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스펙 업(9)
두근- 두근-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뜬 카야는 전신을 꽉 옭아매는 감각과 가슴과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흠칫 떨었다. 잠시 왜 그런가 생각했지만, 어제 오후부터 저녁도 거르고 계속됐던 격렬했던 행위들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자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품에 가둬 안고 있는 헨드릭의 팔과, 가슴을 쥐고 있는 손을 보고는 푸훗 웃고 말았다.
‘이게, 행복일까.’
이게, 사랑일까.
부끄러웠던 건 사실이다. 자세도 그렇고, 세 명이서 하는 것도 그렇고, 자신도 몰랐던 음란함이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지금도 부끄럽다. 체력이 회복된다고 가정하고 지금 또 할 수 있겠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망설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하기 싫냐고 또 묻는다면….
‘싫지, 않아.’
헨드릭이니까.
가만히 안겨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두근두근 평소보다 빨리 뛰어버리니까. 그와 관계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뭔가 이번 관계로 조금 더 깊은 관계로 접어들었다는 느낌이었으니까. 셰이랑도 급격히 가까워진 것 같고.
독점욕.
카야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욕심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숙한 곳에 꾹꾹 눌러놓았다. 쉽게 말해서 봉인해놓았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헨드릭의 행복을 위해 쉽게 드러나지 않도록.
어제 부로 자신뿐만 아니라 셰이도 정식으로 헨드릭의 여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일어나기 전 지금 이 순간은.
나 혼자 깨어있는 이 순간만큼은, 사소한 사욕정도는 챙겨도 되지 않을까.
카야는 뻐근한 몸을 좀 움직여 조심스럽게 헨드릭의 입술을 맛보았다.
‘…계속 하고 싶어.’
헨드릭의 말대로, 자신은 음란한 여자였나보다. 한 번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키스하려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어… 몸은 괜찮아요 언니?”
“….”
“계, 계속해도 괜찮아요.”
“못 본 걸로 해주십시오.”
“진짜 괜찮은데.”
카야는 뒤늦게 원위치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언제 깨어있었는지 모를 셰이가 헨드릭의 몸통 너머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예, 셰이.”
“고마워요.”
“…제가 뭘 한 건 딱히 없습니다.”
“언니는 정말 자애와 관용의 수녀님이었어요.”
셰이가 헨드릭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몸을 꿈틀거리자 키득 웃었다.
“이단을 향한 증오는 여전해요. 던전을 끝장내고 싶다는 목표도변함없고요. 하지만 예전엔 그 목표를 못 이루면 원통할 것 같다거나 증오를 발산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것에 딱히 무섭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어요.”
“또 하나의 목표.”
“죽지 않는 것. 끝까지, 무사히 함께하는 것. 그래서 마침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행복한 일상’이라는 걸 경험해보는 것.”
쪼옥-
셰이는 헨드릭의 어깨에 가볍게 입술 도장을 찍었다.
“대장님이라면, 그리고 언니랑 함께라면 가능할 거 같아요. 아니, 반드시 가능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잘할게요. 어제는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될 거예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건 그렇고… 언니.”
“예.”
“우리도 조금 더 가까워진 거 같은데… 말 편하게 할 생각 없어요?”
카야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워낙 오래된 말투라 당장 고치기는 쉽지 않…읏?!”
“햐악?!”
“흐음, 음, 쩝, 쩌업, 쩝.”
그녀들의 대화는 헨드릭의 못된 손짓에 중단됐다. 하지만 서로의 표정을 확인한 그녀들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대화는 나중에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 지금은 지금에 집중하자.
카야와 셰이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헨드릭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며 눈을 감았다.
**
‘천국인가.’
온몸이 뻐근했다. 특히 허리는 죽을 맛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진짜 죽겠다 싶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관계도]
카야 : 5
셰이 : 5
‘정말 순수하게 동료와의 호감도를 나타낸 건가?’
카야와 셰이와의 관계도가 맥스를 찍었다. 단순히 섹스 때문이 아니라, 그 전에 있었던 ‘너희 둘, 내 여자가 되어라.’ 때문이 아니었을까.
0이나 1이었을 때도, 4로 껑충 뛰었을 때도, 이제 5가 되고 나서도 이게 무슨 영향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었지만… 무의미한 것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의미 없는 것은 없었으니, 그저 앞으로 저 숫자가내려갈 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흣….”
