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흉터(1)
‘낯선… 천장은 아니네.’
눈을 떴다. 온몸이 삐걱거리고 무거웠다. 그래서 눈만 굴려 주변을 파악했는데 여관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보기만 해도 마음이 깨끗해지는 하얀색과 편안해지는 녹색으로 꾸며진 곳이었다.
몇 번 들른 적 있던 라엘라 교단 세일럼 지부였다.
‘피해가… 어마어마하겠지.’
안전하면서도 이미 알고 있는 장소에 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보스를 쓰러뜨리고 난 후의 기억이 물밀듯이 떠올랐다. 가루가 되어 사라진 베스티아를 확인하고 기력이 다해 주저앉은 이후, 우리만큼은 아니었지만 다들 만신창이 상태였던 타 교단 전투단들한테 발견돼서 세일럼까지 옮겨졌었다. 씨발 대체 뭐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이 지랄 할 때까지 코빼기도 안 비췄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일단 그 땐 그럴 힘이 없기도 했고… 그들도 사상자가 꽤나 많이 발생했다고 하니 할 말이 딱히 없었다. 중앙 구역까지 돌파하는 것도 골치였는데, 회개를 위해서 힘들게 제압해놓은 수녀들과 사제들이 갑자기 폭주하질 않나 막상 중앙 구역에 돌입했는데 깜깜한 곳에서 어쩌고저쩌고….
대답할 힘도 없어서 그냥 눈만 깜빡거리다 세일럼 귀환 중에 의식을 잃었던 것 같다.
‘카야. 셰이. 세스티아.’
몸도 깨끗하고 겉으로 보이는 상처도 대부분 아문 걸 보니 케어를 받은 건 확실했다. 몸상태를 체크하고 나자 동료들이 걱정됐다.
“어우 씨발….”
몸을 일으키려 손에 살짝 힘을 줬을 뿐인데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사경에 들락날락했을 때보단 참을 만했다.
이불을 걷고 침대를 벗어나는데 자그마치 2분이 걸렸다. 품이 넓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정작 하의는 입고 있지 않아서 꼭 치마를 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치마고 아니고 떠나서 와, 진짜 이보다 더 심한 몸상태로 어떻게 싸웠대.’
포경수술한 환자가 지금 나처럼 걷는 거 같던데… 예전에 인터넷에서 우연히 봤던 동영상을 떠올리며, 존나 과거의 나 자신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우여곡절 끝에 방문을 나섰다. 복도는 아무도 없었고 조용했다. 평소에 아늑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는데 오늘은 서늘했다.
수녀들의 빈자리를 실감하며 옆방의 문을 노크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문은 저항 없이 열렸다.
“….”
옆방엔 세스티아가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괜히 잘못 들어온 거 같아 바로 나가려던 나는 그녀가 임시긴 했지만 동료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의 기도, 그리고 희생이 아니었다면… 비록 당초에 생각했던 편-안한 리무진 기사는 아니었지만, 심각한 위험요소들이산재하는 비포장 도로를 무사히 돌파한 역전의 버스기사였던 것이다.
숭고함.
창백한 세스티아에게선 숭고함이 느껴졌다.
‘아무리 세일럼 내라고 해도 그렇지, 부상당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이렇게 프리하게 둬도 되나.’
덕분에 문 좀 열겠다고 쇼를 안 하는 건 좋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누가 나쁜 마음 먹고 들어와서 살짝 목만 졸라도 큰일 날 수 있지 않나. 교단 전체와 척을 지려는 자살희망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럴 일이 없긴 하지만….
부드럽고 풍성한 그녀의 연갈색 머리를 살살 쓸어넘겼다. 이렇게 보면 정말 과장 안 하고 20대 중후반 같은데, 가만 보면 카야도 그렇고 셰이도 그렇고 하나같이 다 어려보였다.
‘셰이는 진짜 어린 거 같기도 하고. 카야는 모르겠네.’
겉으로 볼 땐 마음이 드넓고 한없이 자애로운 순수한 아가씨 같은데, 속에는 엄청 끈적하고 음란한 요부가 숨어있는 수녀장 누님.
그녀가 세웠던 업적과, 내가 그녀에게 했던 언행들이 교차되자 쥐구멍에 숨고 싶어졌다.
