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1구역(2트)(29)
‘아….’
아파서 기절하는 건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늘 아팠고, 늘 새로웠다.
‘씨발.’
쌍욕이 아주 입에 달라붙었다. 원래도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던전에 들어오면서 그 짧은 기간에 습관이 되어버렸다. 게임으로도 빡쳤는데, 실제로 겪으니까 얼마나 더 빡치겠는가.
아님 말고.
‘그나저나 지금 상태는 또 뭘까….’
일단 다시 한 번 사경에 빠진 건 확실했다. 1뎀 차이로 못 죽이고현타 개씨게 와서 멍 때리다가 보스놈 손에 잡히는 것까진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확정적으로 각성도 풀렸겠고, 사경 디버프도 걸렸겠고, 툭 건들면 뒤질 상태겠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다행히도 저놈이 날 공격해줘서. 처음에 낙인을 나한테 찍어줘서. 보스놈 바로전턴이 나라서, 그래서 조금이나마 어그로를 끌 수 있어서.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내 바람대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론 게임에 현실성이 없다고 까면 안 되겠어. 게임을 할 수 있을 때의 얘기지만.’
어두운 외길도 아니고,악몽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생각만 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사경 때와 비슷한 처지 같았다.
‘그냥 아픈 거 한꺼번에 다 받을 테니까, 스킵하고 싶다….’
더 롱 테러에선 잠시간 용사가 기절하거나 고통 받는 표정의 일러가 뜬 다음, 사경에 빠졌다거나 공포에 잠식됐다면서 넘어갔었다. 제4의 벽을 넘어 직접 겪으니까, 굉장히 스킵이 많이 된 것이라는 걸 또 한 번 느꼈다. 이야, 불친절하고 좆같은 게임의 선두주자인 더 롱 테러가 알고 보니 아주 유저 친화적이었다?
‘카야랑 셰이가 걱정되는데.’
기절해버린 셰이는 몰라도, 카야는 완전히 기절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보스놈의 손아귀에 쥐어짜인 것도 봤을 가능성이 있고, 그렇다면 또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나야 사경이라는 보험이 발동할 걸 아니까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카야 입장에선 그걸 알 리가 없을 것이고… 아마 막대한 멘탈리티 손상을 받았겠지.
만약 입장을 바꿔서 카야나 셰이가 그런 꼴을,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봐야한다고 생각하면.
‘내 심장이 남아나지 않겠는데.’
그렇지만 카야. 난 네가 아니라 내가 공격당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러니까, 혹여나 이상한 생각 하지 말기를.
‘……그래서, 이번에도 또 그 지랄을 해야 한다는 건가?’
데카르트 아저씨의 말씀을 곱씹으며 저번처럼 정신적 발버둥을 쳐보았다. 그건 마치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대양을 헤엄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생각하고도 무슨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카야, 셰이. 셰이, 카야.’
그리고 공포의 손.
사방팔방 뻗어나갔던 오만가지 생각들을 점점 하나로 압축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카야랑 셰이도 죽지 않았다. 허나 죽기 직전인 건 똑같다. 내 턴이 끝나고 보스놈의 턴도 끝났으니, 이제 카야의 턴이다.
분명 1뎀이 모자랐으니.
카야가 톡 건들기만 해도 저 손병신은 공포를 부르짖으며 뒤지겠지. 설령 그녀가 실패했다 해도, 그 다음은 셰이의 턴이었다.
‘가만. 셰이는 지금.’
셰이는 카야와 다르게 완전히 기절한 상태였다. 카야도 완전히기절만 안 했다 뿐이지 몸을 움직이기 힘든 상태였고.
‘잠깐만. 그럼, 설마. 에이. 아니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녹아웃된 카야가 턴을 포기. 그리고 아예 기절해버린 셰이도 턴을 포기한다면?
‘설마, 내가? 내가 깨어나서 마무리 지어야한다고?’
최후의 최후까지, 극한으로 쥐어짜이고 또 쥐어짜야하는 상황에 내 정신은 비명을 질렀다. 카야가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든 막타를 치는 게 베스트이긴 하나, 대장이라면 항상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법.
‘씨바아아아알!!!’
나는 전력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
[밝기 : 0]
[빛이 완전히 꺼집니다. 공포와 어둠이 던전을 완전히 잠식합니다.]
[용사들의 전의가 더 빠르게 상실됩니다.]
[괴물들에게 공포의 힘이 더 깃들게 됩니다.]
“여보… 여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몸이 지독히도 아팠다. 그러나.
‘내가, 여보가, 아기가.’
마음이 훨씬 더 아팠다. 산산조각 난 것 같았다.
카야는, 그것이 꿈 내지는 환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런 부드러운 말투를 쓸 리도 없고, 대장과 알콩달콩 부부생활을 하고 있을 리도 없고, 선천적 불임을 가지고 있는 하프엘프인 자신이 아이를 가지는 것도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다. 다 안다. 그래도, 다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런 식으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최악이었다. 최고의 순간에서, 단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째서 그런 환상을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왕 이런 행복한 환상을 보게 됐으면. 현실에선 불가능한 일도 쉽게 이루어지는 환상이라면, 조금쯤은 더 오래 간직해도 되지 않았나.
