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17)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이, 이대로 가다간 다 죽고 말 거야. 다 먹히고 말 거야. 육체는 갈리고 영혼은 저당잡힐 거야.
그, 그래. 지금이라도 도망을… 못 치잖아? 말도 안 돼! 이런 게 어디 있어!
아 맞다.카야랑 셰이랑 세스티아는 어쩌지? 이대로… 다 죽는 거야? 진짜로? 아니야. 말도 안 돼. 진짜 말도 안 돼. 카야랑 셰이랑 얼마나 강한데. 세스티아는 말할 것도 없고. 말도 안 되잖아 진짜로.
아아.
그런가.
내게 있어 진정한 공포는, 지금 이 상황이구나. 한 방 먹었네. 그 한 방이 정말 치명적이고,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게 너무아프지만.
[체력]
셰이 12/20
카야 6/16
유진 9/17
세스티아 3/24
[멘탈리티]
셰이(무기력) : -96
카야(집착) : -88
유진(혼란) : -75
세스티아(무절제) : -89
습관이란 무서웠다. 죽을 거 같은데, 다 죽을 거 같아서 두려운데도 용사대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내 모습이 무서웠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전투를 계속한다는 의지 자체가 부질없게 느껴졌다.
봐라.
세스티아는 육체적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고, 그 외에도 누가 정신이 붕괴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보스들 공격을 쳐맞았을 때 이미 깨달았으면서, 굳이 정확한 수치까지 확인해 지금 느끼고 있는 절망감을 더 키울 필요는 없었는데….
잠깐.
왜.
뭔가를 확인 안 한 거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적군이고 아군이고 모든 공격을 받아내 완전히 걸레짝이 된 세스티아와 그녀 덕분에 겉모습만은 그나마 멀쩡한 카야와 셰이. 그리고….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다섯 걸음 바깥에서 무릎 꿇은 채 이쪽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사죄를 청하고 있는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의 모습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보는 사람이 다 서글퍼질 정도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게, 정말로 슬퍼서 우는 거 같았다. 그녀의 죄책감 충만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정말로,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거 같았다. 진심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거 같았다.
근데.
왜 이렇게 가증스럽지.
“씨발년아.”
“….”
욕을 안 뱉을 수가 없었다.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안 참았다. 존나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필터링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렇게 저질러놓고 미안할 거였으면 그냥 차라리 혀 깨물고 뒤지지 그랬냐. 어? 씨발, 자기목숨 존나 소중하지.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는데… 씨발 이런 상황에서 존나 눈물 흘리면서 미안하다고만 지껄이는 건 능욕 아니냐?”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 의지가 아니였어요!!!”
“그래. 존나게 진심으로 미안했으면 내 의도는 아니었어요 이딴 말이 바로 튀어나오지도 않았겠지. 덕분에 잘 알았어. 씨발 네년을 위해서 죽어서라도 회개한뒤 스스로 영혼을 불살라버린 형제자매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 거네? 하긴, 그러니까 자신을 딸처럼 키워준 스승이자 자매이자 상관에게도 거리낌 없이 공격을 퍼부은 거겠지. 아주 씨발년이야.”
“아니야!!!”
“그래? 정말 아냐?”
“정말 아니야… 난, 난 노력했어! 끝까지 저항했어!!!”
“자살해 그럼. 씨발 뒤에서 역겨운 표정 짓고 있는 저 좆같은 새끼 쳐죽이고 너도 혀 깨물고 뒤져버리라고 씨발년아. 그럼 인정해줄게. 고이 기억해줄게. 비록 믿음을저버리긴 했으나 끝까지 저항하다 순교한 수녀로 말이야.”
베스티아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내 독설에 상처받아서 그러는 건 아닌 거 같고… 그녀 말대로 ‘저항’중이라서 그런 거 같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진심으로 사죄를 청하던 얼굴이 피 한 방울도 안 흘릴 것 같은 무표정으로 변해있었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굴라고.”
“[분노를 통해 일시적으로 공포를 일부분 밀어낸 것인가. 딱히 특별하지도 않은 전형적인 현상이군.]”