갑자기 오른쪽 귀에 다이렉트로 꽂히는 꼴리는 신음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내게 가슴을 공격당하고 있는 회색 머리의 하프엘프가 제 다리를 나한테 얽은 채 몸을 부비적대고 있었다.
‘자고 있는 거 맞지?’
계속 만져도 질리지 않는 카야의 가슴을 계속 주물럭거리며, 그녀의 프로필을 띄웠다.
[카야Kaya]
종족/성별 : 하프엘프 여성
클래스 : 전투 수녀(Battle Vestal)
레벨 : 4
최대체력 : 16
공격력(2) : 7~13
방어력(1) : 6
속도 : 4(3+1)
기사회생/각성 : 11%
정찰확률 : 22%
긍정적 특징 : 기민한 몸놀림(속도+1)/냉철함(체력 50%이하 적에게 데미지+1)/공포를 극복한 자(모든 멘탈리티 하락속도 25% 감소)
부정적 특징 : 어둠 공포증(밝기 50% 이하에서 멘탈리티 하락속도 25% 증가)/집착(특정 대상에게 통제 불가능한 행동을 함)
‘허허.’
카야는 예상대로 4레벨이 되어 있었다. 전반적인 피지컬이역시 예상대로 상승했다. 주목할 건 이번에 붙은 특징들이었다.
‘공포를 극복한 자!’
멘탈리티와 관련된 것들 중에선 최상급 특징이었다. 어떤 조건도 없이 모든 멘탈리티의 감소폭을 25% 줄여준다는 것. 그것은 던전에서 자연적으로 깎이는 경우, 상자방에서 깎이는 경우, 괴물들의 멘탈리티 공격으로 인해 깎이는 경우, 동료가 치명타를 맞거나 잠식당한 것으로 깎이는 경우 모두를 포함했다.
안 그래도 외강내유 유리멘탈의 조짐이 있었던 카야에게 있어서 그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최적의 특징이었다.
‘잠식된 상태에서 보스를 때려잡은 게 컸나?’
잘 모르겠다. 근거가 여러 가지라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뭐, 이미 특징이 붙은 이상 그냥 감사합니다 라엘라님 하면서 절하면 될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라엘라님한테 기부금 낸다고 했었는데.’
오늘은 깜빡 잊지 말고 수도원에 들르기로 하자. 카야와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근데 집착이라….’
묘했다. 카야가 잠식되고 얻은 정신이상도 집착이었다. 근데 이게 부정적 특징으로 박혀버렸다는 건, 정말로 집착이라는 게 카야의 깊은 내면에서 끌려나온 모습일 수 있었다. 어제 보였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땐 또 집착이랑은 거리가 멀어보였지만….
예측 불가능한 특징이라서 내가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흐응~”
그리고 그 때, 이번엔 왼쪽에서 셰이가 요망한 콧소리를 내며 입을 오물거렸다. 타이밍이 타이밍이다보니, 마치 자기 프로필도 빨리 확인해달라고 조르는 것 같았다.
귀여워, 셰이 귀여워.
나는 그녀의 가슴 말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프로필도 재빨리 확인했다.
[셰이Shae]
종족/성별 : 인간 여성
클래스 : 성전사(Crusader)
레벨 : 4
최대체력 : 20
공격력(1) : 5~11
방어력(1) : 8(7+1)
속도 : 4(3+1)
기사회생/각성 : 13%
정찰확률 : 24%
긍정적 특징 : 천재(모든 수치+10%, 최소 1)/굳건함(방어력+1)/필사적임(확률적으로 사경 무시)
부정적 특징 : 발작(낮은 확률로 멘탈리티 하락)/의존(멘탈리티 -50 미만일 때 속도-1)
“홀-리 쉐엣.”
셰이의 새로 붙은 특징을 확인한 순간, 모든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카야랑 셰이가 손 가만히 놔두고 뭐하냐는 듯 몸을 더 바짝 붙여대고 나서야 다시금 못된 손을 움직였지만, 두근대는 심장만큼은 제어하지 못했다.
필사적임(확률적으로 사경 무시) 특징.
이건 사실 어떤 클래스에게 붙어도 딱히 손해는 아니다 정도의, 그냥 그런 특징에 불과했다. 전투에 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사경 무시라는 게 확정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들의 공격을 가장 많이 맞아야 하는 1열 탱커에게 붙는다면?
