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8)
“어리석구나, 아이야. 어째서 그런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이야?”
“아, 안 돼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건, 이건 안 돼요!”
“이해할 수가 없구나. 다른 아이들은 전부 내 말을 따르지 않았더냐? 어째서 너만은 그렇게도 거부하는지 모르겠구나.”
“아…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돼요.”
인자한 어조로 여자 아이를 타이르던 노인은 거듭된 아이의 거부에 표정을 굳혔다.
“그렇게 거부해도미래는 확정적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이냐. 조금 일찍 네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과, 강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고 몇 번이고 말했건만.”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뭐라?”
“전, 저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예요. 다른 아이들이 당신의 말을 따랐다고 해서, 저도 반드시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허.”
탄성을 흘리던 노인이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네가 그렇게나 걱정하고 아끼던 ‘리베아’라는 아이도 내 말을 따르기로 했는데도 말이더냐?”
“네? 리베아가요? 말도 안 돼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없다? 직접 보면 이해하게 될 것이고, 또 믿게 되겠지.”
“대체,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예요? 무슨 짓을 한 거냐구요!”
“그 아이는 아직 내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진 않았다.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는데…!”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성녀.”
노인의 얼굴이 삽시간에 검게 흘러내렸다. 아이는 비명을 질렀다.
“대계는 곧 이루어질 것이다. 성녀, 너를 기점으로.”
**
“하악, 하악, 하아….”
여자는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온몸엔 기분 나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대체… 대체 왜자꾸 이런 꿈을.”
짐작 가는 바가 없진않았다. 자신은 공포 숭배자들에게 납치당했고, 성녀라는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으며 그들이 꾸미는 계획에 이용될 중요한 장기말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계획이라는 것이 실행될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더 선명해지고 더 잦아지는 이 기분 나쁜 꿈은 필시 공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내가 뭐길래.
라엘라님을 믿고 그분의 길을 따라 걸으려 노력하고 있는 평범한 수녀일 뿐인데.
어렸을 적 부모님 몰래 빵을 사먹은 잘못에 대한 벌일까? 수습 기간 중 몰래 숙소를 빠져나가 놀다온 것에 대한 벌일까? 그도 아니면, 출장 예배를 끝내고 돌아오던 도중 볼 일이 있다며 리베아를 먼저 보냈던 게 잘못이었을까?
“아, 리베아!”
지금까지 잡혀 들어온 같은 교단 자매들이나 타 교단 자매들 중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리베아가 없었다. 다른 자매들이 타락해가는 걸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는 사실이 매우 분하면서도, 그중엔 자신과 리베아가 없다는 것에 대해 안도했던 자기자신을 호되게 꾸짖기도 했다.
불안했다. 왜 하필, 그 기분 나쁜 가면 쓴 남자가 들르고나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리베아까지 잡혀온 걸까? 설마 벌써 타락까지 해버린 걸까? 그럴 리 없다. 그녀는 자신보다 더 신실한 친구였는데, 그럴 리가 없다.
그리고, 정말로 난 라엘라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걸까? 난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라엘라님. 제발 알려주세요….”
여자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여신의 대답은 없었다. 여자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기도했다. 자신의 믿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믿음이 엇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단들에게 성녀라고 불리는 여자, 베스티아는 땀이 묻어 미끌거리는 로자리오를 손에 꼭 쥔 채 누구도 듣지 못할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로자리오의 일부분이, 검게 물든 것도 모른 채.
**
“이상하네.”
“어떤 점이 말인가요?”
“꽤나 깊게 들어갔는데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게.”
여섯 번째 방을 통과한 지도 한 시간이 넘었다. 사주 경계를 소홀히 하는 건 아니었지만 꽤나 빠른 속도로 걸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 그대로 아무 것도 없었다.
공포무새들도, 그들이 홛동했던 흔적도, 라엘라 교단의 파견단도. 심지어 다른 교단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가 선두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는 말했어. 하지만 그래도 한 시간은 넘은 거 같은데, 우리 말고 여기에 도달한 교단이 단 한 곳도 없다는 건 좀 말이 안 되는 거 같지 않아?”
“맞아요. 특히 유스티티아 교단의 성전사장은 전투력이 아주 뛰어난 전사예요. 그가이끄는 성전사들이 지금까지 돌파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되진 않아요.”