“그런가봐. 아까만 해도 뭘 하는 거 자체가 무서워서 존나 다 포기하고 싶었는데, 씨발년이 우리보고 질질 짜면서 사과하는 모습 때문에 빡친 이후로 말도 잘 나오고 머리도 잘 돌아가네. 고맙다고 해야 되나? 이런 식으로라도 너새끼가 말하던 공포를 잊게 해줬으니 말이야.”
[남은 체력 26/248]
그제서야 나는 내가 확인하지 못했던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차마 저항한다는 생각 자체가 안 드는 놈(공포)을 직시하는 것.
그래서 남은 체력을 확인했고, 생각보다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너는 특이한 존재다. 일시적으로라도 공포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하지만 네 동료들까지 가능할지는 의문이군.]”
“하.”
확실히, 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특히 세스티아는 어떻게 그랬는진 몰라도 기절 중에 깨어나 카야를 보호하기까지 했고, 셰이의 멘탈리티는 –96이었다. 카야도 비슷했고.
‘아까 저 역겨운 가면놈의 광역기가 쏟아졌었지. 그렇다면 지금은 카야 턴이네.’
하지만 놈은 틀렸다.
내 동료들이 극복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너무나 쉬운 문제라서, 직접 대답할 가치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옮겼다. 위아래로작게 들썩거리는 세스티아의 몸을 옮겨주었다. 그러자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카야와 셰이의 모습이 보였다.
세스티아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동료들의 ‘저항’을 지켜봤다. 1구역 보스 공포의 손을 상대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그들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이해했고, 그들과의 관계가 깊어져서 그런 것일까. 그들이 겪었던 공포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자신보다 셰이를 부축하려 하는 카야의 경우에는 아마 내가 저번에 환상에서 봤던 것처럼 개새끼들한테 정절의 위험을 겪었을 것 같았다. 거기선 이름 모를 수녀가 등장하고 어영부영 끝이 났지만… 아마 방금 전에는 그녀를 지켜주던 수녀가 험한 꼴을 당했을 것이다. 카야 대신에.
시궁창에서 꺼내준 인물이 험한 꼴을 당한다? 그래서 라엘라 교단의 전투 수녀가 되고, 용사가 되어 나와 연인이 되는 미래가 송두리째 박살난다?
카야에겐 그것만한 공포가 없을 것이다. 아마 그녀를 괴롭히던 개새끼들의 위협은 실제로는 셰이의 눈먼 클레이모어였을 거고, 이름 모를 수녀는 세스티아였겠지.
그리고 카야에게 부축 받으면서도 베스티아 쪽을 힐끗 노려보는 셰이는 아마… 이단에게 괴롭힘 받았을 때를 다시 겪었을 것이다. 어떻게 탈출하고 어떻게 유스티티아 교단의 성전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복수를 꿈꾸지 않았을까. 복수의 칼을 맞은 게 실제로 세스티아였다는 게 문제지만.
어찌됐든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질투, 동경, 어색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역전의 용사였다. 생사를 여러번 함께 넘은 소중한 동료였다. 한 남자와 한 대장을 동시에 따르는 비슷한 처지의 여자였으며, 수녀장의 위대한 분투와 희생에 감명 받은 성직자였다.
혼자여서 모든 게 외롭고 두려웠던 이 둘은.
지금.
함께였다.
“다시 한 번 말해봐 공포포기무새관음증변태새끼야.”
카야가 철퇴를 집었다. 셰이가 클레이모어를 집었다.
“내 동료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카야가 철퇴를 들어올리지는 못했다. 그건 셰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셰이가 클레이모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카야에게 달라붙었다. 그녀의 팔을 밑에서 받쳐 올렸다. 그 힘은 미약했지만, 카야 혼자서는 못 들었던 철퇴가 서서히 바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사람 자체가 무서워 방구석에 쳐박힌 다음 게임만 폐인처럼 했던 나 따위보다 훨씬 대단한 여자들인데… 몇 번이고 넘어질지언정, 극복 못 할리가 없잖아. 씹새끼야.”
철퇴가 카야의 어깨에 얹어졌다. 셰이는 모든 힘을 소진한 듯, 풀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다시 기절하진 않았다. 카야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야는 철퇴를 양손으로 쥐었다. 철퇴머리를 오른쪽에 얹은 채 양손으로 겨우 지탱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어색했고 위태롭게 보였다. 베스티아의 껍질을 쓴 공포새끼가 지껄였다. 자신을 향해 철퇴가 가까워지고있는데도 아주 평온했다. 죽어도 자기가 죽는 게 아니라 이거겠지. 하여간 좆같은 새끼였다.