- 그 천박하고 음탕한 젖탱이, 나중에 얼마든지 만져줄 테니까. 닥치고 보호의 요새나 쓰라고 이 창년아!
- 영원한 안식이나 준비해, 이 씹변태년아.
“내가 미쳤지….”
상황이 상황이기도 했고, 또 그걸 좋다고 받아준 세스티아도 문제가 있었지만… 에이, 어쨌든 그녀는 까먹었으면 좋겠는데.
민망함과 미안함을 반반 담아 계속해서 쓰다듬어주었다. 부드럽고 풍성하고 길어서 쓰다듬는 맛이 있었다. 그렇게 묘하게 힐링을 받고 있었는데 쓰다듬는 각도가 틀어졌다.
“천박하고 음탕한 젖탱이 만져주러 오셨어요?”
“헉!”
세스티아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목소리는 살짝 갈라지고 힘이 없었지만, 일단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는 것 자체가 아주기쁜 일이었다.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말이 굉장히 충격적이었지만, 어쨌든!
“어, 언제 깬 거야.”
“헨드릭님이 들어오시고 난 다음부터요?”
“…전혀 몰랐는데.”
“혹시나 천박하고 음탕한 젖탱이 만져주실 줄 알고 가만히 있었어요.”
“으아아아아.”
그러지 마! 제발! 내가 느낀 숭고함을 돌려줘! 소리 없이 몸부림치자 그녀가 킥킥 웃었다.
“농담을 그렇게 진담처럼 얘기하는 재주가 있네.”
“반반이에요?”
“제발.”
“후후. 그럼 계속해주세요.”
“뭘?”
“머리요.”
“어어….”
“안 그럼 계속 조를 거예요. 천박하고 음탕….”
“아, 알았어!”
그녀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만족스럽다는 듯 한숨을 쉬는 게 정말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 점은 다행이었다.
“세스티아.”
“네.”
“고마워.”
그녀는 미소로 대답했다.
“네 재치가 아니었다면 어두웠던 수수께끼 장소도 훨씬 늦게 벗어났을 거고, 네 치유가 아니었다면 우린 더 많은 피를 흘렸을 거고, 네 기도가 아니었다면 타락한 자들을 무찌를 수 없었겠지. 그리고 한계를 뛰어넘는 네 숭고한 희생정신이 없었다면… 나는, 내 손으로, 카야를… 죽였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아요. 결국 극복하셨잖아요?”
“널 공격했잖아. 네게 도끼를 휘둘렀잖아.”
“저는 카야 자매님이 아니니까요. 막상 카야 자매님에겐 도끼를 끝까지 휘두르진 못했을 거예요. 아마도?”
“아마도라니… 그럼, 왜 끼어든 건데?”
“너무 집요하게 물어보시면 매력 없어요? 아. 이미 두 분이나 계시니 상관없으려나? 후훗.”
그래. 물어 뭣하겠어. 추궁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난 진짜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영원한 안식 쓰고 나서 기절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가로막은 거야?”
“완전히 기절한 건 순간이었던 거 같아요. 의식이 있었어도 몸을 움직이긴 힘들었지만… 굳이 콕 찝어서 말씀드리자면 책임감일까요.”
“책임감?”
“네. 제가 동행을 부탁드렸잖아요. 여러분들에겐 다소 무리한 부탁이었잖아요?그래서… 제가 데려온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렇게 비극적으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차있었던 거 같아요. 저절로몸이 움직이더라구요.”
“….”
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다. 갑자기 목에 뭐가 낀 거 같고 시야가 살짝 흐려졌다.
젠장.
황급히 거짓 재채기를 하며 고갤 돌렸다. 도저히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다. 요란하게 재채기를 하며 겨우 감정을 수습하고 세스티아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사람한테 피학성애자, 색정적임, 요부 특성이 몰려있는 거지. 이건 사기였다.
“크흠. 큼. 그 뭐냐. 세스티아는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앞으로? 글쎄요… 일단 한동안은 바쁘겠죠. 이번 일에 대해 총본산에 보고도 해야 하고, 혹시 모르니 그 장소에 대한 후속 조사도 해야 하고, 갑자기 사라진 수녀들로 인해 발생한 공백들도 메워야 하고…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네요.”
“허, 벌써 머리가 아픈데.”
“그러니까요. 가슴이 막 욱신거릴 정도예요.”
