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귀환
‘씨바알… 정신만 아프던 게, 육체도 아프니 아픈 게 더블이야….’
사경을 한 번 겪어봤다고 이번에 더 빨리 깨어났다든가 하는 건 없었다. 겪어봤다고 해봐야 기껏해야 한 번, 이번까지 두 번이지 않나. 어찌됐든 사경에서 벗어나니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차디찬 던전 바닥에 쓰러져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뒤통수만은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거지?
눈곱이랑 딱지가 한가득 꼈는지 뻑뻑한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피에 젖은 회색 머리칼이었다.
수직 방향으로 보이는 회색 머리. 뒤통수엔 부드러운 느낌.
“카, 야….”
대답은 없었다. 허나 온기는 있었고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눈을 뜨는 것조차도 힘들었으니, 몸을 일으키는 데는 한세월이 걸렸다. 온몸의 뼈와 근육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지만, 희한하게도 불안하진 않았다.
나, 안 죽었고. 카야도, 안 죽었고.
‘셰이, 셰이는.’
우드득 소리가 나는 걸 무시하며 고갤 돌렸다.
“하아아….”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피로 물든 황금빛 머리통이 카야의 왼쪽 허벅지에 뉘여 있었다. 등짝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걸 봐서 셰이도 살아있는 모양이었고.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카야가, 해냈구나.’
원했던 타이밍보다도 늦게 빠져나왔지만, 전원 생존해 있는 걸 보니 정황상 카야가 막타를 먹이고 바닥에 쓰러져있던 우리에게 무릎베개 해준 다음 기절한 듯 보였다.
‘자기도 죽을 만큼 힘들었을 텐데, 그 와중에 정신 차리고 기어코 막타 친 다음 우리까지 챙겼네….’
오오, 킹갓엠페러마제스티카야느님이시여.
나는 조심스럽게 셰이의 머리를 내 왼쪽 허벅지에, 불편한 자세에서 기절한 카야를 내 오른쪽 허벅지에 눕혔다.
카야의 눈꺼풀에 말라붙은 핏가루와 얼굴의 반 이상을 뒤덮은 핏자국들을 쓸어내렸다. 표정은 평안한 걸 보니, 다행히 악몽은 안 꾸는 모양이었다. 양손으로 카야와 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투 메시지를 확인했다.
[유진이 사경에 들어섰습니다.]
[불굴의 정신이 꺾입니다.]
[정신이상 ‘불굴’의모든 효과가 사라집니다.]
[모든 능력치가 33% 감소합니다.]
[사경에 들어선 상태에서 데미지를 받으면 유진은 사망합니다.]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에 용사들의 희망이 꺾인 자리에 공포가 자리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 33]
[카야 멘탈리티 – 33]
‘멘탈리티 –33 실화냐.’
각각 ‘무기력’ 디버프와 ‘어둠 공포증’ 때문에 동료들의 멘탈리티가 무지막지하게 깎여나갔고.
[밝기 : 0]
[빛이 완전히 꺼집니다. 공포와 어둠이 던전을 완전히 잠식합니다.]
[용사들의 전의가 더 빠르게 상실됩니다.]
[괴물들에게 공포의 힘이 더 깃들게 됩니다.]
기절하면서 마법횃불이 완전히 꺼지자 용사대엔 디버프가, 괴물 측에겐 버프가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공포가 가득찹니다.]
[셰이 멘탈리티 –6]
[카야 멘탈리티 –6]
[유진 멘탈리티 –5]
중간에 어둠 페널티로 멘탈리티가 한 번 더 까인 것 같고.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카야가 공포의 손에게 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99]
[공포의 손이 죽었습니다.]
예상대로 카야가 철퇴로 놈의 머리를 박살낸 것 같다.
스르륵- 스르륵-
피가 잔뜩 엉겨 떡진 머리였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 쓰다듬었다. 내가 지금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고맙다, 미안하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나는, 설레는 마음을 품고 다음 메시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더 롱 테러 최고난도 ‘가장 기나긴 공포’의 던전 제 1구역을 클리어했습니다.]
메시지가 1구역의 클리어를 확정했고.
[용사대 HAT는 원하는 경우, 1구역을 거치지 않고 바로 2구역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더 롱 테러에선 당연했던 걸, 혹시나 여기선 아니라고 할까봐 조마조마했던 메시지를 넘기며.
[보상 : 33금화, 부조리한 저항의 신념, 귀환석, 적응형 랜덤 스킬북]
‘오. 오오오!’
크리스마스 선물을 하나씩 까보는 어린아이처럼, 보상이 적힌 메시지들을 하나씩 음미했다. 제일 먼저 1-10, 공포의 손을 잡고 얻은 보상은 합격점이었다.
