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9)
“베스, 티아….”
“세스티아!”
“베스티아. 베스티아, 그아이. 그 자매가.”
“세스티아!!!”
시종일관침착한 모습을 보였던 세스티아가 검은 기운에 휩싸이기 시작한 목걸이를 부여잡고 넋을 놓고 있었다. 재빨리 그녀에게서 목걸이를 떨어뜨리고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곧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해요. 헨드릭님.”
“자. 숨 들이쉬고, 내쉬고. 침착하게.”
세스티아는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패닉 상태에 가까운 것 같았다. 툭 건드리거나 소리를 지르기만 해도 눈물을 흘릴 거 같았다. 그래서 재촉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그녀를 먼저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다행히 그 노력은 효과적이었다. 마음을 어느 정도 다스린 세스티아가 재빨리 상황 설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잘못들은 게 아니라면 방금 건 분명 저희 지부의 자매 중 한 명인 베스티아가 낸 소리일 거예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들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아이… 제 제자 중 한 명이기도 하고 딸처럼 키우기도 한 아이라서… 잘못 들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그렇게 소중한 아이를 납치당한 걸 여태 모르고 있었냐, 여기에 납치당했다는 건 몰랐어도 사라진 거 자체는 사실이었을 텐데 여태껏 뭐하고 있었던 거냐, 셰이가 협력자 신분으로 우리와 함께 이곳을 조사하고 나서 교단은 그동안 뭘 했기에 검게 물든 목걸이를 보고나서야 정식으로 전투단을 파견한 거냐 등등….
지금 상황에서 물을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그녀가 말한 ‘베스티아’라는 수녀와, 저 목걸이가 중요했다.
“저 목걸이의 주인은 그럼 베스티아라는 수녀인 거야?”
“확신할 수는 없어요. 기본적으로 같은 교단의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자매들의 목걸이는 전부 똑같이 생겨서… 하지만 베스티아의 목소리가 들렸던 순간에 이 목걸이만 반응하고 있는 건, 분명 연관성이 있을 거라 생각해요.”
“본인 거라든가, 아니면 깊은 관계에 있던 수녀 거라든가?”
“네….”
“그럼 세스티아, 넌 어느 정도는 알 거 아냐?”
“베스티아는 상냥하면서도 심지가 굳센 아이였어요. 라엘라님에 가장 근접한아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성정도, 재능도, 믿음도 뛰어난 아이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아이는 거의 모두와 친했어요. 섣불리 누구의 것이다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요.”
베스티아라는 수녀에게 있어서 스승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일 세스티아는 여기 멀쩡히 있으니, 생각할 수 있는 건 엄청 친한 친구 정도뿐이었는데….
‘재능 쩔고 성격 좋고 신앙심 굳건한 인싸 수녀라… 이단 새끼들은 대체 어떻게 납치한 거지? 납치해서 어따 써먹으려고? 지금껏 마주쳤던 공포의 수녀랑은 뭔가 다른 느낌인데.’
- 아아아아아아!!!
“베스티아…!”
잠잠하나 싶더니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려퍼졌다. 세스티아의 얼굴이 침통함에 잔뜩 일그러졌다.
“일단 다른건 다 집어넣고 저걸 이용하는 게 답인 거 같은데.”
“설마 이게 이정표 역할을 하는 건 아니겠죠?”
“차라리 그럼 좋겠지만, 설마. 이게 일단 누구 건진 모르겠지만 베스티아라는 수녀와 연관성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말없이 가방을 들어올리자 동료들은 잽싸게 대형을 갖췄다. 목걸이는 선두에 있는 셰이가 들게 했다.
변수가 생겼으니 이제 다시 전진할 때였다.
**
“아아아아… 리베아! 리베아!!”
“이런. 성녀님에게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었나봅니다.”
“라엘라시여! 냉철한 관용으로 보살펴주소서! 라엘라시여!”
베스티아는 끊임없이 절규하고 통곡했다. 눈앞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자매가 핏기 하나 없는 상태로 의식불명에 빠져있었다. 곳곳에 핏자국이 있었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잘려있었으며, 가뜩이나 마른 편이었던 몸은 완전히 앙상해진상태였다.
베스티아가 연거푸 치유 스킬을 발동했으나 회복되기는커녕 미동도 없었다.