“세스티아님 말씀이 맞아요.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스승님은 괴물이거든요.”
이 장소의 크기 자체가 크다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불안했다. 우린 명백히 중앙 구역, 그 중에서도 중심을 향하고 있었는데 외곽보다 뭐가 더 없는 게 너무나 이상했다.
“대장. 혹여나 던전처럼, 중앙 구역만 다른 공간일 가능성은 없습니까?”
“아니. 그런 곳은 없었을 걸. 너도 알잖아. 입구 딱 지났을때 그 느낌. 적어도 여기에 있는 동안 그느낌이 왔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카야가 그나마 가능성 있는 가설을 제기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만약 던전 입구 같은 곳을 지나쳤다면 반드시 메시지가 떴을 테니까.
그래서 더 난감했다.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세스티아. 혹시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
“세스티아?”
“아, 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죄송해요. 여기 벽면이랑 기둥들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벽면이랑 기둥은 왜? 별다른 거 없잖아.”
“네. 별다른 건 없었어요. 방금 전까지는요.”
“뭐?”
“잠시만… 잠시만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뭐 때문인지 약간 떨고 있는 세스티아의 손짓에 길을 이탈했다. 길 양쪽엔 일정 간격마다 아무 무늬 없는 기둥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그 중 하나에 우릴 이끌었다.
“여긴 왜?”
“잠시만요. 이쪽으로… 아. 여길 봐주시겠어요?”
“무슨 이유 때문… 이건, 신성흔아닙니까?”
“신성흔?”
“신성력의 흔적이에요. 핏자국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단새끼들이 이런 걸 남길 리가 없으니, 세스티아님 흔적이겠네요?”
“맞아요. 제가 대략 30분 정도 전에 몰래 쏘아서 묻혀놓은 거죠.”
세스티아의 말에 순간 멍하니 기둥을 보고 있던 우리는 그녀의 말에서 소름끼치는 모순점을 거의 동시에 발견했다.
“아니, 잠깐만! 우리 계속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잖아! 쉬지도 않았어!”
“어떠한 장치도, 이단새끼들도 없었어요!”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과장 안 하고 팔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이런 트릭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단순히 통로를 따라 이동하는 것 밖에 없었던 더 롱 테러에서, 이런 트릭이라니?
아니, 애초에 트릭이 맞나? 어떠한 낌새도 없었는데?
“저희 교단의 파견단이나 타 교단의 전투단을 조우하지 못하고 있는 건… 어쩌면 이 기현상 때문이 아닐까요?”
“세스티아, 네가 표시를 안 해놨다면 우린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는 얘긴가. 용케 그런 생각을 했네.”
“헨드릭님 말대로 이상해서요. 괜히 안 가져도 될 긴장감까지 조성할까봐 말은 안 하고 몰래 표시한 거지만, 설마 싶었던 게 실제로 벌어진 이상 말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어요. 미리 말을 안 한 점은 죄송해요.”
“아냐. 오히려 감사해야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건 대장인 내 쪽이야.”
전진은 의미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6번째 방을 나오고 한 시간 좀 넘은 거 같은데, 세스티아의 말을 근거로 삼으면 우린 약 30분 정도의 거리마다 루프 중이었다.
“우리가 여길 통과 못할 걸 아니까 그놈들도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지 않았던 건가?”
“단순히 시간 끌기용일 가능성도 있어요. 교단들이 모이면 여기도 어떻게든 파훼가 될 걸로 가정하고, 거대 제물 공양진의 각 축을 담당할 겸 그들의 죽음 자체도 일종의 연료로 삼은 거겠죠. 그새끼들은 그러고도 남아요.”
“중앙 구역의 정확한 크기까진 모르지만, 이 되돌림 현상이 이단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진 않습니다. 아무리 침입을 대비한다 해도, 그건 너무 말이 안 됩니다.”
“어쩌면, 계획이라는 거에 꼭 필요한 핵심인사 몇몇은 ‘핵’이라고 불릴 장소에 미리 다 가 있을 수 있지. 그렇게 되면 나머지가 어떻게 되든 말든 그놈들 입장에선 알 바 아닐 거 아냐. 시간 끌다가 죽든 여길 헤매다 죽든.”
