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15)
“라엘라시여.”
기도에 전념하는 세스티아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위험한순간에서도 내 손길에 흥분하며 애액과 신음을 흘려대던 씹마조변태 요부에서 교단의 지부를 이끄는 신실하고 고결한 수녀장이자 최고위 치유수녀로 바뀐 것이다.
어느 쪽이 본 모습일까.
자신의 음란한 본성을 이겨내며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몰랐던 본성이 여기서 터진 것일까.
지금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본모습이 어느 쪽인가하는 문제는 정말 사소한 것이었다.
“창칼을 내미는 적이든 재물을 훔쳐가는 도적이든 잘못된 길에 빠져버린 모든 사람들이.”
세스티아에게 모이는 영롱한 녹색 광채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군의 체력이 좀 빠진데다가 바로 다음 턴에 시작부터 3턴 동안비활성화 되어있던 또 하나의 보스가 깨어난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보호의 요새 쪽이 정답일 수 있었겠다고.
“다시금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는 조금의 가능성을 파악하고, 포용하고 다시금 벗어나지 못하게 보살피는 것. 그것이 당신께서 어리석은 저희들에게 내리신길일지니.”
하지만 세스티아가 말한 ‘최고의 보호는 적의 제거다.’에 동의했다. 특히나 오래 버티는 게 말이 안 될 정도로 힘든 지금 난이도에서는 더더욱.
한 턴 정도는 어찌어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이 두 턴, 세 턴으로 이어지면 세스티아의 치유로도 감당 안 되는구멍이 반드시 한 곳은 뚫릴터였다.
지금이 아니면, 필살기로 아껴둔 그녀의 영원한 안식을 영영 쓸 타이밍이 안 나올 것 같았다.
우린 지금 4잠식 상태라는걸, 잊어서는 안 됐다.
“Clemens benignitas et….(따스한 자애와…)”
유리하면 안전하게, 불리하면 과감하게.
“inexorabilis gratia!(냉철한 관용을!)”
순간 세스티아의 등 뒤로 한 쌍의 날개가 달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라엘라님한테는 굉장히 죄송한 말이지만, 지금 세스티아는 그야말로 꼭 숭고한 사명을 띠고 지상에 강림한 여신 같았다.
“이건, 발악치곤 꽤나 위험한 것 같…!”
가면놈이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곧 세스티아에게서 뿜어져 나온 녹색 빛과 베스티아를 둘러싼 암적색 기류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아-!!!
때 아닌 줄다리기, 아니 밀어내기가 시작됐다. 예전에 테스트 겸 공포의 수녀에게 사용하라고 했을 땐 한순간에 수녀가 녹색 빛 맞고 절규하고 끝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여기서 밀려나면 바로 절벽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성스럽고 섬뜩한 두 빛이 치열하게 서로를 갉아먹고 밀어내고 있었다.
“성녀!!! ---- --님의 강림을 코앞에서 망칠 셈이냐! 버텨라!!!”
아아아아아아아----!!
“라엘라시여어리석은딸에게결코꺾이지않는믿음을 주시옵고결코끊기지않는길을끝까지걸어갈수있게인도해주시옵소서또한다시한번간절히바라오니….”
두 빛이 충돌한 여파일까, 가면놈이 한 손으로 금이 간 가면을 붙잡고 베스티아에게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고 베스티아는 허공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반면 세스티아는 땀을 뻘뻘 흘리며 속사포로 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맨 처음 기도를 올릴 때만 해도 흥분 때문에 붉은 기운이 돌던 그녀의 피부가 완전히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녹색 빛이 점점 밀리고 있었다.
“젠장… 세스티아! 조금만, 조금만 더!”
5:5로 시작됐던 팽팽한 경합은 어느새 3:7로 밀리고있는 상황. 가면놈도, 그리고 우리도 개입할 수 없는 예상 밖의 싸움이었기에 도와주고 싶어도 뭘 어떻게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섣불리 뭘 하려고 했다가 한 순간에 대치가 깨져버릴 것 같아서, 세스티아에게 후유증 이상의 큰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세스티아가 만약 잠식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제 와서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지금의 대치는 숨이 막힐 정도로치열했고 동시에 안타까웠다. 이 한 방에 용사대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건 피아 모두가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세스티아도 저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것이리라.