그러면서 세스티아는 대놓고 한쪽 가슴, 그것도 옆가슴 쪽을 살살 주물렀다. 내가 전투 중에 후려친 곳이었다.
‘이 누님, 생각보다 장난꾸러기네.’
자기 딴엔 분위기도 가볍게 할 겸 날 또 놀려먹으려고 그러는 거 같은데, 그녀의 몸뚱이가 워낙 음란하다보니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부드럽게 이지러지는 멜론이라니, 침이 잔뜩 고이기 전에 재빨리 삼켜 없앴다.
“세스티아, 네가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든든했어. 물론 마지막에 가서 엄청 위험하긴 했지만, 그런 엄청난 예외가 아니었다면 분명 수월하게 격파하고 귀환했겠지.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으음,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일단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로.”
“저도요. 헨드릭님.”
“그리고 네가 무슨 대답을 할지는 예상이 가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경청할게요.”
“용사대, 들어올 생각 있어? 임시가 아닌 정식으로.”
세스티아의 눈이 마구 깜빡였다. 포근한 연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러다 자기 머리 위에 얹어져있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아.
예상은 했지만, 아쉬웠다.
“헨드릭님에게 그런 제안을 들을 수 있어서 무척이나 영광이에요. 형식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여기 지부의 수녀장으로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어요. 저는 책임을 져야만 하는 자리에 있으니까요.”
“이해해.”
“얼마나 걸릴지 확신할 수 없는데 덥석 받아들이면 이도저도 아니게 되고 양쪽에 피해를 끼치게 되겠죠. 이미 휘하의 수녀들을 상당수 잃어버린 크나큰 실책을 저지른 몸인데,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예상했던 터였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 욕심만을 고집할 수 없었다. 교단들에게 큰 빚을 지웠고, 세스티아라는 걸출한 치유 수녀와 연을 맺었다는 것에서 만족해야만 할 거 같았다.
“그리고 HAT에게 줘야할 보상까지 마련하려면, 더더욱 바쁘겠죠?”
“그건 기대되네.”
“기대하셔도 좋아요. 최우선적으로 마련해보일 테니까요.”
보상… 그래. 그게 있었지. 9레벨 치유수녀이자 지부의 수녀장인 세스티아가 장담할 정도면, 정말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스티아와의 대화는 즐거웠지만, 카야와 셰이도 보고 싶었다.
“카야 자매님이랑 셰이 성전사님은 옆옆방, 그러니까 헨드릭님 방 기준 왼쪽 방에 함께 있어요.”
“유용한 정보 고마워. 근데 세스티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혹시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
“안 돼요.”
“그, 그래.”
즉답이었다. 세스티아는 누운 채 팔짱을 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가슴이 도드라졌다.
“그래도… 헨드릭님보단 많을 거예요. 마, 많긴 많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많지는… 아, 않을 거예요. 아, 아마도….”
“미, 미안. 말 안 해도 돼. 푹 쉬고 나중에 또.”
“헨드릭님.”
“어?”
세스티아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약속을 지켜주신다면… 못 알려줄 것도 없어요.”
“뭐? 약속?”
그녀는 팔짱을 풀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뭐지.’
세스티아의 축객령에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카야와 셰이의 방으로 향했다.
**
“그런 표정으로 영입제안이라니, 너무한 거 아닌가요.”
헨드릭이 나간 후, 이불을 가슴 밑으로 끌어내린 세스티아가 한숨을 쉬었다.
“라엘라님. 다 내려놓고 그 남자 따라가면, 혼내실 거죠?”
경애하는 여신으로부터의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들리는 거 같았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늙고 천박한 몸뚱이 하나가지곤 그 남자랑 용사대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될 테니까요. 게다가 이미 제3자가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관계를 구축한 여자가 둘이나 있으니… 저 같은 여자가 껴봐야 끝내 파탄날 거 같잖아요. 다른 여자라면 모르겠지만, 하필 그 여자들이 카야 자매님이랑 셰이 성전사님이라서… 피해주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오른쪽 가슴과 음부에 손을 뻗었다. 이내 스스로 자극을 가하기 시작했다.
“라엘라님, 라엘라님… 어리석고 음란한 딸을 용서해주세요. 그래도 그때의, 그 느낌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이내 그녀의 야릇한 신음소리와 음란하기 짝이 없는 찌꺽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