비록 환상 속이었지만.
저 인간의 탈을 쓴 끔찍한 괴물은.
자신을 죽였고.
대장을 죽였고.
대장과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
환상 속에서나마 가질 수 있었던, 아이를. 무참히, 꿰뚫어죽였다.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최고로 행복했던 환상을 최악으로 박살낸 것도 모자라, 대장을… 대장을…!
“여보… 아, 아니, 대장…!”
환상은 지독했다. 언젠가 깨져버릴 거짓이라는 점에서 한 번, 그리고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실감나서 현실과 지독한 괴리감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두 번이나 마음이 헤집어진 카야는, 울면서 헨드릭을 찾았다.
“어디, 어디 있어요…? 대답, 대답해주세요…!”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대장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노한 카야는 절망에 빠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자신을 이끌어주는 대장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몸은 죽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다친 상태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나는, 행복할 수 없는 거야?
왜? 왜? 왜?
어째서 나는, 날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거야? 항상고통 받는 것은 이쪽인데, 왜 이기는 것조차 할 수 없는 거야?
저 괴물들은 여신님에게도, 일반 사람들에게도 끔찍한 존재인데.
왜. 어째서.
“어째서.”
바닥을 짚었다. 손끝에서, 손바닥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이 찌르르 올라왔다. 힘을 주자 그 고통은 몇 배가 되었다. 하지만 그 몇 배가 되더라도, 마음의 고통만큼은 못했다.
결국 카야는 일어나는데 성공했다. 결코 놓치지않았던 철퇴의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비명을 지르고 가당찮은 말을 지껄이던 괴물이 조용했다. 어둠 속에 숨었나? 그럴 것이다. 모든 게 흐릿했지만, 대장의 일격은 눈이 부셨으니까. 대장의 위대한 일격에 괴물도 죽기 직전까지 몰려 숨을 죽이고 이쪽을 경계하고 있겠지.
- 안 죽어. 내가 왜 죽어. 절대 안 죽으니까. 알았어?
- 일어나라고!!! 명령이다!!!
“그래. 대장이 고작 이런 곳에서 죽을 리는 없어.”
대장의 말은 옳다. 대장의 말이라면, 대장의명령이라면. 그것은 행해야 하고, 결국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은 카야의진리였고, 또 하나의 믿음이었다.
“어디 있나.”
카야는 고통을 무시하고 온몸을 꼿꼿이 폈다. 그리고 철퇴를 치켜들었다.
“어디 있냐고 물었어, 그릇된 믿음을 가진 자.”
방향이 맞는지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카야는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발바닥이 수많은 칼날에 베이는 고통이 엄습했다. 신체는 더 이상움직이지 말라고 격렬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공포를 믿는다며 공포를 입에 달고 공포를 무기로 휘두른 자가, 겁을 먹었나.”
허나 카야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대장의 명령을, 대장의 운명을.
그리고 자신과 대장의 운명을 계속하기 위해선.
저 괴물을 꺾어야 했다.
그 ‘집착’이, 카야의 몸을 억지로 이끌고 있었다.
“두려운가보네.”
여전히 괴물의 반응은 없었지만, 그녀는 알아챘다. 괴물의 피와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된철퇴, 그 끝부분에서 극히 미약한 광채가 한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방향은 자신이 원래 가고 있던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뚜벅-
“우습네.”
뚜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릴 공포로 짓누르네 마네, 죽이네 마네 하던 것이.”
뚜벅-
카야의 느리지만 확신에 찬 발걸음이 한 번씩 나아갈 때마다, 던전에 스며든 공포와 어둠이 발악이라도 하듯 그녀와 철퇴에 달라붙었다.
“어디 있는지 들키면 죽을까봐, 죽은 척 숨죽이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우스워.”
뚜벅-
순간 고통을 못 이기고 넘어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했다.
단 한 걸음.
단 한 걸음만 나아가면, 이 철퇴로 괴물놈의 대가리를 후려칠 수 있다.
그 일념 하나로, 카야는 반쯤 굽혀진 무릎을 다시 세웠다.
“공포를 그렇게도 부르짖던 네놈이라면,죽음이라는 공포가 닥쳐오는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극상의 시간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잖아.”
이쪽이나, 그쪽이나.
스치면 사망이라는 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
죽음의 기운이 가득 찬 이곳은,그야말로 공포라는 주제에 너무나 걸맞은 공간이었다.
‘결국, 그릇된 믿음이라는 것의 한계.’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인도해주는, 라엘라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 그리고 무너져가는 몸을 지탱해주는 헨드릭,유진을 향한 또 하나의 믿음.
앞에서 이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카야의 굳건한 두 가지 믿음이, 마침내 마지막 한 걸음을 완성했다.
“모든 것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믿음을 믿으며.
“‘신’의 뜻대로.”
카야는 그대로 남은 힘을 쥐어짜, 철퇴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