[1구역 클리어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66금화, 황금만세]
1-10 금화 보상의 2배에 해당하는 금화와, 쓸 만한 아티팩트까지.
여기까지만해도, 더 롱 테러 기준으로대박에 가까운 수준의 보상이었다.
허나.
아직 한 발, 아니 아직 하나 더 남았다.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노 데스 클리어 보너스.
클리어하기 무척이나 좆같았던 만큼, 클리어했을 때의 보상이 무척이나 달콤해서, 그 맛을 못 잊어서 더 롱 테러를 못 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과연?
[보상 : 99금화, 적응형 랜덤 스킬북, 불굴의 깃발, 어둠의 통로]
“홀-리….”
198금화, 랜덤 스킬북 2권, 아티팩트 3개에 알 수는 없지만 급수 높은 소모품까지.
“하하하… 하하하하하! 쿨럭! 푸흐흐하하하!!!”
웃다가 사레 들려 갈비뼈가 탭댄스를 추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을 쳤지만, 그럼에도 웃음이 나왔다.
‘후우, 이제 이 좆같은 곳에서 나갈 시간이다. 드디어!’
손을 뻗어 가방에서 귀환석을 찾은 다음, 카야와 셰이가 내 몸에 붙어있는 걸 확인하고 외쳤다.
“세일럼으로!”
**
“왜 그렇게 죽상이야?”
“어휴, 그쪽은 소식 못 들었어?”
“소식? 뭔 소식.”
“요즘 길드가 또 가격 후려칠 기미가 보이드라고.”
“뭐? 또? 뭐 얼마나?”
“그냥 전체적으로 다. 이제초입만 왔다갔다해서는 남는 게 진짜 없을 거 같더라고.”
“씨발새끼들이, 지금도 그렇게 떼먹고선 더 떼먹겠다고? 벼룩에 간을 빼먹는 돼지새끼들이구만 아주!”
“우릴 아주 그냥 좆으로 보는거지. 느그들 말고도 재료수급해줄 놈들 많고, 물건 사줄 놈도 많다~ 이거야. 세일럼 밖에서는 안쪽 사정이 이런지는 모르고, 아직도 한탕 대박의 도시로 알고 있으니. 우리 같은 하루살이놈들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고. 그럼 길드놈들이 또 떼먹는 비율을 높이고. 악순환이야 아주.”
“씨발 진지하게 은퇴를고민할 때가 왔나….”
“은퇴? 아서라 아서. 아예 다른 도시로 뜰 거면 모를까, 여기서 은퇴하면 더 비참해지는 걸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어어?”
“또 뭐야?”
“사람! 어서 사람 불러와!”
“갑자기 뭔 호들갑… 허미 씨발!”
여느 하루살이들이 그러하듯, 세일럼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길드를 씹어대던 두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피투성이 세 남녀를 보고 기함했다.
“이보게! 이봐! 정신 차려!”
“으으….”
“살아있구만! 살아있어!”
“여긴….”
“세일럼이지 어딘가! 엄청 위험한 곳까지 들어갔다가 겨우 빠져나왔나보구만. 내 지인이 사람 부르러 갔으니, 길바닥에서 입 돌아갈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고맙….”
“아! 혹시 전에 묵었던 여관이라도 있나? 그럼 그쪽에도 데려다줄 수도 있는데.”
“용사의, 요람….”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구만. 푹 쉬고, 나중에 성에서 사람 나왔을 때 도와준 사람이 누구냐고 묻거든 아케르만이라고 꼭 좀 얘기해달라고!”
겨우 대답하던 피투성이 남자가고개를 푹 떨궜다. 곧 네 명의 남자가 세 남녀를 업고 한 여관으로 향했다.
**
“끄으으….”
낯설…지 않은 천장이었다. 피부와 갑옷에서는 악취가, 몸 안에서는 고통 그리고 엄청난 메스꺼움이 공존했다.
“우웁.”
헛구역질이 나왔다. 먹은 게 많았다면 됫박 토했을 정도로 심한 멀미였다.
‘빌어먹을 귀환석. 곱게 돌려보내주면 좀 좋아?’
기분 좋게 ‘세일럼으로!’라고 외치자마자, 빈속에 깡으로 소주 밀어넣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을 받을 줄이야. 가뜩이나 몸상태도 거지같은데 말이야.
속편하게 기절하고 싶었지만, 그럼 귀환하자마자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의식을 유지했었는데 누군진 몰라도 마음씨 좋은 사람들 덕분에 전에 묵었던 여관에 도착한 듯 했다.
‘성에서 사람 나왔을 때, 아케르만이라고 했었나?’
