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스펙 업(3)
“언니. 카야 언니. 어디부터 갈 거예요?”
“대장이 말씀하신 대로 용사훈련소부터 들려서 수준을 갱신한 다음, 수도원에 들릴 생각입니다.”
“그 다음엔요?”
“그 다음?”
카야는 셰이의 손에 잡힌 왼손을 어색하게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에이, 대장님이 개인 시간 가지라고 용돈도 푸짐하게 줬는데 딱 용무만 보고 돌아갈 생각이에요? 힘들게 살아 돌아왔는데?”
“셰이가 그렇게 말해도, 딱히 뭔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뭔가 사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무구를 정비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대장이 공용 자금에서 해결하신다기에….”
“에휴….”
셰이는 잡던 손을 놓고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표정이나 몸짓이 묘하게 약올랐다. 그러면서도 대놓고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보니 일부러 그걸 의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키는 자신보다 살짝 더 컸지만, 마치 어린 아이에게 놀림 받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셰이는, 뭘 하려고 했습니까.”
“맛있는 것! 예쁜 것! 그리고 멋있는 것!”
“예?”
“예라뇨? 떠올려보세요. 던전 내에서 우린 뭘 먹었죠?”
“그야 따뜻한 물에 녹인 고형 수프랑 건조 식량….”
“우린 뭘 입었죠?”
“당연히 갑옷이랑….”
“대장님은 뭘 입었죠?”
“셰이.”
“언니. 던전에서 겨우 살아온 우리는, 건조식량 대신 맛있는 걸 먹고 갑옷 대신 예쁜 옷을 입을 의무가 있어요. 이건 그러기 위한 돈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런 의무는 없습니다, 셰이.”
“그리고 대장님도 멋있는 옷을 입고요!”
흠칫-
앞으론 셰이의 말을 적당히 걸러들으며 용사훈련소에 가려고 했던 카야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 모습을 본 셰이의 미소가 짙어졌다.
“우린 성전사와 전투 수녀, 대장님은 현상금 사냥꾼이었죠. 직업 자체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는데, 각자의 사정조차도 평범하진 않은 거 같고요.”
“…저나 셰이는 그렇다 하더라도, 대장도?”
카야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헨드릭의 비밀을 셰이가 알고 있나 싶었다. 그러자 순간 초조함과 질투심 사이의 감정이 솟았으나 빠르게 가라앉혔다. 상대는 함께 사선을 넘나든 셰이였다. 그리고 같은 용사대의 동료였다.
‘게다가… 엄밀히 말해서 대장과 난 사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헨드릭이 자신을 첫 여자라고는 말했지만, 그게 곧 특별한 관계로 이어진다는 생각은 안 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그런 사적인 것은 헨드릭의 운명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게 굴레를 씌워 부담주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셰이만 해도 던전에서, 그렇고 그런….
“딱 봐도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잖아요? 대장님이 싸울 때 모습을 봤다면 언니도 알아차렸을 텐데요? 도끼나 밧줄을 쥔 자세는 그럴 듯 해보여도, 그걸 휘두르는 건 아무리 잘 봐줘도 현상금 사냥꾼이라고칭할 실력은 안 된다는 거. 근데 우리들 중 그 누구보다도 그 더러운 이단숭배자놈들의 머리를잘 깨부수는 건 대장님이라는 거.”
카야는 부정하지 못했다. 특히나 자신은셰이가 없을 때도 헨드릭과 본 던전에 한 번, 그리고 켕기는 게 있어보였던 의뢰 때문에던전 밖 이단의 영역에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그땐 지금보다 도끼질이 더 서툴렀었다. 그래서 셰이가 말하는 간극이 더 컸었고.
“함부로 추측하긴조심스럽지만, 제가 생각하는 건 이래요.”
“뭡니까.”
“대장님은 과거에 그 쓰레기만도 못한 놈들에게 깊은 원한이 있는 거죠. 그래서 그나마 평범한 사람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현상금 사냥꾼의 자격으로 세일럼에서 용사가 된 게 아닐까 싶어요. 도끼로 사람, 아니 사람을 닮은 괴물새끼들의 머리를 작살내는 건… 숙련도보단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헨드릭이 들었다면 그런 거 아냐 셰이야라고 말했겠지만 그는 이 자리에 없었다. 카야에겐 셰이의 추측이 그럴싸하게 들렸다.
