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1구역(2트)(20)
[휴식처에 입장했습니다.]
[휴식처에선 던전의 영향을 매우 적게 받습니다.]
[휴식처에서는 섭식과 휴식의 효율이 증가합니다.]
라엘라! 라엘라! 라엘라!
아. 유스티티아님도!
유스티티아! 유스티티아! 유스티티아!
동료들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휴식처의 등장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단비요 사막 가운데에 오아시스였다.
어찌 환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실-력했다.”
“…예?”
“아니, 아무 것도아냐. 셰이 조심스럽게 내려주고 좀 쉬고 있어. 최대한 빨리 텐트 설치하고 모닥불 피우고 올 테니까.”
“저도 돕겠습니다.”
“명령이야. 쉬어둬.”
…끄덕
카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가 봐도 카야는 쉬어야 했다. 잠깐 셰이를 업어본 결과, 중갑을 입은 그녀의 몸무게는… 최소한 80kg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치였고, 거기에 카야도 중갑을 입고 있었으니 실제 체감 무게는 그 이상이었겠지. 그 무게를 몇 십 분 동안 견뎠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나도 몸이 피로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저 둘만큼은 아닐 것이다. 아니, 설령 동일한 정도로 피로하다 해도 내가 하는 게 옳았다.
저 둘은 지금 맛이 가 있었으니까.
다시 한 번 1-9에 휴식처가 뜬 것에 감사하며, 우선적으로 압축 장작을 꺼내 모닥불을 피웠다. 떨고 있는 카야와 셰이를 불 가까이로 옮겨 몸을 따뜻하게 한 다음,재빨리 텐트 세 개를 설치했다.
나는 카야에게 물과 수건을 건네주었다.
“몸도 적당히 녹였으니 이제 저쪽 텐트에 가서 몸 닦고 나오면 될 거 같아. 난 그동안 식사 준비할 테니까. 아. 셰이도 네가 좀 닦아줄 수 있어?”
카야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셰이를 집어들고 제일 구석 텐트에 들어갔다.
냄비에 물을 넣고 모닥불 위에 올렸다. 물이 적당히 끓어오르기 전까지 더러워진 무기랑 갑옷을 대충 닦았다. 저 구석에서갑옷 벗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고, 나는 적당히 가루 스프랑 건야채를 비롯한 식량들을 쏟아부었다. 딱히 아끼려야 아낄 것도 없었고 아낄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다음 방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배라도 따뜻하고 든든하게 채운다음 푹 자면, 그나마좀 괜찮아질 거야.’
악몽으로 잠을 설친다면 그건 좀 문제가 되겠지만… 지금 몸 상태라면 다들 꿈을 기억 못할 정도로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보글보글- 수프 끓는 소리를 들으며 묘하게 힐링을 받고 있던 도중, 구석 텐트에서 카야와 셰이가 나왔다.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머리는 부스스했고 얼굴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으며, 중갑이 없으니 굉장히 왜소해보였다. 툭 건들면 기절할 것처럼 보였다. 꼭 좀비 같았다.
“힘들겠지만, 당장 자고 싶겠지만 일단 먹자. 먹고 푹 자자.”
각자의 그릇과 식기까지 손수 세팅해주었다. 만사가 힘들고 만사가 귀찮을 테니, 그나마 정상인 내가 움직여야지 않겠나. 카야는 내가 먹는 걸 보고는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으나, 셰이는 내가 쥐어준 스푼을 그대로 든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멘탈리티]
셰이 : -75(무기력)
카야 : -31(집착)
유진: -64(불굴)
‘멘탈이 강했던 셰이가 한 번망가지니 걷잡을 수 없어지게 망가지는구만….’
원래 멘탈 까이는 속도로만 보면 카야가 제일 유리멘탈이었다. 나랑 셰이는 비슷하거나셰이가 조금 더 단단했고. 하지만 대나무는 휘어지지 않고 부러진다 했던가. 가장 잘 버틸 줄 알았던 셰이가 가장 심각한 상태가 될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더 롱 테러만큼 예상하는 게 덧없는 게임은 몇 개 안 될 거야.’
나는 대충 퍼먹은 다음, 셰이의 옆자리에앉았다. 그리고 스푼을 뺏어서 그녀의 입에 가져다댔다. 셰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카야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했다.
“셰이. 먹어야지. 먹어야 힘을 쓰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야. 입만 아 벌리고 삼키기만 해.”