다시 떠올려보니 뭔가의 보상을 바라고 했던 행동 같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누구 하나 잘못된 것도 없고, 짐도 안 털렸으니까. 살인적인 물가와 삭막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자랑하는 세일럼에서, 그 정도면 굉장히 착한 사람인 거 같았다.
‘우선, 씻자.’
생각을 정리하려 해도 계속 올라오는 악취에 계속 토악질이 나오려했다. 몸은 제발 좀 자라고 소리지르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고생하더라도 깨끗한 상태에서개운하게 자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는데, 나보다 더 심각한 상태인 동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 같이 개고생했는데, 나만 편하게 쉴 순 없지.’
다시 좀비 같은 발걸음으로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겨우 여관방 끝에서 끝까지 가는데도 1분이 넘게 걸렸다. 후들후들 떨리는 팔다리로, 일단 갑옷을 입은 채 불편하게 누워있던 카야와 셰이의 갑옷을 벗겨주었다. 굉장히 지난한 작업이었다.
‘크읍!’
그러자 짙은 피냄새와 땀냄새가 훅 올라왔다. 갑옷 속에 입었던 옷이 아예 붉은색으로 물들은 수준이었다. 이번엔 과장 한 번 안 보태고, 살짝 올라왔다. 그리고 기절할 뻔했다.
‘안 되겠다. 저대로 놔둘 순 없겠어.’
욕실은 좁았지만, 어쩌겠는가. 내 몸 가누는 것도 힘들지만, 어떻게든 씻으면서 씻겨주는 수밖에.
피에 질척해져서 괜히 더 벗기 어려운 옷들을 싹 벗겼다. 그리고는 한 명씩 안아서 욕실 벽에 기대게 한 다음, 온수를 틀었다.
쏴아아아-
“흐아….”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흐물흐물해져서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씻어도 씻어도 계속 나오는 핏물과, 동료들의 피로 물든 몸을 보고 간신히 의식을 유지했다. 그녀들의 몸은 아름다웠지만, 흥분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체력도 없었다.
대충 몸을 씻어낸 나는 전신에 흉터가 가득한 셰이를 먼저 씻기며,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메시지를 띄웠다.
[부조리한 저항의 신념]
- 적용 대상 : 중갑기사, 수호자, 성전사
- 방어력 1 증가
- 인간형 괴물을 상대로 방어력 1 증가
- 피치명타 데미지 1 감소
- 각성 확률 소폭 증가
- 속도 1 감소
“어차피 아티팩트 공간도 넘쳐나는 상황에서, 부저신 정도면 절하고 먹어야지.”
집중해서 보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셰이의 가슴을 계속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황급히 다른 곳에 거품을 묻히며 다른 아티팩트를 확인했다. 안 돼! 눈이 감기고 있어!
[황금만세]
- 적용 대상 : 현상금 사냥꾼, 약탈자, 보물 사냥꾼, 암살자, 던전상인
- 방 클리어 할 때마다 금화 1 획득
- 정예 괴물 처치시 금화 1 추가 획득
- 보스 괴물 처치시 금화 4 추가 획득
- 아티팩트를 대가로 던전 내 상점에서 가격을 할인받을 수 있음
1구역 클리어로 받은 아티팩트 ‘황금만세’. 이건 돈벌이용 아티팩트였다. 조합에 따라 무쓸모일수도, 소소한 용돈벌이용일 수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도 있는 물건이었는데 돈은 다다익선.
절대 나쁘지 않은 아티팩트였다. 만약 최초의 생각대로 제4의 멤버를 보물 사냥꾼으로 정한다면, 아티팩트의 효과는 2배로 보게 되니 이것도 꽤나 짭짤하겠지. 그걸 제외하고서라도 상점의 가격을 한 번 후려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으쌰…!”
겨우 다 씻긴 셰이를 닦아준 다음,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속옷이랑 평상복도 입혀주고 싶었지만….
‘아직 카야도 남아서 말이야. 미안 셰이.’
생각보다 무게가 나가는 셰이를 옮기고 나자, 겨우 쥐어짜낸 마지막 체력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욕실에 돌아오자마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안 돼… 카야까지 씻겨야 하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인 사경을 두 번이나 겪고, 귀환석의 멀미까지 감당한 몸은 더 이상의 활동을 거부했다.
쏴아아-
‘카야만큼은, 찬바닥은 안 돼!’
쓰러지기 직전, 온수가 쏟아지는 방향을 간신히 카야 쪽으로 바꾸자마자 털썩 엎어졌다.
‘미안, 카야.’
하필이면 엎어진 게, 그녀의 허벅지 안쪽임을 마음속으로 사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