“[분노에 이어 의존인가. 흥미롭군.]”
“그 얼굴로, 그 목소리로… 더 이상, 베스티아를 능멸하지 마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사라져.”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카야가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에게 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8/248]
철퇴에는 힘이 담겨있지 않았다. 휘두른다기보단 휘둘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하지만 카야는 결코 철퇴를 놓치진 않았고, 어떻게든 유효타를 먹였다.
[세스티아가 턴을 넘깁니다.]
[세스티아가 상태이상 ‘기절’에서 벗어납니다.]
기절 중이던 세스티아의 턴이 그냥 넘어갔다. 기절하지 않았어도 뭘 시키기는 불가능했을 것 같았기에, 아쉬운 마음이 들진 않았다. 세스티아는 이미 1인분, 아니 3인분 이상을 해주었다.
이제 셰이의 턴이었다. 그녀는 아까 전부터 주저앉은 자세로 굳어져있었다. 하지만 그때 터덜터덜 돌아온 카야가 이번엔 셰이를 일으켜주었다. 조금 전과는 반대였다. 카야가 셰이의 등 뒤로 이동해 팔을 받쳐주었다. 자신의 철퇴를 버리고 셰이의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검신이 긴 클레이모어가 바닥에 긁혔지만, 셰이도 들어 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한 몸이 된 둘은 절뚝절뚝 앞으로 나아갔다. 그 모습을보니 클레이모어를 휘두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지.’
정신이 붕괴하기 직전인 셰이는 어쩌면 그저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클레이모어를 놓치고 주저앉아 턴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설령 그런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셰이를 탓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직접 잠식 상태를 겪어보니 더 그랬다. 지금의 셰이는, 정말 걸어가면서 죽어있고 죽은 채 걸어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니.
어느 순간 카야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는 게 불가능해보였다. 세스티아는 말할 것도 없고, 셰이 또한 100퍼센트에 가까운 확률로 이번 턴이 마지막이겠지.
셰이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중간중간 익숙한 어구가 들리는 걸 보니 기도문 같았다. 하지만 전처럼 은색 광채가 나오진 않았다.
“끝내는, 내 의지로….”
셰이는 최후의 힘을 끌어모아 클레이모어를 투척했다.
[정의의 심판]
[셰이가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에게 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2/248]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심판에 저항합니다.]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 상태이상 ‘기절’에 저항합니다.]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에게 심판의 낙인이 새겨집니다.]
[낙인은 3턴간 유지됩니다.]
조용했다.
우리 중 온전히 서 있는 건 나뿐이었다. 가면놈은 이제 나도 부질없는 공격을 한 차례 찍 싸고 쓰러질 거라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고, 베스티아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속도가 빠른 게 좋긴 좋아? 이렇게 한 번 더 기회가 오니 말이야.’
손에 힘을 주었다.
남은 체력 12.
지금 내 데미지 기댓값이 4~15였으니 치명타가 터지지 않아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체력이었다.
“아까 말한 적 있긴 한데, 한 번만 더 제대로 말해야겠어.”
이 공격이 좋은 의미에서 마지막 공격이 되길 바라며, 도끼를 치켜들었다.
“대가리 딱 대 새끼야!!!”
[대가리 분쇄]
콰드드득--
뼈와 근육을 가르는 불쾌하면서도 확실한 감각이 느껴진 순간.
[유진이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에게 1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이, 이, 이게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분명 공포에 집어삼켜졌을 터인데 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
[남은 체력 –1/248]
“감사, 해요….”
“이럴 순 없어!!! 어떻게, 어떻게 준비한, 대계, 를…!”
[체력을 공유했던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와 공포의 대제사장 핀들리에가 동시에 죽음을맞이합니다.]
베스티아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가면놈은 눈물을 흘리며 발악하다 최후를 맞이했다.
그들의 시체는 핏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좆같은 새끼가, 뒤질 때까지 좆같이 시끄럽네….”
[인스턴트 던전 를 컴플리트 클리어했습니다.]
조용히 눈을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