지금 카야의 머릿속에선 던전을 끝까지 돌파하는 것이 자신이 처음으로 인정한운명이라고 말하던 그의 모습과 셰이의 추측이 묘하게 겹쳐보였다.
“대장….”
“그러니까! 대장도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맛있는 것! 그리고 멋있는 것! 무기도 손질한답시고 너무 두드리기만 하면 그 이후에 얼마 못 버티고 부러져버리잖아요.”
“그럼 대장의 옷을.”
“그리고 대장과 늘 함께하는 우리들도 예쁜 걸 입을 필요가 있어요! 쉴 땐 다 같이 쉬어야죠. 안 그래요? 대장은 쉬고 싶었는데 언니랑 제가 중갑 입고 무게 잡고 있어봐요. 대장이 편히 쉴 수 있겠어요? 언니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죠? 아닌 거 같죠?”
“그건.”
“그러니까 이건 우릴 위해서, 그리고 대장을 위해서예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아시죠 언니?”
“대장을 위해서….”
카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셰이가 환하게 웃으며 카야의 손을 다시 잡고 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단 용사훈련소부터…!”
“그럼요. 언니는 세일럼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 이쪽으로 가도 용사훈련소로 갈 수 있어요.”
“그, 그렇습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언니는 저만믿고 따라와주세요!”
카야는셰이의 웃음에 아주 조금이지만 미소를 지었다.그 미소는 굉장히 어색했지만, 셰이의 얼굴에 핀 웃음꽃이더 활짝 피었다.
‘카야 언니는, 정말로 대장님 생각만 하는구나.’
나도 그런데.
**
셰이는 용사훈련소를 먼저 가야한다고 주장하던 카야를 은근슬쩍 구슬려 옷가게들이 위치한 골목으로 이끌었다.
“셰이. 말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응? 언니, 전 거짓말 한 적 없어요? 이쪽으로 쭉 가면 용사훈련소가 나온다는 건 진짠걸요.”
“셰이…!”
“그러지 말구,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니까 기왕이면 예쁜 거 입고 가면 더 좋잖아요?”
“그거랑 이거랑은.”
“동선 상으로도 이쪽이 더 절약된단 말이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왔다갔다할 거예요? 수도원도 들린다면서?”
카야는 자신이 셰이의 계략에 넘어갔음을 인정했다. 그녀는 짧은 한숨으로 묵인을표했다.
“어서 오세요! 어? 셰이?”
“오랜만이에요, 아줌마!”
“그러게, 엄청 오랜만이다 얘.”
셰이는 옷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과 살갑게 대화했다. 셰이가 원래 사교성이 뛰어나긴 했지만, 대화를 들어보면 이곳에서 옷을 여러 번 구매했던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요즘 발걸음이 뜸해지던데, 많이바빠졌나보네?”
“네! 좋은 용사대를 찾았거든요.”
“아아~ 그럼 옆엔 동료 용사님?”
“그럼요. 좋은 언니에요! 훌륭한 용사님이고요!”
“어머나-”
서로 소개도 하지 않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가게 주인은 카야의 신체 사이즈들을 재고 있었다.
“어어….”
“그냥 예쁘기만 해서는 안 예뻐요. 신체랑 잘 맞아떨어져야 진짜 예쁜 거예요.”
“그럼그럼~ 어쩜, 용사님 비율이 너무 좋으시다~”
“그렇죠? 제가 봐도 너무 깨끗하고 부러운 몸매더라구요… 헤헤.”
카야는 정신이 없었다. 옷을산다는 뜻은 당연히 사전적 의미로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로 사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계실 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선 옷은커녕 끼니 걱정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교단에 속하게 된 이후로는 교단에서 지급하는 수녀복과 전투용 중갑만 입었고.
“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다 필요한 일이니, 전문가의 손에 맡겨보세요. 이단 섬멸은 저희 같은전투 성직자에게, 옷은 재단사에게.”
옷을 산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했다. 단순히 적당한 옷을고르면 되는 거라 생각했던 카야였지만, 이왕 예뻐지기로 했으면 아주 예뻐져야 한다며 셰이가 타협을 불허했다. 그 말을 하던 셰이가 매우 진지해보여서, 카야는 말을 아꼈다.
“한 시간, 아니 한 시간 반 이따가 다시 들러줘~”
“네 아줌마!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럼! 오랜만에 와줬는데, 힘 바짝 줘볼게?”
셰이는 멍하니 서 있던 카야를 끌고 나왔다.
“아깐 이쁜 거 입고 가면 좋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셰이.”