“…아.”
“옳지.”
다행히 셰이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외부의 자극을 인지하는 건 정상이었지만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지독한 무기력함을 느끼는 게 문제지.
스푼이 들어갈정도로 입을 벌리는 것과 입에 들어간 수프를 삼키는, 지극히 간단한 행동의 반복에 불과한데도 꽤나 오랜 시간이 들었다. 단순히 떠먹기만 하면 되는 수프를 30분 넘게 먹여야만 했으니까.
셰이에게 수프를 먹이는 내내 카야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관둘 수는 없었다. 이번 휴식처에서 회복할 수 있는 최대한 회복해야 했다. 마침 셰이는 멘탈리티 뿐만 아니라 체력 상태도안 좋았기 때문에, 밥을 먹는 건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이었다.
“셰이. 다 먹었으니 물로 입 헹구자.”
입을 헹구는 건 단순히 삼키는 것보다 더 큰 노동이었고, 셰이는 몇 번이나 입에서 물을 질질 흘려댔다. 무기력이 아주 뼛속까지 스며든 수준이었다.
‘저 상태에서 악몽 꾸면 안 될 텐데. 셰이도 따로 챙겨줘야 하나? 섣불리챙긴답시고 휴식을 방해하는 게 되면….’
셰이의 입을 닦아주고 일단 그녀의 텐트에 데려다주었다.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 것일까.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에라, 그냥 이제 나도 몸 닦고 잘 준비를….
“…대장.”
잘, 준비를….
“어, 어어. 그래. 카야.”
내가 셰이를 돌보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카야는, 불쑥 다가오더니 내게 그릇을 내밀었다.
“카야. 너, 하나도 안 먹었어?”
“저도.”
그녀는 말하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저도, 먹고 싶습니다.”
“그야, 먹으면.”
“저도. 먹고 싶습니다.”
“아니, 그니까.”
“저도. 먹고. 싶습니다.”
카야는 내게 자기 스푼을 내밀었다. 그녀의 반복된 말에서, 내밀어진 스푼에서 강력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니까….”
하하.
지금, 먹여달라는 거잖아. 셰이한테 해줬던 것처럼.
나는 결국 스푼을 받아들였다. 그래. 이 또한 내 책임일지니. 라엘라님께 감사했으면서, 그 딸을 케어해주지 않는다면 모녀 양쪽이 적잖이 상심할 터.
“아 해. 아-”
“…아.”
식어버린 수프를 듬뿍 담아 내밀자 카야가 작은 입을 수줍게 벌렸다. 후루룹- 셰이와는 다르게 잘 먹었다. 하지만… 스푼을 뺄 때마다 혀와 입술을 사용해 쭈웁 빨아대는 게, 보통 모습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의 시선은 항상 날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항의하는 거 같았다. 왜 셰이만 챙겨주냐고. 왜 셰이를 먼저 챙겨주냐고. 왜 난 안 챙겨주냐고.
‘집착… 때문인 거겠지? 무섭다. 그리고 무겁다.’
공포의 잠식 메커니즘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냥 숨겨진 본성 내지 트라우마가 극도의 공포에 반응해 겉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공식 설정에서도 그런 식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진 건 없었다. 동일 클래스, 성별,레벨, 스킬을 보유한 용사가 매번 동일한 잠식 디버프를 받는건 아니었으니까.
그니까카야가 걸린 ‘집착’ 디버프가 카야의 내재된 본성이 공포 때문에 변질된 채로 촉발된 것인지, 그때그때 랜덤으로 발현된 것인지는 모른다는 말이었지만… 그녀의 어조와 눈동자와 행동 등 모든 언행을 보면, 전자에 가까운 것 같았다.
‘타인에 의해 바닥난 자존감,거기에서 이어지는 자기불신 및 혐오. 그리고 그걸 어느 정도 해소해주고 자존감까지 채워준 이에게, 집착…이라.’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였다.그녀에겐 타이밍 좋은 라엘라님의 계시라는 명분도 있었다. 성직자에게 여신의 계시는뭐 거의 불변의 진리 수준이었으니, 카야 속에서 자체적으로 짜여진 시나리오는 금강불괴 저리가라 할 정도로 단단하게 픽스된 상태겠지.
지금 그녀의 행동으로 유추하건대,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그녀의 두 번째 메시아가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잘 먹었습니다.”