“결코 꺾이지 않는 믿음을!”
“결코 끊기지 않는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의지를!”
어느새 정신을 차린 셰이를 데려온 카야가 세스티아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셰이와 함께 세스티아를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타락하여 탈선해버린 옛 자매를 당신의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으로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게 힘을 내려주시옵소서. 당신의 딸들이 간절히 바라옵니다.”
“모든 곳에 빛이 있나니, 삿된 목적과 수단으로 세상을 어둡게 하려는 적들에게 징벌의 빛을! 수많은 무고한 이들을 괴롭히고 끝내 생명까지 앗아간 적들에게 공정한 정의의 심판을!”
그들의 기도는 같고 또 달랐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같았다. 우리에겐 힘을, 저들에겐 심판을.
실제로 그들의 기도가 어떤 효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메시지 같은 건 뜨지 않았다.
하지만….
“뭐하는 거냐, 성녀!!! 그만한생명력, 그만한 힘을 받아들이고도 저딴 허접한 힘에 밀린다고?!”
카야와 셰이의 합류이후 3대 7까지 밀렸던 대치가 다시 5대 5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도 모자라 6대 4로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가면놈은 제 가면이 깨져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반절만 흉측한 기괴한 얼굴을 일그린 채 마구 화를내고 있었다. 명백히 여유를 잃은 모습이었다.
‘제깟 놈이 화를 내봤자지.’
조금 전보다 아주 약간은 여유가 생긴 나는 가면놈의 행동을 살필 수 있었다. 저놈도 애가 타서 미치고 팔짝 뛰는 것이다.
6대 4는 7대 3이 되고, 곧 8대 2가되었다. 대치점이 베스티아 쪽에 가까워질수록, 암적색 기류가 마구 요동치고 흔들리는 게 심해졌다. 거기에 꿈틀거리는 정도였던 베스티아의 움직임은 이제 발악하는 수준이었다.
“성녀! 밀리면 끝이다! 네년도! 네년이 그렇게 아끼던 년의 영혼도!”
아아아아아---!!!
가면놈의 발악에도 대치점이 마침내 8대 2 지점을 돌파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러나 그녀들의 기도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또 느려지고 있었다. 세스티아의 몸에서 피어나던 녹색 광채가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거의 다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심신이 한계에 달한 것이었다.
“안 돼… 세스티아! 카야! 셰이!”
라엘라님!유스티티아님! 이왕 힘을 빌려주셨으면 끝까지 힘 좀 써주시지, 왜이렇게 안달나게 하십니까? 예? 혹시 기부금이 적어서 그러시는 겁니까? 아 거참,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카야랑 셰이도 더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꼬박꼬박 여신님들께 기도도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당신 딸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말아주십시오!!!
교리 같은 건 몰랐다. 기도문도 몰랐다. 그냥 간절히 바랐다. 빌었다. 혹여나 저들이 올리는 기도에 불순물이 섞일까 저어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라엘라님! 유스티티아님! 불쌍히 타락한 저 수녀에게 안식을 내려주십시오!”
여신님… 아니, 장모님들!!!
나중에 신벌이 내릴지도 몰랐다.
근데 뭐… 어차피 뒤가 없었다.
“제발 사위 좀 살려주십시오!!!”
내 개소리가 하늘 끝까지 닿은 것일까. 대치점이 다시 우리 쪽으로 밀리려는 그 때, 빛줄기에서변화가 생겼다.
베스티아를 둘러싼 암적색 기류 쪽이었다.
- 끝까지, 끝까지 저항하세요 자매님!
- 우린 이미 강을 건넜지만, 베스티아 당신은 완전히 늦지는 않았습니다. 끝까지 버티십시오.
- 제 보잘 것 없는 믿음은 꺾였지만, 당신은 고결했습니다. 보여주십시오. 당신의 믿음이,우리의 믿음이 결코 공포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요동치는 기류에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영혼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직전에 싸웠던 이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사제복과 수녀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베스티아를 향해 응원의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핏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이, 이 벌레 같은 년들이!!!”
