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7)
기세를 살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 시커먼 기사놈만큼은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특히 공포의 힘이라는 엿 같은 버프까지 받은 상태라면.
“전력으로 배제하겠다!”
[3형 – 내리누르기]
[제단의 수호기사가 카야에게 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보호막 체력 2/8]
[제단의 수호기사가 셰이에게 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보호막 체력 0/8]
[보호막이 파괴됩니다.]
기사놈의 대검이 1열에 있는 카야와 2열에 있는 셰이를 동시에 공격했고, 단숨에 보호막이 깨져버렸다. 세스티아가 씌운 보호막이 각 용사의 방어력이 먼저 적용되고 까여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보호막이 종이처럼 찢겨버리고 동료들도 피해를 입을 뻔했다.
“카야! 셰이! 괜찮아?”
“괜찮습니다!”
셰이는 욕을 내뱉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다음이… 수녀 턴이었나?’
사제놈이 죽으면서 3열에 있던 수녀년은 자연스럽게 2열이 되었다. 따로 끌어당기지 않아도 이제 누구나 타격이 가능한 상태가 된 것이다.
‘이번이 네년의 마지막 공격이 될 거야.’
아무래도 셰이의 영향이 있는지, 수녀들을 점점 더 험악하게 표현하고 있는 속마음을 애써 누르며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다.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공포.”
[공포의 복음 – 부여]
“그 힘으로 부디 저 불신자들에게 공포를 똑똑히 새겨주시길. 수호기사여.”
[공포의 수녀의 체력이 8 감소합니다.]
[남은 체력 68/76]
[제단의 수호기사의 최대 공격력이 4 증가합니다.]
[제단의 수호기사의 방어력이 2 증가합니다.]
[3턴간 지속됩니다.]
기사놈이 풀피였으니 치유 스킬을 사용할 거 같진 않았고, 끽해봐야 멘탈리티 공격을 다시 감행할 것 같았던 수녀년이 자해까지 하며 기사놈에게 또 한 번의 버프를 걸었다. 비록 제단이 부여한 것과 다르게 3턴 지속이었지만, 맥뎀이 4나 증가하고 방어력까지 2가 오르는 미친 버프였다.
가뜩이나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기사놈 주위가 한층 더 흉포함을 머금었다.
‘지금 기사놈 체력이 79에 방어력이 시발 무슨 11이나 돼. 세스티아는 보호막 걸고 턴 넘긴다고 치고, 그 다음 턴이 카얀데 아무도 낙인이 안 찍힌 지금 카야의 공격력은 7~13.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의 10% 보정을 생각한다 해도 8~14. 지금 기사놈을 때리는 건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그렇다고 여기 다음에 더 어려운 전투가 있을 게 뻔한 상황에서 세스티아에게 영원한 안식을 쓰라고 할 수도 없어.’
치명타가 터진다고 해도 생각보다 엄청 큰 데미지를 띄울 거 같지 않았고, 현재 수녀년의 턴이 나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의 턴보다 빠르기 때문에 다음 라운드에 기사놈에게 힐이라도 걸어버리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게다가 저 버프가 중첩이 안 될 거라는 보장이 없어. 기사놈을 놔두는 게 아프긴 하겠지만, 일단 수녀년부터 조지는 게 맞다.’
“세스티아. 다시 한 번 보호의 요새를.”
“네, 헨드릭님. 라엘라시여, 부디 저희들을 보호해주소서.”
[보호의 요새]
[세스티아가 모든 용사들의 체력을 2 회복시킵니다.]
[셰이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20/20]
[유진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17/17]
[세스티아가 모든 공격을 우선해서 받아내는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보호막 남은 체력 8/8]
그녀가 시전한 두 번의 광역힐로 우린전원 풀피로 회복했고, 보험용으로 8체력의 보호막도 다시 걸었다. 고레벨 치유 수녀의 힘이었다.
희미한 녹색 빛의 보호막이 용사대 전원을 반구형으로 감싸는 걸 보다가 카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비스듬히 철퇴를 내려들고 앞쪽, 정확히는 입에서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수녀년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타락했다지만 자매를 계속 패죽이는 건 멘탈이 많이 상하겠는데.’
그녀에게 괜찮냐고 묻는다면 100퍼센트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묻지 않을 것이다. 이미 수녀년이 있던 방을 다섯 개나 지나친 지금 와서 묻는 게 늦은 감도 있었고, 또 괜히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투중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차분히 명령하자.
