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11)
세스티아의 의문대로 저 버프를 나한테 거는 것도 당연히 생각했던 바였다. 데미지 기댓값만 보면 그 편이 가장 높았으니, 그녀가 순간 의문을 표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상황에 따라 최선의 판단을 내린 것뿐이니까.
첫 턴엔 데미지 방지용 보호막을, 두 번째 턴엔 그 다음 턴인 카야에게 조금이라도 데미지를 더 쑤셔넣을 수 있게 버프를. 만약 세스티아의 다음 턴이 셰이였다면, 셰이에게 버프를 주라고 했을 것이다.
카야에게 버프를 주라는 건, 그냥 그런 의미였다. 세스티아의 버프는 셰이에게 걸든, 나에게 걸든, 카야에게 걸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 걸어도 동일한 효과를 줄 것이다. 히든 요소 그딴 건 없었다.
허나.
‘자애의 손길’이라는 버프가 걸린 대상이 ‘자애의 길’을 걷고 있는 전투 수녀라는 건 뭔가 운율적으로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아닌가? 효과도 그렇고, 마치 지금 이 순간 철퇴를 치켜든 카야를 위한맞춤형 버프처럼 느껴지지 않나 이 말이다.
뭔가, 뭔가 시너지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그만큼 지금 상황이 급박하게 몰려있기 때문이겠지.
“후우우….”
버프를 받아들인 카야가 깊게 숨을 토해내며 철퇴를 허공에 붕붕 휘둘렀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분명 철퇴의 파공성이 이전보다 위력적이었다.
카야의 시선은 여전히 전방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세가 달라져 있었다. 평소의 스프린트 자세였다. 순간 드러났던 그녀의 다리에 힘이 빡 들어간 게 보였다. 첫 공격 때만 해도 침착하게 페이스를 조절하려는 듯 했는데, 심경이 바뀐 것일까?
그도 아니면, 세스티아의 버프를 받아서?
손등에도 힘줄이 바짝 솟던 카야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녀는 잠시 세스티아 쪽을 바라보는 듯 했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친 시간은 짧았다. 3초나 됐을까. 아니, 그보다 더 짧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야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과 각오를 이해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와의 깊은 관계, 그리고 함께 싸워온 경험으로부터 비롯된 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 전투, 카야가 집도하게 될 거라고.
타앗-!
전체적으로 가느다랗지만 결코 부실하지 않고 탄탄한 카야의 다리가 쭉 펴지자 탄환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보고 또 봐도 경탄이 터지는 그 폭발적인 쇄도, 그리고 그 운동에너지가 가득 실린 호쾌한 스윙.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거기에 철퇴를 휘두르는데 한 점의 미혹도 없었으니.
콰드득!
[전율적인 일격!]
[카야가 공포의 사제1에게 3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7/69]
[가열찬 일격에 용사들이 전율을 느낍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5]
[세스티아 멘탈리티 +4]
또 한 번의 치명타. 그리고 버프 덕분에 껑충 뛴 데미지.
비록 박살난 눈알과 코를 부여잡고 오열하는 저 좆제놈을 죽이진 못했지만, 카야는 최고였다. 셰이도, 세스티아도 잘해주고 있지만 나보다 작고 가녀린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나 늠름했다.
“다른 믿음을 그릇됐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들도 야만적이기 짝이 없구나!”
“닥쳐! 네년들은인간도아니니까! 우린 그저 더러운 냄새를 내뿜는 해악한 짐승을 처단하는 중이니!”
카야의 턴이 끝나고, 공포의 수녀들의 턴이 되었다. 그녀들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공포의 힘이 실린 멘탈 공격을 감행하며 입을 털었지만, 셰이가 곧바로 독설로 받아쳤다.
[멘탈리티]
셰이 : -74
카야 : -62
유진 : -52
세스티아 : -56
독설의 영향이 아예 없진 않았는지, 수녀년들의 공격에 허술함이 보였고 전부는 아니지만 닷지를 띄우는데 성공했다.
[셰이와 공포의 사제1, 2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셰이 : 5
공포의 사제1 : 4
공포의 사제2 : 3
[셰이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그리고 원래라면 공포의 사제 원투의 턴이었을 지금, 첫 턴에 자벞 걸고 넘긴 셰이의 속도가 1 올라서 속도 굴림이 발생했고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 이겨버렸다.