그 광경은 지독하면서도 숭고했다.가면놈이 핏방울을 통해 영혼들을 조종하려 했으나 그들은 하나도 예외 없이 베스티아에게 응원의 말을 건네곤 자진소멸을 택했다. 비록 그들은 죽기 전에 타락했고 같은 교단 형제자매들에게 이빨을 내밀었으며 끝내 이단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비정상적인 대치로 인해 구속력이 가장 약해진 바로 이 순간. ‘연료’가 되는 자신들의 영혼을 모조리 탈출한 다음, 다시 이용하지 못하도록 베스티아 밖에서 완전히 태워버린 것이었다. 내세에서의 삶과 윤회를 완전히 포기하면서.
비록 죽고 나서긴 하지만, 그들은 다시 제대로 된 길에 돌아왔다.
오로지 우리의 건곤일척의 일격을 돕기 위해.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애애애!!!”
아아아아아----!!!
가면놈과 베스티아의 비명이 교차되며, 마침내 녹색 광채가 암적색 기류를 완전히 잡아먹었다.
콰아아아--!!!
[영원한 안식]
[세스티아가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에게 2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24/248]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 안식에 저항합니다.]
[저항 굴림]
세스티아 : 6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 : 6
[저항 굴림]
세스티아 : 6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 : 6
[저항 굴림]
세스티아 : 6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 : 6
[저항 굴림]
세스티아 : 5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 : 5
[저항 굴림]
세스티아 : 4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 : 4
[저항 굴림]
세스티아 : 3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 : 3
…
[저항 굴림]
세스티아 : 6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 : 1
[공포의 성녀가 안식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세스티아가 공포의 수녀에게 12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248]
[공포의 수녀가 상태이상 ‘수면’(1턴)에 걸립니다.]
[공포의 수녀는 다음 턴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도중에 공격을 받으면 추가 데미지를 입으며 상태이상 ‘수면’이 해제됩니다.]
[세스티아가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립니다.]
[세스티아는 다음 턴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풀썩-
“세스티아!!!”
“자매님!!!”
세스티아가 기절했다. 카야와 셰이가 잽싸게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런 그녀들도 기절만 안 했다 뿐이지 언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또… 또 1?’
다시 한 번 베스티아의 남은 체력을 확인했다.
분명 1이었다. 또 1이었다.
베스티아의 방어력 1 때문에… 고작 1 때문에!!!
‘대체, 얼마나 더 운이 좋아야 하는 거지? 얼마나 더 잘 싸워야 하는 건데…?’
베스티아는 죽지 않았다. 그래서 세스티아의 턴이 종료되고, 그녀의 턴이 되었다.
‘그, 그래. 수면이 걸려 있잖아? 베스티아 다음에 셰이고, 셰이 다음에 나니까. 어. 그래. 끝난 건 아니지만 사실상 끝난 셈이지. 어. 맞아. 왜 그렇게 불안해 한 거지? 그럴 필요 없잖아. 무려 143딜이나 꽂았잖아.’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 희생양의 기운을 완전히 받아들였습니다.]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 깨어납니다.]
[걸려있던 모든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
[남아 있던 체력에 비례해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남아 있던 체력 1/248]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의 공격력이 1 상승합니다.]
[소요된 시간에 비례해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의 공격력이 4, 방어력이 4, 체력 회복이 5 증가합니다.]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 최대 체력의 10%만큼 체력을 회복합니다.]
[남은 체력 26/248]
‘….’
사박-
어느새 공중에서 내려온 공포의 성녀, 베스티아가 맨발인 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역시 수녀장님이시네요. 그토록 강력한 기도라니,평생 처음 봤어요.”
“…거기까지.”
다섯 발자국.
내 제지에 그 정도 거리에서 멈춘 베스티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조금만 더 버텼다면. 여러분들이 조금만 더 빨리 와주셨다면. 상황은 바뀌었을까요?”
“지금, 무슨 말을….”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아요. 최대한 저항해봤지만….”
그녀의 눈에서 또르륵 눈물이 흘렀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있는 가장 기나긴 공포는 마침내 드러나 세상을 휘감으리라.]”
[공포 현현]
세상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