카야는 다른 의미로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워내는데 오래 걸렸다. 한 번 받아먹을 때마다 스푼을깨끗하게 한다는 명목 하에 구석구석 여러 번 핥고 빨아댄 것도 모자라, 중간중간 말없이 날 빤히 바라봐서 그런지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아질 거야. 잠식 때문에 이러는 걸 테니까, 하루만 어떻게 잘 버텨보자.’
일부러 난 보스를 깨고 난 이후 얻을 경험치와 각종 보상들을 비롯해 긍정적인 것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현실도피성 상상은 금방 끊기고 말았다.
“카야. 네 텐트는 저기야.”
도리도리-
카야가 당연하다는 듯, 내 텐트 앞까지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카야. 이제 보스만 남았어. 진짜 마지막 휴식이라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푹 휴식을 취해야지.”
도리도리-
카야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말하지 않은 속뜻을 추측할 수 있었다.
- 같이 자. 안 그럼 안 잘 거야.
차라리 내가 초특급 둔감눈새였다면 어땠을까. 카야의 고집을곤란해하면서도 끝끝내 혼자 잤겠지. 하지만 난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어렸을 때의 삶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니저러니해도, 카야는 내 첫 동료고. 또… 씨발 첫 여자고.’
제 컨디션을 인질 삼아 협박하는 카야를 보는 내 마음은 복잡했다. 그래도, 답은 정해져있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줄래. 나 아직 몸 닦지도 못했어.”
“제가.”
카야가 빠르게 치고들어왔다.
“제가 닦아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건.”
“제가. 닦아드리겠습니다.”
- 싫어? 그럼 나 안 자.
기필코 내 몸을 닦아주겠다는 단호함과 제발 거절하지 말아달라는 간절함이반반씩 느껴졌다.
“…들어와.”
끄덕!
간만에 보는 힘찬 끄덕임이었다.
**
‘이게 바로, 수치라는 건가.’
던전 내에서 샤워나 목욕이라는 건 허상의 사치행위일 뿐이었다.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거라곤 물과 수건을 이용해 몸을 닦아내는 것뿐. 땀이 많이 차고, 그래서 냄새가 많이 날 수밖에 없는 겨드랑이나 사타구니, 발 같은 곳을 여러 번 닦아내면 그나마 견딜만 했다.
근데 그곳들을, 내가 닦는 게 아니라.
“다리, 조금만 더 벌려주십시오.”
“아, 어….”
여자 동료가, 그것도 얼마 전에 내 동정을 가져간 여자가 닦아준다면?
민망함과 수치심이 폭발하는 것이었다.
- 오히려 좋아.
‘오히려 좋긴 뭐가 좋….’
- 그래서 안 좋아?
‘…제길.’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카야는 내 몸을 소중한 보물처럼 구석구석 꼼꼼히 닦아냈다. 점차 민망함은 사라지고 개운함과 흥분이 차올랐다. 그리고 그걸, 카야가 못 느낄 리가 없었다.
몸을 닦아주기 위해 텐트 내부를 밝힌 마법 횃불 때문에,내 몸은 환히 드러나 있었으니까.
“자, 잠깐. 거긴!”
“여기도… 닦아드리겠습니다.”
멈칫멈칫,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카야의 손이 마침내 웅혼한 기세를 떨치는 역천의 기둥에 닿은 그 순간이었다.
-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셰이!”
끔찍한 비명.
듣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비명이 휴식처에 울려퍼졌고, 흥분감과 약간의 기대감에 달아올랐던 몸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나는 급히 일어나 속옷을 걸치고 텐트 밖으로 나가려다가, 손을 뻗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져있는 카야를 발견했다.
동료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에서 정말 미친 생각이었지만… 저 비명을 듣지 못한 제3자가 보기에, 지금 이 상황은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아내를 내팽개치고 큰일이 난 것 같은 내연녀에게 허둥지둥 달려가는 남자처럼 보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대로 텐트를 나가버리면, 언제가 됐든 좆될 거 같다는…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최고로 강렬한 직감!
속옷만을 걸친 채, 나는 카야에게 속삭였다.
“기다려. 무조건 돌아올테니까. 최대한 빨리.”
굳어져있던 카야의 고개가 작게 움직였다.
‘미안, 카야.’
나는 후다닥 셰이의 텐트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