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1구역(2트)(28)
어쩐지 시작이 좋더라니, 재수가 없었다. 섬광탄을 먹였는데도, 저놈이 미스가 뜨지도 않았고 우리들 중 누구 하나 닷지가 뜨지도 않았다. 심지어 맥뎀이었다.
치명타만 안 터졌을 뿐이었다.
‘씨발 운빨좆망겜.’
안 그래도 어두운 던전 안이, 더 어두워졌다. 우리 곁에 둥둥 떠다니는 마법횃불의 밝기가 줄어든 만큼, 던전 내에 뭉클거리는 어둠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일어나…! 일어나! 카야!!!”
“끄흐읍….”
존나 아프겠지. 말도 잘 안 하고 표정 변화도 적은 카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참지도 못하고 있으니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이상, 던전 안에 우리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저놈을 조져서 끝내든, 뒤져서 끝나든.
아직은 아무도 안 뒤졌으니, 저놈을 조지는 게 맞다. 그러니까….
“일어나라고!!! 명령이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카야가 더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밝기 : 45]
“흐으, 흐으으.”
눈깔이 뒤집힌 카야는 발작하는 것처럼 몸을 들썩거렸다. 바닥을 박박 긁으며 어떻게든 일어나려는 것처럼 보였다. 처절했다. 비참했다. 누가 이런 모습을 보고 ‘용사’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끄흐으…!”
희고 긴 손가락 끝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도 바닥을 긁어댔는지 손톱이 모조리 부러져있었다. 너무나 처참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리가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바들거려도, 계속해서 몸을 일으켰다. 7전 8기는 옛적에 지났고, 벌써 20번은 넘게 넘어졌다.
[임계점을 넘어선 고통에 용사대 전체의 용기가 바닥칩니다.]
[셰이 멘탈리티 –8]
[카야 멘탈리티 –8]
[유진 멘탈리티 –5]
[밝기 : 39]
카야가 아직 일어나지 못했는데 던전은 계속 어두워졌다. 밝기가 50 미만으로 떨어졌고, 멘탈리티 하락 폭이 커졌다. 심지어 카야의 부정적 특징인 어둠 공포증까지 발현되었다.
어떻게든 기어가서 일으켜주고 싶었다. 안아주고 위로해서 힘을 불어넣고 싶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키스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턴이아니었다. 카야의 턴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움직여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그녀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대… 장… 대, 장…!”
카야의 입에서 피가 주륵 흘렀다. 눈에서도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새빨갰고, 피로 뒤덮인 얼굴은 섬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미안했다. 결정적으로, 아직 전의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는 결연함이보였다.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뿌듯했고 고마웠다.
“호오. 공포를 버텨냈다?”
“대, 장은, 절, 대로. 절대로!!!”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기적적인 일격!]
[카야가 공포의 손에게 13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7/99]
[기적적인 일격이 용사들에게 기적의 가능성을 꿈꾸게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6]
[절정의 공격으로 카야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카야 남은 체력 3/14]
카야의 일격은 위대했다. 메시지에 나타낸 대로, 기적적인 일격이었다. 거대한 공포에 온몸이 으스러진 직후, 어떻게든 몸을 추스리고 적에게 치명타를 먹인 그 순간. 난 전율하고 말았다. 2연속 치명타에 2힐. 카야는 그것만으로 이미 밥값을 충분히 하고도 남았다.
털썩-
“카야!”
“대, 대, 대, 대장….”
가까스로 제자리에 돌아온 카야가 무릎을 꿇었다. 기겁했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다만 얼굴이 핼쑥해지고 전신을 미친 듯이 떨었다. 그녀의 턴도 끝났겠다, 황급히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덩달아 내 몸도 사정없이 떨렸다.
“잘했어. 최고였어. 할 수 있어.”
덜덜덜덜-
이제 셰이의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던전을 클리어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걸 아무도 죽지 않고 이루겠다는 건 너무 지나친 욕심이었을까? 그냥 나 혼자 쓸쓸히 뒤지면 되는 걸, 괜히 의욕 넘쳐서 이들까지 끌어들여가지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고통만 남기고 죽게 만든 건 아닐까?
아니, 나도 살고 싶었어. 클리어해야 살 수 있다고, 대놓고 메시지가 협박하잖아. 그래서 열심히 했다고. 근데, 이건 너무 부조리한 거 아니냐고….
그래도, 이렇게까지… 나 살자고 다른 이들에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는 건….