나와 셰이, 카야가 저마다 추측을 늘어놨다. 물론 어느 하나 희망적인 건 없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여길 어떻게 돌파하느냐야. 그게 안 되면 아무 것도 의미 없어.”
“그렇, 습니다.”
막막했다. 세스티아의 재치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눈치도 못 챘을 기현상을 무슨 수로 해결한단 말인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해결할 수도 있겠지.’
문제는 그시간이었다.
보유한 식량은 둘째치고, 그동안 이단 놈들이 가만히 있을까? 절대 그럴 거 같진 않았다.
카야도, 셰이도, 세스티아도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 게 보였으나 딱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9레벨이 되기까지 수많은 걸 경험했을 세스티아마저 침묵하고 있는 걸 보면, 그녀도 처음 겪는 현상이겠지.
일어서서 좌우로 왔다갔다 했다가 기둥에 기댔다가 자리에 앉았다가… 자세를 바꿔가며 계속 생각했지만 이거다 싶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안 좋은데.’
차라리 전투가 벌어지는 게 마음이 편할 정도로 분위기는 점차 침체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타락하는 수녀들이 있을 것이고, 또 무슨 고통을 받고 있을지도 몰랐다. 거기에 그놈들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을 텐데 발이 묶여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크나큰 스트레스였다.
[멘탈리티]
셰이 : -44
카야 : -36
유진 : -30
세스티아 : -26
‘멘탈은 언제 이렇게 까였지.’
분명 전투 끝나고 확인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다. 다급히 메시지들을 살펴보니 멘탈리티가 하락했다는 메시지가 다다닥 붙어있었다.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전혀 인식하지 못했어.’
어둡고 단조로운 길을 멍하니 걸어서?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같은 곳을 뺑뺑 돌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껏 단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메시지조차 놓쳤다는게 중요했다. 동료들에겐 아직 공유할 수 없는 문제였지만, 그랬기에 더 답답하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
“언니?”
그때 멍하니 신성흔 쪽을 바라보던 카야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촤르륵 털어냈다.
타락 수녀들이 가지고 있던 목걸이들이었다.
“카야. 갑자기 이건 왜….”
“셰이, 그리고 세스티아 자매님. 한 번 자세히 살펴봐주십시오.”
“네?”
“저는 아직 미숙해서 이 목걸이들에 무언가 미세한 변화가 있다는 것 정도밖에 파악하지 못했지만, 저보다 훨씬 뛰어난 셰이와 세스티아 자매님이라면 훨씬 더 자세하게 알아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깐만! 변화라는 게 뭔데!”
“맞아요. 적어도 전 언니가 느꼈다는 미세한 변화를 못 느꼈는데요?”
“그냥… 말 그대로 변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색이 변한 것도 아니고 재질 자체가 변한 것도 아니지만, 분명 무언가 변했다고밖에는… 그리고 제가 느낄 수 있었던 건 아마 제가 이 목걸이에 가장 가까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한 번 자세히 살펴봐주십시오. 현 상황을 돌파할 실마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답도 없이 고착된 현 상황에서 무언가 변수가 생겼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셰이와 세스티아는 검게 변한 목걸이들을 입수한 순서대로 늘어놓고 신성력을 아주 미세하게 투입하면서 조사하고 있었고, 카야는 자신이 변화를 느꼈던 정확한 스팟에 가서 그 부근을 재조사하고 있었다.
‘신성력을 못 느끼니 할 게 없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녀들의 집중력이 깨지지 않도록 조용히 있는 것.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마법횃불에 약도를가까이 대고 루프를 제외한 동선과 포함한 동선 모두를 고려해 중앙 지역의 핵심이 될 것 같은 곳을 유추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한 시간, 아니 30분 거리 긋고. 만약 우리 포함 여섯 방향에서 중앙 지역으로 돌입하고 난 이후의 방향과 거리가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 아아아아아아…!!!
“뭐야!”
“대장!”
“대장님!”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고, 나를 포함해 카야랑 셰이가 벌떡 일어나며 사방을 경계했다. 하지만 세스티아, 그녀 혼자만은 한 목걸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베스, 티아…?”
- 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