“카야.”
“예. 대장.”
“자매의 피, 한 번 더 묻혀야 할 것 같아.”
“이미 다섯 번입니다. 다섯 번이나 여섯 번이나,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카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 명령을 받아들였다. 곧 그녀는 사제놈의 피와 살점이 묻어있는 철퇴를 덤덤하게 치켜들었다. 움직임 때문인지 가시 부분에 가까스로 매달려있던 살점이 그녀의 부츠에철퍼덕 떨어졌다. 그녀는 힐끗 쳐다보더니 휙 털어버렸다. 말라붙어가던 작은 살점이 공교롭게도 괴물들의 앞쪽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건 마치, 네놈들의 운명도 이렇게 될 것이다는 선전포고같이 느껴졌다.
“….”
“….”
그 작은 소리가 피아를 가리지 않고 시선을 모았다. 그러나 카야의 시선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저한테나 그쪽한테나 아무런 의미 없겠지만.”
저벅-
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철퇴 위에 고여 있던 끈적한 핏물이 느릿하게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엿을 녹여 밑으로 쏟아내는 것처럼, 가늘면서도 검붉은 폭포가 되어 바닥으로 이어지며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 서 있을 수 있는 건, 자매였던 자들의 피를 머금은 길을 걸어와서라고. 네놈년들이 아무리 공포를 지껄여봤자, 지금껏 이 철퇴에 대가리 깨진 년들의 뒤를 따르게 될 거라고.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았다.
“이젠 동정하지 않겠습니다.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모욕하고 가당찮게 그릇된 믿음을 설파하려는 그 입을 닥치게 할 겁니다. 그리고.”
카야는 비스듬히 들고 있었던 철퇴를 완전히 머리 위로 들어올렸고, 가늘게 이어졌던 피의 폭포가 확 끊어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건 꼭, 머리가 깨지고 뇌수가 사방팔방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공포에 잡아먹힌 그 머리와 굴복해버린 그 마음까지. 우리의 앞길과 운명을 가로막는 그 모든 삿된 것들을 한꺼번에 부숴버리겠습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콰아아아아-!!!
“꺄아아아아아아악-!!!”
[Volente Deo – 신의 뜻이 철퇴에 깃듭니다.]
[공포의 수녀가 남은 체력에 상관없이 즉사합니다.]
[공포의 수녀가 죽었습니다.]
[잠시나마 강림한 신의 뜻이 용사의 허한 마음을 보살펴줍니다.]
[카야 멘탈리티 +10]
[셰이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6]
[세스티아 멘탈리티 +7]
[카야는 다시 한 번 행동할 수 있습니다.]
피로 물든 철퇴가 수녀년의 대가리에 꽂힌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빛이 수녀년을 중심으로 폭사했다. 이전에 봤던 것보다도 훨씬 더 굵고 밝아진 빛의 기둥 속에 갇힌 ‘공포의 수녀’는, 시시각각 몸이 강제로 흩어지는 고통에 진정한 ‘공포’를 느끼며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온몸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절규하다가 끝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수녀년.
“…라엘라시여, 용서하소서.”
아니, 검게물들어버린 또 하나의 목걸이가 그 존재가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고 카야는 그걸 지긋이 바라보다가 부츠로 콱 밟아버렸다.
후우웅-
조금 전과는 다르게, 완전히 깨끗해진 철퇴를 휘두른 카야가 그 끝을 홀로 남은 기사놈에게 겨누었다.
“네놈에게는 ‘따스한’ 자애조차 아깝다.”
콰아아앙-!!
빛나는 철퇴가 기사놈의 검은 갑옷에 부딪치며 굉음을 냈다.
**
“불신, 자들… 원통, 하다…!”
“까고 있네. 얼른 뒤져.”
[제단의 수호기사가 죽었습니다.]
우린 결국 기사놈까지 죽이는데 성공했다. 제아무리 이중버프 때문에 강해졌다곤 해도, 우린 네 명이었다. 게다가 우린 이미 저놈이랑 예전에 한 번 싸워본 경험이 있었다.
[지독한 원한으로부터의 복수]
[제단의 수호기사를 감쌌던 모든 원한이 소모됩니다.]
[제단의 수호기사가 1의 체력을 회복하며 부활합니다.]
[모든 데미지 2 감소 상태가 해제됩니다.]
