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이단의 성녀, 금단의 수녀(5)
현장을 떠난 지는 좀 됐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벨9의 경험이 어디 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세스티아는 그 이후로 조용히 내 지시에 잘 따라주었고 레벨과 지위, 나이가 아득히 높다고 해서 카야와 셰이의 의견 또한 묵살하지 않고 경청했다.
“어머. 제 나이가 궁금하세요?”
“아뇨. 아,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세스티아는 액면가로는 20대 중후반정도 같긴 하지만, 지위나 강함이나 풍기는 분위기 등으로 봤을 땐 30 중반은 되어 보이니 대충 그렇다고 생각하고 넘겼다.
“세스티아 자매님.”
“네, 카야 자매님.”
“혹시 세스티아 자매님이라면, 타락해버린 이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진 않은지….”
“가능은 해요.”
“역시!”
“하지만 지금은 좀 힘들지 않을까요?”
“예?”
입구부터 쉴 새 없이 달린 탓에 잠시가지기로 한 소휴식시간에 카야와 세스티아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고작 네 명이에요. 용사대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빠져버리면 셰이 성전사님이 말씀하셨던 안전성이 줄어들잖아요?”
“그만큼 오래 걸리는 일입니까?”
“물론이죠. 쉽지 않아요. 얼마나 여신님의 길에서 멀리 벗어났냐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리 적게 잡아도 며칠은 걸릴 거고 때에 따라선 아예 되돌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다른 교단에는 회개 전담 인력을 추가로 배치하라고 했던 거구요.”
“결국 중앙 구역에 도달하는 각 교단 전력의 수는 엇비슷할 거라는 말씀입니까?”
“저희보단 많겠지만, 그럴 거예요. 별다른 변수가 없을 때 말이지만.”
“…알겠습니다. 휴식 시간에 괜한 말을 꺼내서 죄송합니다.”
“천만에요.”
저렇게 말하는 세스티아의 마음도 절대 편치 않을 것이다. 라엘라 교단 세일럼 지부의 두 수녀장 중 한 명인데, 휘하 수녀들 몇몇은 납치됐지 파견나간 전투단은 깜깜 무소식이지,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공포 숭배자들이 거한 사건을 일으키려 하지… 내가 만약 그녀였다면 초조함과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위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절대 티를 내지도 않고 오히려 카야를 위로해주었다. 그야말로 ‘언니’같은 모습이었지만….
‘안 돼. 마조 요부는 감당 안 돼….’
다시 한 번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여기서부터는 미확인 지역이야. 대형을 다시 바꿀게.”
내가 선두를 섰던 대형에서 셰이-카야-나-세스티아 순으로다시 바꾸었다. 벌써부터 클레이모어를 든 셰이의 손과 철퇴를 움켜쥔 카야의 손에 힘이 빡 들어간 게 보였다.
“대장. 4번째 방입니다.”
“그래. 열어.”
셰이가 한 팔로 힘차게 문을 밀었다. 여태까지의 문과 별 차이가 없던 문은 손쉽게 열렸지만, 방 안에서 나타난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정말, 어디까지 방해할 셈인지… 안 그래요?”
“맞습니다.”
[정예 괴물 <공포의 수녀>가 등장했습니다.]
[정예 괴물 <공포의 사제>가 등장했습니다.]
“설마….”
“타락한, 사제까지?”
이미 공포의 수녀를 세 번이나 본 카야와 셰이가 또 한 번 경악했다. 세스티아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듯 했으나 눈가가 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보자마자 타락했다니, 역시 지독한 독선 아닙니까? 하하.”
“지금, 당신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겁니까?”
“모르고 어떤 일을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습니다.”
단순한 1+1이 아니었다. 앞선 수녀들보다 훨씬 더 명료한 대화를 건네는 적이었다. 서로 제 할 말만 내뱉는 매크로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저 타락사제는 분명 카야의 질문에 제대로 받아쳤다. 그것도 비웃음 한가득 담아서.
“이 앞을 지나갈 순 없습니다라고 말해도, 여기까지 온 것 자체만으로 이미 의지가 확고해 보입니다.”