드르륵-
검이 끌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 잔뜩 충혈된 눈동자가 날 주시하고 있었다.
셰이였다.
그녀는 꼭 폭발 직전의 활화산 같은 기세를 대놓고 뿜어내고 있었다. 어서 내게 공격 명령을 내리라고 온몸으로 시위하고있었다.
그래, 셰이. 카야만 추켜세우는 거 같아 미안했어.
레벨 빼고는 다 1레벨이긴 하지만… 천재의 실력, 보여줘야지?
카야가 관용과 자애의 여신을 따르는 전투 수녀로서 적들에게 따스한 자애를 베풀어주고 있으니, 이젠 빛과 정의의 여신을 따르는 성전사가 적들에게 정의는 어느 쪽인가 똑똑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네 정의를 똑똑히 알려주고 와.”
“흐으아아아아아!!”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셰이의 배틀크라이가 전장을 갈랐다. 그리고 그녀는 그 갈라진 전장을 전차처럼 묵직하게 주파했다.
[정의 집행]
적 1열과 2열을 동시에 타격할 수 있는, 성전사 전용 범위 공격 스킬 ‘정의 집행’.
더 롱 테러에선 허공에 매달린 거대한 천칭이 성전사의 검에 의해 툭 끊어져 적들의 머리를 강타하는 이펙트 때문에 천칭 떨구기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던 이 스킬은, 단일 공격에 비해 데미지는 약하지만 약한 적들을 다수 상대할 때 혹은 적의 체력이 애매하게 남았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홀-리….”
어느새 공포의 사제1과 2의 머리 위에 은색 천칭이 떠 있었다. 천칭은 생각했던 것보단 크기가 작았고 또 상당히 희미했지만 아름다움과 장엄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예술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천칭의 윗부분을, 셰이는 길게 늘어난 클레이모어로 망설임 없이 끊어냈다.
챠르르륵-
은빛 쇠사슬이 서걱 썰리며 삽시간에 좆제놈 원투의 머리에 천칭이 추락했다.
콰아아앙-!
[셰이가 공포의 사제1에게 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69]
[공포의 사제1이 죽었습니다.]
[셰이가 공포의 사제2에게 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60/69]
“좋았어!”
치명타는 안 터졌지만, 클린 히트였다. 아주 깔끔히 죽였다. 이미 체력이 7밖에 안 남았던 놈에게 100뎀을 꽂으나 7뎀을 꽂으나 뒤지는 건 똑같으니, 한 놈을 죽이면서 다른 놈에게 추가 데미지를 넣었다는 것 자체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데미지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시각적인 이펙트는 매우 강렬했다. 시스템적 요소는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공포가 지배하던 이 음습한 공간의 분위기가 확실히 환기되었다. 거기에 좆제놈1이 죽으면서 뒤에 있던 놈들이 한 칸씩 앞으로 끌려왔고, 카야와 셰이도 수녀년1을 가격할 수 있게 되었다.
‘4열에 새로운 좆제놈이 바로 충원됐네.’
비어있던 4열에 공포의 사제3이 바로 난입했지만, 이제 겨우 하나 잡은 것에 불과했지만… 우리 용사대의 분위기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할 수 있다.
여신님들께서 우릴 봐주신다.
정의는 이쪽에 있나니.
나는 이번엔 유스티티아님의 이름을 속삭이며 도끼를 휘둘렀다.
**
“보십시오. 불신자들이 꽤나 선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녀님.”
“….”
“비록 그 대상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자매님 형제님 하던 사이라는 게, 웃기지도 않은 촌극이라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만… 예? 뭐라고 말했습니까?”
“….”
“아, 이 여자는 왜 이 꼴로 성녀님 앞에 묶여있느냐 이 말씀입니까?”
가면 남자, 핀들리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맹세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전 분명 성녀님께서 저항을 멈추신 걸 확인한 이후, 리베아라는 수녀에게 손을 대기는커녕 오히려 신도들에게 시켜 풀어주라는 명령까지 내렸습니다. 아 그런데 왜 꼴이냐, 이 말씀입니까? 그거야….”
콰아앙-!
그렇게 멀리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서 육편이 흩날리고 먼지가 피어올랐지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마냥 바라보던 핀들리에가 리베아의 앙가슴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베스티아가 홱 고개를 쳐들며 그를 노려봤다. 따스한 빛을 품고 있던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잔뜩 혼탁해진 상태였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성녀님. 그저 심장의 상태만 확인하려는 것뿐이니. 아, 그리고 아까 얘기의 연속입니다만….”
