 우연히 들은 카야와 어쩌다보니 그렇고 그런 관계가….
‘씨발!!!’
더 이상 상상할 수 없었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미 세스티아를 안은 내가 무슨 자격이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상상만으로도 좆같았다. 내게 내로남불의 DNA가 박혀있을 줄은 몰랐다.
“그, 그야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분노, 할 거 같아.”
“그렇습니까.”
카야의 어조는 평탄했다. 너무나 평탄해서 오히려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예측이 안 갔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럼, 지금 저는 어떨 거 같습니까?”
“….”
꿀 먹은 벙어리는 나였다. 차라리 꿀이라도 먹고 싶었다. 존나 할 말이 없었다. 있을 턱이 있나.
“대장은 제게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스티아 자매님도 좋으신 분이고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두 분의 그렇고 그런 사적인 관계까지 제게 좋은 건 아닙니다.”
“그, 그렇지.”
“대장의 말을 듣고도 대장을 향한 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분명 분합니다. 분하긴 하지만, 대장이라서. 대장에게 분노를 토하기보단, 대장이라면 합당한 이유로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그렇다고 세스티아 자매님께 분노를 표하기도 애매합니다. 그분이 안 계셨다면 저희는 이단에게 큰일을 당했을 것이고, 여기서 치유를 포함한 각종 편의를 제공 받은 것도 그 분 덕이기 때문입니다.”
“그….”
“저는, 이런 상황에서 분노를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분노를 제공한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장.”
카야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을 푹푹 찔렀다.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너무 일차원적인사고방식이었다. 그녀가 좋아할 것 같지도 않았다. 머리가 핑핑 돌아가야 하는데 삐걱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그나마 그녀의 기분이 나아질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한 명의 여자가 더 있었다.
“저도 기본적으로 카야 언니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화나요. 엄청. 대장님이 우리에게 공개하지 않은 정보 속에 진짜 사정이 숨어있으리라는 것도 화나구요.”
“…미안.”
역시나, 셰이는 내가 일부분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바로 간파해냈다. 하기야 내각색 수준이 어설프긴 했다. 세스티아의 과거를 아예 빼버리고 베스티아가 그녀의 딸이라는 걸 다른 방식으로 숨겼으니, 내가 그녀를 안은 이유가 상당히 부실해졌다.
‘이유가 충실해도 정당화된다는 건 아니지만.’
셰이가 빈 찻잔을 검지로 팅팅 두들겼다. 그 와중에 두들기는 소리가 메트로놈처럼 정확한 게 소름이었다.
“장소도 장소고 몸상태도 완전하지 않으니 일단은 보류하려고요.”
“보류?”
보류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며 반응했지만….
“지금, 제가 말하고 있잖아요?”
“미, 미안.”
돌아온 건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한 셰이의 모습이었다.
“대장님을 부려먹을 거예요. 제 분이 풀릴 때까지. 대장님을 괴롭힐 거예요. 제 분이 풀릴 때까지. 대장님을 멀리할 거예요. 제 분이 풀릴 때까지.”
띵- 띵- 띵띵띵띵-
찻잔 메트로놈이 점점 빨라졌다.
“대장을 여관방에 가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저나 셰이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날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 의견이에요, 언니. 대장님은 너무 뛰어나고 좋은 남자라서, 또어떤 여자가 달라붙을지 모르니까요. 아예 방도 따로 잡는 건 어때요?”
“숙박비가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감시는 격일제로 하는 걸로?”
“그러네요. 홀수일에는 언니가, 짝수일에는 제가 하면 되겠어요.”
실시간으로 헨드릭 감금 계획이 내 눈앞에서 대놓고 수립되고 있었다.그녀들의 표정과 어조는 정말 진지했다. 농담 함유 0%였다.
“아. 이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뭔데요 언니?”
“사랑과 번성의 여신님을 모시는 수도원에, 남성의 성욕을 조절하는 능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능력을 대장에게 사용하고, 조절 권한을 우리가 갖는다면….”
“와. 용케 떠올렸네요? 세일럼에 없는 교단이라 떠올리기 힘들었을 텐데!”
뭐, 뭐요? 이게 무슨 소리요?
신성력적 (선택적)거세?
내 몸은 내 통제를 벗어나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씨, 씨발. 다 감당할 거라 다짐하긴 했지만, 이,이건 좀!’
세스티아를 새로운 연인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는 말은 지금 상황에서 오히려 역효과를 부르겠지.
그녀들은 웃는 얼굴로 내 입장에서 점점 더 섬뜩해지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나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만약 저게 멘탈리티 공격이었다면, 내 멘탈리티는 이미 –100을 뚫고 또 한 번 –100을 찍어버릴 기세였다.
쿠웅-!
“너희들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계속 빌고 또 빌 테니까 제발 그 성욕 조절이라는 것만큼은!”
인생 첫 오체투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