“리베아! 리베아! 정신 차려… 응?”
“과연. 지금까진 겉으로나마 평정심을 유지했던 그 성녀님이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줄은. 이 보잘 것 없던 수녀가 그렇게까지 소중할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거짓말 하지 마! 대체, 대체 어디까지 괴롭힐 셈이야!?”
“많이 흥분하셨습니다, 성녀님.”
“그딴 가식은 집어치워!!! 그 기분 나쁜 가면 속에 표정은 그만 숨기고 본심을 드러내란 말이야!!!”
검은 가면을 쓴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너무 쉬웠다. 허탈할 정도였다. 수많은 시도들에도 타락하지 않고 굳건히 버텨내던 난공불락의 요새는, 고작 친구 한 명 때문에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근본적인 방법으로 믿음을 저버리길 바랐지만,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이런 저급한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공포는 공포 그 자체를 마주해야만 하는 것. 다른 부차적인 감정을 통해 공포를 이끌어내는 건 저급한 짓이었지만, 계획은 이미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 성녀가 품을 공포의 힘, 그 순수성이 조금 흐려지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공포를 받아들인 이들 중에서, 그 영광된 역할을 맡을 이가 없다는 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획을 진행해야만 한다는 것에 의문이나 아쉬움을 토로하진 않았다. ---- --의 뜻을 자신 따위가 어찌 헤아릴수 있겠나.
“이 사람은 아직까지도 저항중입니다.”
“뭐어…?”
“신체는 허약하지만 정신은 그만큼 굳건한 수녀였습니다. 하지만 뛰어난정신에 비해 신체가 받쳐주지 못해, 신체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성녀님도 침착하게 살펴보시면 바로 파악하실 겁니다.”
“흐윽….”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은 베스티아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녀는 가면 남자를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노려봤다.
“약속해. 그 잘난 공포에 대고 맹세해. 리베아를 무사히 원래 자리에, 원래 상태로 되돌려놓겠다고.”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쪽이 원하는 대로, 저항하지 않겠어.”
“저항하지 않는 게 아니라온전히, 그리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만.”
“지금까지 계속 받아들이도록 압박한 주제에 모르는 척 하지 마! 내가, 저항을 그만두면… 금방, 바뀔 테니까… 그러니까 맹세해. 안 그러면 끝까지 저항하겠어.”
“이 여자가 끝내 어떻게 되도 말입니까?”
“더 이상 협박하지 마. 내 입에서, 더 비참한 소리 하게 하지 마.”
“흐음.”
“건들지 마! 건들면, 죽어버리겠어! 그쪽이 준비한 모든 것이 물거품되겠지!”
쓰러진 수녀에게 손을 대려던 가면 남자에게 베스티아가 협박했다. 남자는 재롱이라도 본 것 마냥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 --님께 영광되게도 한 줌의 은총을 입은 저, 핀들리에는 리베아라는 수녀를 무사히 원래 자리에, 그리고 원래 상태로 되돌릴 것을 맹세합니다. 맹세를 어길 시 ---- --님께 받은 은총을 잃을 것입니다. 단, 이 모든 건 성녀 베스티아가 은총을 받아들였을 때를 전제로 합니다.”
남자의 검은 가면이 순간 불타올랐다. 맹세가 제대로 발동되었다는 표시였다.
“이제, 성녀님 차례입니다.”
“…리베아가 먼저야!”
“아뇨. 성녀님이 먼접니다.”
“그쪽을 어떻게 믿고…!”
“하.”
빠각-
남자의 가면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곧 바닥에 떨어졌다. 마침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흡!”
“성녀. 네년이 지금 자신의 처지를 잘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거 같은데….”
처음부터 방금 전까지 베스티아에게 계속 존대를 하던남자의 어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그는 검게 물들어 비틀어진 자신의 왼쪽 얼굴을 매만지며 다른 손으로 베스티아의 멱살을 잡아챘다. 끔찍하면서도 기괴한 얼굴에 놀라던 그녀가 숨을 들이쉴 때, 그가 나지막이 경고를 내뱉었다.
“은총을 받은 내가, 내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은총을 걸고 맹세를 했다. 그리고 그분께선 친히 받아들여주셨고. 눈앞에서 본주제에, 감히 그분의 뜻을 의심해?”