“에이 그거야 뭐,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이쁘게 보이는 게 중요한가요? 가장 중요한 사람한테 이쁘게 보이는 게 중요하지. 안 그래요?”
“….”
“자. 용사훈련소랑 수도원은 얼른 갔다 오죠?”
이쯤 되니 카야는 셰이가 주도하는 흐름에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이미 여기까지 와서 빠져나가는 건 의미가 퇴색되기도 하고,옷값으로 돈도 상당히 지불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 이 시간이 그렇게까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카야를 교단으로 인도한 수녀는 돌아가신 엄마까지는 아니었지만 의지할 수 있는 첫 어른이었고, 헨드릭은 몸과 마음을 다 준 첫 남자였다. 그리고 셰이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어서 정의내리기 조심스러웠지만, 이게 말로만 들었던 친구인가 싶었다.
‘친구….’
카야는 고개를 저었다. 헨드릭에게도 그렇듯, 셰이에게도 굴레를 씌우기 싫었다. 동료들끼리 친해져서 나쁠 건 없었지만, 사사로운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망설여졌다. 평생 처음으로 맛본 긍정적 관심에, 몸과 마음이 해이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여전히 모자란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연인이나 친구가 되기엔, 자신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여러 모로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반면 바로 옆에 있는, 자신보다 훨씬 아름답고 뛰어난 동료는 어떤가. 하나하나 직접적으로 비교하면 자신만더 우울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알지만서도.
헨드릭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 그에게 좋은 모습을,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아주 가끔씩은 그에게 안기며 칭찬을 듣고 싶었다.
“언니.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어서 와요!”
“…예. 셰이.”
카야는 복잡한 마음을 갈무리하며 저만치 앞서나갔던 셰이를 따라갔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흘러갈지니.
**
“어서 오십시오, 용사님. 무슨 용무로 오셨습니까?”
“아, 장비의 위력을 올리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건 클래스마다 조금씩 다르고 현 수준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조건을 말씀해보시겠습니까?”
‘뭐? 클래스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나는 장비지원소와 용사훈련소 중에서 장비지원소에 먼저 들렸다. 장비와 스킬, 둘 중 어느 것을 먼저 업그레이드 해야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백 중 구십팔 정도는 장비 쪽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비지원소를 먼저 온 것이었는데, 처음 듣게 된 사실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더 롱 테러에서 장비 업그레이드 비용은 클래스와 무관했다.
‘물론 지금까지 더 롱 테러랑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었다지만.’
“그럼, 그 일단은 성전사하고 전투 수녀의 갑옷은 어떻습니까? 둘 다 수준은 1입니다.”
“흐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왠지 모르게 ‘중갑’을 입는 성전사와 전투 수녀의 업그레이드 비용이 게임에서의 비용보다 높을 것 같다는 건, 전혀 근거 없는 망상은 아니겠지.
제발 망상이어라. 제발.
‘다른 건 몰라도 셰이의 방어구는 업글 1순위란 말이다…!’
잠시 서랍을 뒤적거리던 직원이 카탈로그를 꺼냈다. 몇 번 뒤적거리던 그는 곧 검지로 종이를 훑더니 뒤집어 내게 보여주었다.
“여길 보십시오. 우선 성전사의 갑옷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수준이 1이라고 하셨으니, 1에서 2로 올리는 데는 15금화가 필요합니다. 2에서 3으로 올리는 데는 30금화가 필요하고요.”
“…아.”
“그리고 어디 보자… 아. 전투 수녀의 경우엔 1에서 2로 올리는데 13금화, 2에서 3으로 올리는데 26금화가 필요합니다.”
“호, 혹시. 현상금 사냥꾼은 얼맙니까?”
“현상금 사냥꾼은.”
팔랑팔랑- 훨씬 앞쪽으로 종이를 넘기던 직원의 손가락이멈췄다.
“1에서 2로 올리는데 8금화, 2에서 3으로 올리는 데는 16금화입니다.”
“….”
“혹시 다른 정보가 필요하십니까? 만약 맡길 생각이시면 수준에 따라 소요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나,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씨-발, 클래스별 차등 가격이고 뭐고.
‘난이도 보정 씨발아!!! 이게 게임이냐!!!’
그냥 기본 가격 자체가 존나 비쌌다.
‘그래도, 일단은 용사훈련소에도 가보긴 가봐야겠지…?’
어, 어쩌면 아티팩트를 팔아야 할지도…?
용사훈련소로 향하는 내발걸음은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