“개새끼씨발새끼지랄맞은새끼오물만도못한새끼갈기갈기찢어비료로도쓰지못할새끼….”
“셰이…?”
“역겨운 이단숭배자 주제에 그딴 식으로 내려다보지 마! 난, 더 이상! 굴복하지 않기로 약속했어! 근데, 근데 겨우 네깟 놈에게!!!”
반쯤 엎드린 자세에서 셰이가 포효했다. 그러고는 그 자세에서 억지로 나아갔다.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하는 그림처럼, 네 발로 아득바득 기어가다가 끝내 두 발로 딛고 일어서 클레이모어를 들어올렸다.
카야의 저항이 전율을 일으켰다면.
셰이의 저항은 경이 그 자체였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압사시키려 한 공포의 존재에게, 고통을 감내하며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정의의 심판]
“난, 꼭! 돌아갈 거야!!!”
“감히! 또!!!”
[경이로운 일격!]
[셰이가 공포의 손에게 1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1/99]
[용사의 경이로운 일격이 용사들의 마음속에 희망의 불씨를 지핍니다.]
[셰이 멘탈리티 +2]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4]
[공포의 손이 심판에 저항합니다.]
[공포의 손이 상태이상 ‘기절’에 저항합니다.]
“감히, 감히, 감히!”
보스놈이 광분했다. 연속으로 치명타를 쳐맞아서 그런지, 아니면 정의의 심판에 저항하느라 빡쳐서 그런지는 알 길이 없었다.
“헤… 대장님… 저, 잘했어요…?”
“…물론. 잘했지. 아주 잘했어. 나보다도 훨씬 더.”
“헤헤… 아….”
털썩-
카야에 이어 셰이마저 쓰러졌다. 이젠 단순히 시스템상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멘탈리티가 –100이 되기도 전에 동료들이 정신적 고통에 울부짖었던 것처럼, 체력이 0이 되기 전에 몸이 한계를 맞이한 것이었다.
지금 그녀들의 체력인 4/17, 3/14은 그저 죽지 않고 살아는 있다는 정보일 뿐이었다. 내가 그나마 버티고 있는 건, 각성 덕분일 확률이 높았다.
‘이제 내 턴인가.’
반쯤 정신을 잃은 카야의 머리에 입을 맞춘 다음,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스윽- 도끼날을 매만지며 일어났다.
‘낙인 마지막 턴. 그리고 내 다음은 바로 저놈 턴.’
감이 왔다.
이제 뒤는 없다고.
내가 만약 이번 턴에 저놈을 조질 수 있다면, 그대로 승리를 따내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제발 광역기만 안 쓰면 돼. 그럼 저놈이 나한테 낙인을 찍은 이상, 꽤 높은 확률로 날 노릴 거니까.’
[공포가 속삭입니다.]
[밝기 : 24]
그래, 씨발놈아. 네깟 놈이 공포를 속삭이든 말든 어쩔 건데. 내 턴 뺏을 거야?
밝기가 20대로 떨어졌고, 보스놈의 윤곽마저 흐릿해졌다. 하지만 난 도리어 조금씩 침착해졌다.
‘할 수 있어.’
때 아닌 광역기 한방에 휩쓸려서 그렇지, 사실 우리 용사대는 미친 듯이 잘 싸웠다. 자벞 걸고, 기절 먹이고, 실명도 먹이고 치명타로 후벼파며 소소하지만 힐도 했다.
‘실-력했어. 카야랑 셰이는 이보다 더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잘 했다고. 나만 잘하면 돼.’
데미지 기댓값을 계산했다. 치명타가 뜨면, 그것도 중간값 정도만 떠도 죽일 수 있었다. 두 동료들은 치명타를 잘 띄웠다. 나라고 못 띄울 거 없었다.
“카야.”
첫 동료. 그리고 첫 여자. 믿음직한 우리 전투수녀. 묵묵히 제몫을 다하고 날 받쳐주는 고마운 사람.
“셰이.”
두 번째 동료. 비록 첫만남이랑 인던에서는 좀 어색했지만, 나랑 카야에게 살갑게 대해주고, 우릴 지켜주는 든든한 천재 탱커 아가씨.
“나야말로 너희들에게 보답할 게 많아. 그러니까….”