“불쌍한 불신자들.”
“숭고한 희생을 치르도록 할까요.”
[속도 체크]
셰이 : 3
카야 : 4
유진 : 7
세스티아 : 4
공포의 사제 : 3
공포의 수녀 : 4
[유진의 턴이 앞서게 됩니다.]
나 빼고 속도는 고만고만했다. 혹시 몰라서 스펙을 확인해봤더니 수녀는 앞선 수녀들과 동일했고 사제도 체력이랑 공격력이 약간 높은 걸 빼면 수녀와 별 다를 바 없었다.
타락한 게 수녀뿐만이 아니라는 것과 말하는 태도가 용사대의 멘탈을 건드렸지만, 선턴을 잡는 나는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진 않았다. 이제 와서 타락한 수녀가 하나가 나타나든, 둘이 나타나든, 수녀가 아니라 사제가 나타나든… 그냥 조져야 할 적이 하나 늘어났을 뿐이었다.
‘다른 입구에서 진입한 쪽은 어떻게든 제압하겠지. 하지만 이쪽은 아까 세스티아가 카야에게 말했듯 그럴 여유까진 없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똑같이 안식을 선사해주자. 겸사겸사 중앙 구역에 들어가기 전 세스티아의 스킬도 미리 시험해보고.
둘 중 누구부터 도끼를 휘둘러야하나 잠시 고민했던 나는 그나마 속도가 높은 쪽인 수녀를 먼저 타겟팅했다.
[대가리 분쇄]
[유진이 공포의 수녀에게 1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51/66]
“꺄아아아악!”
“안 돼!!”
“아으으… 아파, 아파!!”
지금까지 그랬듯, 타락한 수녀는 피를 뿜으며 비명을 질렀다. 허나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고 앞에 있던 타락한 사제가 자기가 공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한 외침을 질렀다.
씨발. 처음 겪는 것도 아닌데 입맛이 썼다.
[카야와 세스티아와 공포의 수녀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카야 : 4
세스티아 : 6
공포의 수녀 : 3
[세스티아의 턴이 카야와 공포의 수녀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카야의 턴이 공포의 수녀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너무나 처절한 외침에 카야와 셰이가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내가 지금 당장 어떻게 위로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은 굴림에서 둘 다 이겼다는 거에 집중했다. 굳은 얼굴의 세스티아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세스티아.”
“네.”
“영원한 안식을.”
“…네. 알겠어요.”
공격기가 상대적으로 적은 클래스인 치유 수녀가 극후반에도 장착할 만한 단 두 개의 공격 스킬 중 하나이자, 습득 조건과 사용 조건 페널티 이딴 거 무시하고 공격 효과만 본다면 가히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치유 수녀의 복합기.
영원한 안식. 이걸 세스티아가 익혔다고 말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내 명령을 받고 양 무릎을 꿇은 세스티아가 자신의 로자리오를 굳게 쥐며 엄숙한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전신에 옅은 녹색의 광채가 깃들었다. 인던에서 정예 괴물을 눈앞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잠깐이지만 라엘라 여신이 그녀의 몸을 빌어 강림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장엄하고 신성한 모습이었다.
[영원한 안식]
“Clemens benignitas et inexorabilis gratia-”
천천히 눈을 뜨며 일어난 그녀가 마침내 마지막 구절을 읊자 그녀의 몸에 깃들었던 녹색 광채가 피를 흘리고 있는 타락한 수녀에게 쏘아졌고….
“아, 아아아… 아아아아…!”
[세스티아가 공포의 수녀에게 1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8/66]
[공포의 수녀가 안식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세스티아가 공포의 수녀에게 2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2/66]
[공포의 수녀가 상태이상 ‘수면’(1턴)에 걸립니다.]
[공포의 수녀는 다음 턴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도중에 공격을 받으면 추가 데미지를 입으며 상태이상 ‘수면’이 해제됩니다.]
[세스티아가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립니다.]
[세스티아는 다음 턴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기본 데미지 한 번, 현재 깎인 체력만큼의 데미지를 다시 한 번 입히는 안식 데미지 한 번, 공격할 시 1회에 한해 추뎀을 선사하는 안식 전용 cc인 수면까지.
