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6화 〉1구역(2트)(19) (46/218)



〈 46화 〉1구역(2트)(19)


“아.”

클레이모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요란했다. 굵고 기다란 촉수가 닿은 순간, 셰이는 어떤 감정을 느낀 것일까. 좆같음? 공포?

확실한 건, 일반 괴물치고 강력했던 멘탈리티 공격이었다는 것이고 하필이면 무기력 상태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가 났다는 것이었다.

“하하, 하하하….”

[셰이가 무기력함에 빠집니다.]
[그녀가 느낀 무기력함에 용사들의 용기가한풀 꺾입니다.]
[셰이 멘탈리티 –5]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4]

절로 이가 악물렸다. 정신이상 ‘무기력’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 정도의 늪처럼, 멘탈리티 회복 속도는 반감되고 감소 속도는 25%가 증가된 상태인데다가 용사의 멘탈 자체도 약해져서 멘탈 감소 이벤트 자체가 자주 뜨는… 악순환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멘탈리티]
셰이 : -44(무기력)
카야 : -19(집착)
유진 : -58(불굴)

멘탈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44였다. 1-10에서 보스를 상대할  생각하면… 이미 지금도 위기였다.

“셰이! 검 들어!”

“검….”

그녀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행동도 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보는 사람이 힘 빠질 정도였다. 그나마 내 말이 아니었으면, 움직이려는 시도조차 안 했을 것 같았다.

“맹세를 기억해! 셰이! 네 맹세의 무게는 고작 이 정도였어?”

“맹세…요.”

“그래!”

아직, 셰이에게 있어서 ‘맹세’ 키워드는 먹혀들었다. 그녀의 표정과 몸짓에 조금이나마 기력이 돌아왔다. 검을 집어든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게 보였다.

그래, 그거야. 힘들겠지. 두렵겠지. 하지만, 아예 무기력하게퍼질러져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거야.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왜?

 맹세했으니까. 앞장서서 우리들을 보호하겠다고. 던전의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네 믿음의 대상인 유스티티아 여신님과.

네 말에 따르면 처음으로 진심을 보인 상대인 나에게.

그러니까 셰이, 포기하면 안 돼.

[희생양이 느낀 공포]

“-----!”

[희생양이 셰이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1/17]
[희생양이 겪은 압도적인 공포가 일부분이나마 셰이에게 전해졌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11]

그러나 셰이에 집중하느라 잠시 한눈이 팔린 사이, 수습 사제의 다음 턴이었던 희생양이 셰이의 발목을 붙들고 다시 한  공포의 감정을 전이했다.

털썩-

“셰이…!”

그건마치… 힘겹게 정상까지 올라온 이를 위에서가볍게 툭 미는 것처럼 보였다.  가벼운 손짓에 셰이는 기껏 힘겹게 올라왔던 거리를 순식간에 굴러떨어진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셰이가 턴을 넘깁니다.]

가까스로 기력을 찾으려 노력했는데, 뭘 하기도 전에 더  무기력에 빠져버린 셰이에겐 뭔가를 하는  자체도 두려워진 것이다.

“헤….”

[동료가 겪은 짙은 무기력함이 용사들의 마음을 조금씩 좀먹습니다.]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4]

다시 내 턴이 찾아왔지만, 선뜻 도끼질을 하지 못했다. 내 턴이 끝나면 다시 카야의 턴이 찾아오는데, 카야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까. 돌고 돌아 셰이는  어떻게 될까.

아깐 헛웃음이 나왔지만, 지금은 울고 싶었다.

‘안 돼.  무너져선  돼.’

내가 무너지면 끝이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수습 사제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대가리 분쇄]

“촉수 씨발!”

[영웅적인 일격!]
[유진이 수습 사제에게 3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8/23]
[수습 사제가 죽었습니다.]
[용사의 일격을 목도한 동료들의 마음속에 용기가 싹틉니다.]
[셰이 멘탈리티 +2]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5]


 도끼가 촉수쟁이의 대가리를 호쾌하게 빠개버렸다. 앵무새마냥 공포를 부르짖던 더러운 입은 형체도 찾을 수 없었다.