[대가리 분쇄]
뚜벅, 뚜벅, 뚜벅뚜벅, 뚜벅뚜벅뚜벅, 타타타타앗-
온몸의 삐걱거림을 무시하며, 눈을 부릅뜬 보스놈의 대가리에 도끼를 내리찍었다.
[치명적인 일격!]
“그러니까 우리….”
[유진이 공포의 손에게 20의데미지를 입혔습니다.]
“-------!!!”
“그러니까….”
[남은 체력 1/99]
“감히감히감히이이이!!! 죽여버릴 것이다, 죽여버릴 것이다, 죽여버릴 것이다!!! 네놈들에겐 공포에 몸부림치는 것도 사치일지니!!!”
“그러, 니까….”
[치명적인 일격에 성공한 용사들의 마음에…]
“…….”
하.
[공포의 손아귀]
“커허억-!”
“죽어라.”
푸화아아악-!
[공포의 손이 유진에게 9의 데미지를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6/17]
두쿠웅-!
[유진이 사경에 들어섰습니다.]
[불굴의 정신이 꺾입니다.]
[정신이상‘불굴’의 모든 효과가 사라집니다.]
[모든 능력치가 33% 감소합니다.]
[사경에 들어선 상태에서 데미지를 받으면 유진은 사망합니다.]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에…]
털썩-
**
“여보. 식사하세요.”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예.”
앞치마를 두른 여자는 식탁에 마지막 그릇을 옮기며 거실에서 뭔가 작업하고 있던 남자를 불렀다. 밥 먹으라는 여자의 부름에 남자는 한달음에 달려와 의자에 앉았다.
“와. 이게 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아뇨. 그냥… 하고 싶었어요.”
“이걸 다?”
“많으면 남기셔도 돼요.”
“흐음.”
남자는 식탁을 한번 싹 훑고는 전투적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여자는틈틈이 남자의 숟가락에 남자가 좋아하는 반찬을 올려주며 웃었고, 남자 또한 여자가 좋아하는 반찬을 직접 입에 먹여주었다. 남자도 웃었다.
“으아, 배 터질 거 같아. 잘 먹었어. 카야.”
“저도요. 여보.”
“요리는 네가 다 했는데… 아무튼 고생 많았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 카야는 남자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카야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고, 카야는 남자의 품에 더욱더 매달렸다.
“여보.”
“어?”
“그거, 생각해봤어요?”
“그거?”
“이름이요.”
“카야.”
남자의 손이 멈췄다. 그는 반대쪽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스읍, 생각은 해봤는데, 난 이름 짓는 게 영 서툴러서 말이야. 네가 생각해둔 게 있으면 네가 짓는 것도 좋잖아?”
카야가 그의 품속에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꼭 여보가 이름을 지어줬으면 좋겠어요.”
“왜?”
“제 꿈이었으니까요. 여보와 맺어지고, 여보를 닮은 아이를 가지고, 여보에게 받은 이름을 가진 아이를 함께 키우는 것 말이에요. 이중 앞에 두 개는 이루어졌으니, 마지막까지 이루어주셨으면 좋겠는데… 안 될까요?”
“하하. 안 될 게 뭐가 있어. 어디보자… 생각해둔 게 있긴 해. 일단 한 번 들어볼래?”
“예. 다 들려주세요.”
남자는 큭큭 웃으며 카야의 배를 다시 쓰다듬었다.
“일단 아들이라고 가정하면, 카일도 있고.”
“좋네요.”
“유리도 있고.”
“좋아요.”
“엘핀도 있고.”
“그것도 좋아요.”
“크라우도 있고.”
“다 좋아요.”
“하하, 다 좋으면 어떡해. 이름은 하난데.”
남자는 손가락을 세워 톡톡 카야의 배를 건드렸다.
“그럼 여보는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요?”
“나?”
남자가 제품에 안겨있는 카야를 내려다봤다. 카야와 눈이 마주쳤다.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은은한 웃음을 짓고 있던 카야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남자의 팔이 그녀를 옭아맸다.
“너, 너!!!”
“공포의 손, 은 어때?”
남자의 눈코입귀에서 피가 쏟아졌고.
“아아아아아악!!!”
삽시간에 비대해진 그의 손가락들이 그와 카야를 한꺼번에 꿰뚫었다.
**
[용사들의 희망이 꺾인 자리에 공포가 자리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 33]
[카야 멘탈리티 – 33]
“여, 보… 여보… 여보…? 여보…! 어디, 있어요, 여보…? 대, 대답해… 아흐윽…!”
[밝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