‘그리고 그 모든 걸 떠나서, 셰이는 게임속 데이터 쪼가리가 아니야.’
수틀리면 다른 용사로 쉽게 대체하고, 빡치면 종료한 다음 새 게임을 시작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셰이에게 붙은 ‘필사적임’ 특징은 카야에게 붙은 ‘공포를 극복한 자’와 더불어 일종의 보험장치를 장착한 셈이었다.
의존이라는 부정적 특징이 좀 거슬리긴 하지만, 어차피 셰이의 속도는 낮은 편이기도 했고부조리한 저항의 신념 아티팩트를 착용한다고 가정하면 어차피 낮아질 속도, 그렇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됐다 됐어. 셰이도 다행히 4렙이고, 특징도 잘 붙었어.’
셰이의 장비부터 업그레이드? 아니면 카야부터? 보상으로 얻은 랜덤 스킬북 두 권은 누구한테 주지?
금세 행복한 상상에 잠겼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행복한 감촉과 함께 행복함은 제곱이 되었다.
**
좋은 아침, 이라고 말하기에는 이미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귀환 직후 기절하듯 잠자다 일어난 것도 아니고, 스스로의 의지로 이렇게 대놓고 게으름을 부리는 건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먼저드십시오.”
“이것도 드세요!”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1층에서 가져온 점심(아침)을 먹었다. 어제의 여파가 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어색한 기운이 있었으나, 확실히 그 이전보다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빵을 수프에 찍어먹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했다.
“일단, 다시 한 번 축하하자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고, 일부분이지만 던전을 격파했고, 수준도 대폭 올랐어. 용사로 활동한시간도 짧고 당연히 용사대의 역사도 짧지만, 만일 누군가 우리의 업적을 알게 된다면 그 누구도 우릴 초보 용사라고 무시하지 못할 거야.”
“무시하든 말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제겐 용사대의 안전과 이익과 실제 업적이 중요할 뿐입니다.”
“맞아요. 감히 유스티티아님과 라엘라님의 딸들을 모욕할 게 아니라면 말이죠?”
자존감이 채워진 그녀들은 당당히 고기를 집어먹었다. 보기 좋은 변화였다. 둘 다 입에 부스러기를 묻힌 것도 귀여웠고. 피식 웃으며 떼어내자 말없이 얼굴을 붉히는 건 더 귀여웠다.
“그래. 그냥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말이었어. 그리고 그 자부심으로 끝날 게 아니라, 아까도 말했듯 우리가 돌파한 구역은 이제 일부분일 뿐이니까. 더 힘내보자는 의미도 있고. 무슨 말인지 알지?”
“예. 대장.”
“그런 의미에서.”
깔끔하게 비워진 그릇을 치우고 그 자리에 적응형 랜덤 스킬북 두 권을 올려놓았다.
“이건.”
“스킬북…?”
“맞아. 개봉한 사람의 클래스에 맞춰서 임의의 스킬이 튀어나오는 스킬북이지. 카야가 열면 전투 수녀 스킬이, 셰이가 열면 성전사 스킬 중 하나가 나올 거야. 뭐가 나올진 나도 모르고.”
쉽게 말해서, 이것도 복불복이었다. 정말 재수 없으면 별거 아닌 기본 스킬이 중복으로 뜰 수도 있었고, 잭팟 터지면 카야의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정도의 종결급 스킬이 뜰 수도 있었다.
나는 고민 끝에 카야에게 하나, 셰이에게 하나 내밀었다.
“이건, 이런 물건은 제가 받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저는 운이 안 좋은 편입니다. 차라리 대장이나 셰이가….”
“임의의 스킬이라니, 까딱 잘못하다간 돈만 날리는 거 아니에요? 게다가 용사대 전체가 같이 싸워서 얻은 건데, 대장님만 제외된다니 그건 싫어요.”
하지만 카야와 셰이는 일말의 여지없이 스킬북을 도로 밀어냈다. 아쉬움도 없어보였다.
허어?
“고민의 결과야. 내가 까는 것보단 너희가 까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저를 제외하고 대장과 셰이가 개봉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 대장님이랑 카야 언니가 열었으면 좋겠는데요?”
“제가 열면 스킬북이 쓰레기가 될 겁니다. 차라리 팔면 팔았지 전 안 여는 게 맞습니다.”
“전 지금 가진 스킬들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니, 이 여자들이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