[매 공격이 최대데미지에 가까워지는 상태가 해제됩니다.]
[공격력이 3 증가합니다.]
[제단의 수호기사를 마지막으로 타격한 용사에게 두 배의 데미지(고정)를 되돌려줍니다.]
저 좆같은 기믹 때문에 셰이가 죽을 뻔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는데, 설마 그걸 잊어먹었을까. 저놈은 물론 그때 그놈과는 다른 개체겠지만, 우리 입장에선 저놈이 갈 땐 가더라도 한 명은 데려가려고 벼르고 있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유진이 2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보호막 남은 체력 6/8]
치열하게 싸우다 보니 저놈의 체력이 5 밑으로 떨어졌고, 그래서 어찌저찌 섬광탄 데미지로 죽여버릴 수 있었다.
‘이야, 너무 무서운데?’
정말로 원통해 뒤지겠어? 어? 섬광탄에 눈이 멀어서 뒤져버렸으니 말이야. 뭐? 이미 뒤졌다고? 하하. 어쩌라고.
1의 체력으로 부활한 기사놈이 최후의 공격을 퍼부었다. 과연 공격력이 추가로 증가한 상태라서 그런지 단박에 보호막을 깬 것도 모자라 내게 상당한 피해를 끼쳤지만….
“냉철한 관용으로 그댈 용서할지니, 다시 일어나소서.”
[관용의 빛]
[찬란한 기적!]
[세스티아가 유진의 체력을 34 회복했습니다.]
[남은 체력 17/17]
[눈부신 기적을 목도한 용사들의 마음에 용기가 들어섭니다.]
[카야 멘탈리티 +4]
[셰이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5]
[세스티아 멘탈리티 +4]
바로 그 다음 턴에 세스티아가 치유수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단일 타겟 힐링 스킬 ‘관용의 빛’, 그것도 기적(치명타)을 띄우며슈퍼오버힐을 쏟아부었고, 기사놈은 바로 이어진 카야의 철퇴에 완전히 죽음을 맞이했다. 체력 전원 풀피에 멘탈리티도 안전한 수준. 처음에 쫄렸던 거 치고 굉장히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건 어떻게 할 거예요, 대장님?”
잠깐의 휴식 이후, 지금까지 방과는 달리 조금 특별해보이는 여섯 번째 방을 각자조사한 다음 제단 근처에 다시 모였다. 분위기는 굉장히 꺼림칙했지만, 나중을 위해 대화는 식량을 까먹으면서 진행됐다.
“저걸 가지고 갈 이유도, 여유도 없으니 부숴버리는 게 맞겠지. 괜히 놔둬봐야 무슨 변수가 생기기라도 하면 분명 후회할 테니까.”
“평상시라면 저걸 연구용으로 하나 챙겨가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확실히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네요. 이대로 방치하는 게 껄끄럽다는 점도 동의해요.”
“좋아. 그럼 저거 부수고 5분 정도만 더 쉬었다가 바로 출발할 거야. 의견 있는 사람?”
“없어요.”
“좋아.”
털썩 주저앉은 셰이와 세스티아를 바라보다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제단을 향해 걸어갔다. 전투가 시작할때만 해도 검은 기운 때문에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던 게, 지금은 아주 미약한 기운만 남아있었다. 예전에 발견했던 제단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부수기 위해서 도끼를 집어든 찰나,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장.”
“카야? 쉬고 있지 왜?”
“제가 하겠습니다.”
“음, 굳이 네가 더 고생할 필요는 없는데.”
“제가 하게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그래. 알았어.”
도끼를 손에서 놓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고갤 돌려보니 셰이와 세스티아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애초에 카야가 이럴 것을 예상했던 것일까.
카야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차례 하더니 곧바로 제단을 향해철퇴를 내리쳤다. 제단은 단번에 박살났다.
“…라엘라시여. 당신의 하늘과 같이 넓고 따스한 품과 냉철하지만 바다처럼 깊은 관용심에 바라건대, 잠시나마 탈선했던 저들을 죽음 이후에나마 용서해주시기를. 그리고 그 용서해주신 만큼, 한때 자매였던 자들을 무자비하고 무관용의 자세로 징죄한 저를 언젠가 벌해주시기를 또 바랍니다.”
이후에 울려 퍼진 카야의 작은 기도소리가 박살난 제단 위를 맴돌며 짙은 여운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