“으윽….”
“헛된 희망은 당장 내려놓고, 저항을 멈춰. 네년이 ‘다른 의미’로 친애하는 저년을 이 자리에서 희생양으로 삼아버리기 전에.”
“아아아… 그것만은…!”
털썩-
남자가 거칠게 손을 털자 베스티아가 풀썩 쓰러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가면 조각을 들고 뭐라 중얼거리더니 가면이하나가 되었다. 다시 가면을 쓴 남자가 리베아를 어깨에 짊어지며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 시간 후 다시 오겠습니다, 성녀님.”
“안 돼….”
가면 남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정확히는 매달려있던 리베아의 모습을 좇던 베스티아는 습관적으로 로자리오를쥐고는 라엘라에게 기도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겨있던 굳건함은 이미 반쯤 무너진 상태였다. 마치, 3분의 1 넘게 검게 물들어버린 로자리오처럼.
**
“방금 다섯 번째 지나쳤어요.”
“목걸이는?”
“더 이상 까매질 수 없을 정도로….”
목걸이를 앞세우며 전진했지만 루프현상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예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약 30분 거리를 반복될 때마다 목걸이가 점점 더 검게 물들었고, 다섯 번을 반복한 지금 물들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100퍼센트 블랙 그 자체였다. 숯덩이나 먹물보다도 더 진한 검은색인 목걸이는 꼭, 목걸이 주인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아 굉장히 착잡했다.
“어쩌면… 이번 전진 때, 다른 장소가 우릴 맞이할지도 모르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완전한 타락을나타내는 목걸이의 주인, 베스티아 혹은 그 누군가가 괴물의 입장에서 우릴 가로막는 그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떠오른단 말은 절대 내뱉을 수 없었다.
“가자.”
지금은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
두시간 반, 앞서 걸었던 것까지 포함하면 거의 네 시간 가까이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걸었지만 발걸음이 느려지진 않았다.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만, 역설적으로 다리는 빨라졌다. 셰이도, 카야도, 나도, 그리고 세스티아도.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목걸이의 주인은 이미 되돌리기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누가, 그리고 뭐가 나타나든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결과를 마주할 수밖에 없겠지.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갔다.
‘세스티아가 단숨에 무너질 거 같진 않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신경을 써야겠지.’
숨 막히는 30분간의 전진 끝에, 우린 예상대로 전혀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정확히는 발걸음을 옮겼을 뿐인데 어느 샌가 다른 곳이 ‘나타났다’에 가까웠다.
짝- 짝- 짝-
이질적인 박수소리와 함께, 마법횃불이 아니면 제대로 운신하기 힘들정도의 공간이 단숨에 밝아졌다.
기습 눈뽕에 눈을 찌푸리며 황급히 주변을 살피던 나는, 멍하니 전방을 바라보는 세 여자의 뒤통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명순응에 겨우 적응한 나도 그녀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어째, 이런 건 빗나가질 않는지….’
보기만 해도 어질어질할 정도로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원판 위에 사지가 결박된 나신의 여자가 하나. 그 머리맡에 무릎을 꿇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검은 기운을 마구 뿜어댔다 빨아들였다를 반복하는 여자가 하나. 그리고 그런 두 여자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흡족하게 쳐다보고 있는 가면 쓴 남자가 하나. 거기에 원판을 둘러싸는 거대한 원 곳곳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타락 수녀들과 사제들까지.
구역질과 현기증이 도졌다. 공간을 가득채운 온갖 부정적인 기운들 때문에 몸이 절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끔찍한 시체와 흘러내리는 내장을 보고 구역질이 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거부감이었다.
짝- 짝- 짝-
“어서오십시오.”
박수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퍼지고, 매우 정중한 어조의 목소리가 현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으며 우릴 환영했다.
“---- --님을 배알하기 위해 여기까지 오신 분들을 위해, 작은 즐길거리를 준비했습니다만. 함께하시겠습니까?”
“뭔 미친소리….”
“물론, 거부권은 없습니다.”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곳곳에 누워있던 수녀들과 사제들이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다가 동시에 우릴 바라봤다.
“흐읍!”
그들의 눈 전체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