미약하게 뛰고 있는 리베아의 심장박동을 체크하며, 핀들리에는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맹세한 대상은 ‘수녀’ 리베아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 ‘수녀’가 아니게 되어버린 리베아라는 여자는… 어찌되어도 좋은 게 아닐는지?”
“…!”
“앉아. 당장 이년의 사지를 갈아버리고 심장을 터뜨려버리기 전에.”
부릅뜬 베스티아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핀들리에가 꾸민 모종의 조치 때문에 말을 할 수 없게 된 지금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책감 때문에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도 어리석음이었지만, 눈앞의 핀들리에가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평생 벌레도 제대로 잡아본 적 없던 그녀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이가 무력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렬한 공포심과 함께 핀들리에를 향한 맹렬한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정말로 무사히 풀어주려고 했습니다만, 그사이 버티지 못하고 공포를 받아들여버린 건 제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정말입니다? ---- --님께선 엄격하시니, 그분께 바친 맹세를 제가 기만의 용도로 사용할 리가 없잖습니까.”
- 끄아아아아악!
- 죽어!!!
- 아, 안 돼! 정신 차리십시오!!
- 야이 씹새끼들아!!!
“흐음, 분투를 보는 것도 재미는 있지만서도 꽤나 시끄럽지 않습니까. 마지막 재료도 충당됐고, 슬슬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만. 예?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면서 뭐하러 일일이 보고하고 묻냐는 말씀입니까? 그야 성녀님이잖습니까. 성녀님께서 의지가 없으시면, 이잘난 계획도 삐끗하니, 허락을 맡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
“아, 이제 와서 못 하겠다 이런 말 해봐야 소용은 없습니다. 그야, 어차피 성녀님이 돌아갈 곳은 없으니까. 그리고.”
푸욱-
버터에 나이프를 찌르듯, 핀들리에의 손가락이 리베아의 앙가슴을 아주 부드럽게 파고들어갔다. 피가 분수처럼 마구 솟구쳤다. 반 이상이, 머리맡에 무릎 꿇고 있던 베스티아에게 튀었다. 그녀의 표정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래 이거지. 이거야!
어서, 빨리 그 경악을 공포로 물들이라고!
어서!
“그거 아십니까?사실 이 여자, 계속 깨어있었다는 거?”
가슴을 갈라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몸 밖으로 꺼낸 그는, 성녀를 내려다보면서 서서히 손에 힘을 주었다.
쮸우욱-
그러자 심장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강제로 ‘짜여진’ 피와 살점들이 원판에 새겨진 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목을 부여잡고 가슴을 퉁퉁 치며 소리 없이 절규하던 베스티아는 혼절했고, 리베아의 피로 가득 찬 원판이 곧 불길한 암적색 빛을 내뿜었다.
“살아있는 채로 가슴이 갈라져 심장이 터져나가는 고통과 공포. 그걸 곁에서 지켜만 볼 수밖에 없는 무력감과 공포. 곁가지 감정이 섞여있긴 하지만,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하. 그럼 이제 대단원의 막을 장식해볼까 합니다, 성녀님. 이런, 기절하셨습니까. 어쩔 수 없지만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핀들리에가 손가락을 다시 한 번 튀기자 리베아의 몸이 녹아내리며 암적색 빛이 몇 배는 강해졌다. 그리고 그 빛이 전부 베스티아의 몸에 빨려들어가더니, 축 늘어져있던 그녀의 몸이 둥둥 떠 원판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짝- 짝- 짝-
원판에서 벗어난 그가 박수를 세 번 쳤다. 그러자 이미 용사대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시체들을 비롯해, 아직까지 싸우고 있는 타락 수녀들과 사제들의 몸까지 전부 핏물로 변해버렸다.
“하하! 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하!”
용사대의 멍청한 얼굴을 발견한 핀들리에가 폭소했다.
“그 대단하신 믿음! 의지! 전우애! 부디 꺾이지 않고 마음껏 부딪쳐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의 손엔 타락 수녀들과 사제들의 핏물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야 더욱 순수하고 기나긴 공포를 맞이할 테니!”
광대처럼 웃은 그가 집사처럼 공손히 인사했다.
지독한 조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