치명타로 한 방에보내버렸지만, 기뻐하지 않았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카야에게 명령했다.

“저 괴물부터 조져.”

“….”

“대답해.”

“…예. 대장.”

카야는 다시  번 내게 달라붙으려 했지만, 피와 살점과 기름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도끼를 앞으로 내밀었다. 카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내가 강한 어조로 명령하자 그녀의 철퇴가 희생양을 향했다. 다행히 다른 괴물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카야가 희생양에게 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4/20]
[절정의 효과로 유진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유진 남은 체력 14/17]

희생양의 머리를 가격한 후 대열로 돌아온 카야는 엎어져있는 셰이를 보지도 않고 지나친 다음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잘했다는 뜻에서 고개를 끄덕여줬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카야.”

[유진 멘탈리티 –3]

니미 씹, 후우…… 릴랙스, 릴랙스.

카야는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나는 카야의 다음 턴인 평신도가 셰이를 공격하려는 걸 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밖에 없었다.

[평신도가 셰이에게 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9/17]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어느새 셰이의 체력이 반피였다. 멘탈리티 공격을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증명하는 꼴이었다.

그리고 턴은, 다시 희생양에게 돌아갔다.

[희생양이 느낀 공포]

그만해 이 씨발 괴물 새끼야… 셰이 멘탈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고….

**


[체력]
셰이 6/17
카야 12/14
유진 14/17

[멘탈리티]
셰이 : -70(무기력)
카야 : -25(집착)
유진 : -64(불굴)

1-8을 어찌저찌 클리어하고 겨우 빠져나왔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셰이는, 이제 걸을 기력도 없어보였다.

지독했다.

공포로부터 비롯된 무기력은, 그녀 혼자뿐만 아니라 용사대 전체에게 전염됐다. 그나마 내가 각성했기에 쉽게 물들지 않아 길항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지, 만약 나도 공포에 잠식됐으면… 1-8에서 파탄 났을 것 같았다.

“내가 업고 간다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너 지금 상태 별로잖아. 내  안 들을거야?”

처음에 1-8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셰이를 업은  나였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카야는 자기가 셰이를 업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찌나 단호하던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기세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쭉 카야가 셰이를 업고 있었는데, 문제는 셰이의 발이 질질 끌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갑을 입은데다가 키가  편인 셰이는 무거웠고, 카야도 제대로 못 업고 있었다. 하지만 카야는 자기가 계속 업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체  그러는 거야. 어? 지금 네 행동은 전혀 이성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아! 몸상태가 제일 좋은 내가 업고 가는 게 대형유지 면에서도, 유사시 대처 면에서도 훨씬 좋다는 걸 왜 몰라!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솟구쳤지만, 내가 생각해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이성적? 합리적?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카야. 솔직하게 말해.”

카야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끌리는 금속 부츠 소리가 굉장히 거슬렸다.

“내가 셰이를 업는 것이, 싫은 거야?”

카야는 아까보다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었고 이유는 확실해졌다. 하지만 전혀 명쾌하지 않았다.

셰이를 업느라 자신을 봐주지 않으니, 차라리 자기가 업고 가겠다는 발상 앞에서 무슨 말을  수 있으리오. 그렇다고 여기서 강제로 명령을 내려가지고 셰이를 내가 업는다? 그나마 말을 듣는 카야마저  맛이  수 있었다.

속이 너무 답답했다. 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공포포기무새 새끼야. 재밌냐.’

재밌겠지. 아주 재밌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잠식을 저항한 내 처지는 특히 더 고소하겠지.

[공포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기분이 용사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5]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3]

얼씨구.

굳이 말해 뭐하냐는 듯, 기가 막힌 타이밍에 멘탈리티가  까였다. 동료들이 맛이 간  계속 멘탈 팀킬이 벌어져서잠시 잊고 있었지만, 원래 자연적으로 까이는 멘탈리티를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방은 단  개.

1-10은 보스방 확정이니, 1-9에서 뭐가 튀어나오냐에 따라 구역 클리어 확률이  갈릴 것이다.