기본 데미지를 제외한 나머지 두 번은 모두 실패 확률이 존재하는 옵션이었지만, 이론상 반피만 깎으면 보스도 한 번에 골로 보낼 수도 있는… 원래라면 현 수준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살인기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습득 최소 레벨 7레벨. 세일럼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고, 던전 상점이나 비밀방에서만 정말 낮은 확률로 튀어나오는 스킬을….’
세스티아 누나. 정말 잘 나가던 치유 수녀였구나. 이 흉악한 스킬까지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동안 몸 근질근질한 거 어떻게 참았대? 애초에 이 누나급으로 4명 편성하면 던전은 진즉 파괴되고도 남지 않았을까 싶었다. 최고난도는 장담 못하겠지만.
뭐 어쨌든 애초부터 저 둘에게 우리가 질 확률은 0%에 가까웠지만, 방금의 압도적 퍼포먼스는 적들의 전의를 깎아먹은 듯 했다.
“카야.”
“….”
“카야!”
“예, 예! 대장!”
멍하니 세스티아를 바라보고 있던 카야에게 타락 수녀를 마무리 시켰다. 그러자 타락 수녀는 자기 턴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죽어버렸고, 타락 사제도 굴림에서 이긴 셰이에게 기절당한 뒤 곧 그녀의 뒤를 따랐다.
“후아… 앗.”
“세스티아!”
“아… 고마워요. 헨드릭님.”
처음 받았던 충격에 비해 싱겁게 끝나버린 전투 후, 영원한 안식을 사용한 후유증 때문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려는 세스티아를 부축해주었다. 그녀는 지독한 몸살이라도 앓는 것처럼 전신에서 땀을 흘리며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카야, 셰이. 물하고 수건 좀.”
“괜찮아요. 처음 겪는 일도 아니고, 조금 쉬다보면 괜찮아져요. 정말로요.”
“시험해봐서 미안.”
“네? 아아. 후후. 아니에요. 지시를 따르기로 약속했으니 마땅히 따라야죠?”
세스티아가 겪는 후유증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내가 더 롱 테러에서도 몇 번 본적 없던 스킬을 그녀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도 팩트였지만, 사실 그녀가 내 지시를 어디까지 따라줄 것인가를 테스트한 면이 더 컸다.
후유증이 남을 정도의 스킬을 처음부터 내 명령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엄청난 강적도 아닌 적에게?
그녀는 아주 살짝 망설이긴 했지만 반문하지 않고 내 명령을 따랐다. 그랬기에 나도 전투가 끝나자마자 사과를 건넨 것이었다. 이런 걸로 혹여나 나중에 앙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미리 해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후우, 오랜만에 사용했더니 조금 더 힘들긴 하네요.”
“조금 더 쉬어. 전투가 빨리 끝나서 괜찮아.”
“말씀은 고마워요. 그치만 제가 동행하자고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이러고 있을 순 없어요. 천천히라도 좋으니 안쪽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아. 물론 헨드릭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세스티아 자매님.”
“아아, 그럴 필요까진.”
“제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부디 사양치 마십시오.”
“으응, 그럴게요.”
왠지 모르게 날 힐끔거리며 아쉽다는 듯 말하는 세스티아와 그런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하는 카야.
[셰이 멘탈리티 –6]
[카야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5]
‘아니 왜!’
가만히 보고만 있던 셰이까지 은근슬쩍 자릴 바꿔 카야의 앞에 자리잡았다. 마치 나랑 세스티아를 갈라놓으려는 모양새였고, 졸지에 선두가 되었다.
‘아니 이렇게 대놓고 행동하면 세스티아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잖아 이 아가씨들아!’
넘어질 뻔한 거 받아주고 물 좀 먹이고 얼굴 좀 닦아줬을 뿐인데….
“저… 카야 자매님. 셰이 성전사님. 저 정말 괜찮아졌으니까 원래 자리로 돌아가셔도 괜찮아요. 헨드릭님이 많이 곤란하시는 거 같은데.”
째릿-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3]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