‘보스. 잡을 수 있을까.’

잠시 1-9에 대한 걱정은 접어두고, 1구역 보스에 대해 떠올렸다. 더 롱 테러에서처럼 7마리 중 랜덤으로 하나가 나올까, 아니면 이번에 dlc에서 뭔가 추가된 게 튀어나올까. 지금 용사대 상태로, 어떤 놈이 튀어나오는  그나마 가장 상대할 만한가.

‘피지컬 쪽이든, 멘탈리티 쪽이든… 어느 쪽이든 쉽지 않겠어.’

플레이타임이 늘어나며 어느 순간 1구역 보스 정도는 용사대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 있었다. 1구역 보스를 노데스로 깰 정도면, 클리어 각이 어느 정도 보인다고 판단하는 근거로 삼았다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더 롱 테러 ‘고난도’ 안에서는.

뚜벅- 뚜벅-
드르르르-

카야의 평소보다 무거운 발걸음소리와 셰이의 발끝이 끌리는 소리가 통로에 메아리쳤다.

“카야!”

“…대장!”

“크읍!”

[유진이 함정에 당했습니다.]
[남은 체력 13/17]
[상태이상 ‘중독’(3턴)에 걸립니다.]
[카야 멘탈리티 –6]
[유진 멘탈리티 –3]

운 좋게 함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발동된 후였고, 침은 셰이를 업고 있던 카야를 향하고 있었다. 밀쳐내고 싶었지만 그러는 대신 경로상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 내가 대신 맞을  있었다.

“대장! 대장!”

“괜찮아. 안 죽어. 사소해. 약 먹으면 금방 나아.”

“대장…!”

“셰이  챙겨. 바로 이동한다.”

꽤나 깊숙하게 박힌 침을 뽑고는맛대가리 하나 없는 해독약을 쭉 들이켰다. 금방 중독 상태가 해제되었다는 메시지가 떴지만, 이번엔 카야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내가 당한 부위를 살펴보기 위해 셰이도 내팽개치려는 걸 겨우 말렸다.

[카야 멘탈리티 –4]

카야야. 제발.

카야는 아예 내 앞을 철저히 가로막았다. 내가슬쩍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그녀도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녀는 내가 두  다시 앞지르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있었다. 그렇다고 빨리 걸으라고 재촉할 수도 없고, 내가 앞서는 것도 막고.

나는 참을 인자를 새기며 다시 한 번 기도했다.

‘라엘라님. 당신 딸들이 아주 미쳐버렸어요. 맛이 가버렸다고요. 예? 셰이는 당신 딸이 아니라고요? 너무 정 없으시네. 그래도 옆집 친구잖아요. 유스티티아님이랑 친하다면서요. 그럼 친구 딸이잖아요.’

물론 응답은 없었다.

‘당신 딸들, 이렇게 약하지 않잖아요. 이렇게 약하게 키우지 않았을  아니에요.’

닿지 않을 기도라도, 간절히 바라면 가끔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때가 있지 않을까.

운빨좆망겜 플탐 3000+ 게이머의 기도 실력이라면, 치트키 수준은 아니더라도 소소한 바람 정도는 기도로 실-력   있지 않을까.

‘저 보세요. 얼마나 고생하고 있어요. 여신님한테 훌륭한 딸들 많고 많은 거 아는데… 그렇다고 해서 카야와 셰이가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예? 어떻게든 책임질 테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도와주십시오.제발.’

난 지금까지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동료 멘탈 케어, 상황 판단, 데미지 딜링, 그리고 각성까지.

 실력으로 어찌할  없는 부분, 가령 1-9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같은 것은 결국 운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는데, 적어도 따끈따끈한 수프라도 먹게 해주시면 돌아가서 수도원에 기부금도 내겠습니다….’

드디어 1-9의 문이 보였다. 기진맥진한 카야를 앞지른 내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따스한 자애를 내려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휴식처에 입장했습니다.]

“앞으로 더 빡세게 믿겠습니다! 라엘라님!!!”

20년 넘게 무교였던 나는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독실한 신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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