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1구역(2트)(18)
[잠식한 공포가 용사의 내재된 두려움으로부터 ‘무기력’을 극대화시킵니다.]
[멘탈리티 회복 수치가 50% 감소합니다.]
[멘탈리티 하락 속도가 25% 증가합니다.]
[걸려있던 모든 버프가 해제됩니다.]
[일정 확률로 동료들의 멘탈리티를 저하시킵니다.]
[속도가 2 감소합니다.]
[명중률과회피율이 감소합니다.]
[일정 확률로 행동을 포기합니다.]
[사경에 들어서거나 멘탈리티가 다시 한 번 –100에 도달할 경우, 바로 사망합니다.]
셰이의 무기력 디버프를 보니 한숨이 나왔고.
[잠식한 공포가 용사의 내재된 두려움으로부터 ‘집착’을 극대화시킵니다.]
[걸려있던 모든 버프가 해제됩니다.]
[일정 확률로 동료들의 멘탈리티를 저하시킵니다.]
[속도가 1 증가합니다.]
[회피율이 감소합니다.]
[데미지가 10% 감소합니다.]
[일정 확률로 행동의 통제가 되질 않습니다.]
[사경에 들어서거나 멘탈리티가 다시 한 번 –100에 도달할 경우, 바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카야의 집착 디버프까지 보니 한숨의 깊이는 두 배가 되었다.
[멘탈리티]
셰이(무기력) : -22
카야(집착) : -18
유진(불굴) : -50
내 각성 버프가 어마어마한 것과는 별개로 잠식 디버프는 끔찍했다. 에게, 겨우속도 –2? 겨우 데미지 –10%?
하. 그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일정 확률로 행동을 포기합니다.]
[일정 확률로 행동의 통제가 되질 않습니다.]
진짜 끔찍한 건 매 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턴제 전투에서, 확률적으로 턴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폭거였다. 거기에 툭하면 동료들의 멘탈을 갉아먹고, 멘탈이 갈린 동료가 또 다른 동료의 멘탈을 갈아버리는 연쇄작용은… 멀쩡하던 용사도 미치게 만들었다.
그나마 난 각성했기에 적어도 사경에 들기 전까진 미칠 일이 없었다. 내가 진짜 조심해야 할 제 1순위는 갱신된동료의 멘탈리티가 다시 –100을 찍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100을 찍는 순간, 끝이었다.
“헤헤… 대장님.”
“그래, 셰이.”
“우리, 끝까지 갈 수 있어요?”
[유진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4]
“셰이는 대장을 못 믿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럼 조용히 하십시오. 대장은 필요한 말 외에는 잡담을 금하라 했습니다.”
“응, 알았어요….”
[셰이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3]
오 쒜엣… 벌써 시작인가.
남이 보면 단순한 질문, 그리고 단순한 충고 정도로 보일 법한 짧은 대화. 30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멘탈리티가 까였다. 대답 한 번 했을 뿐인 내 멘탈리티는 6이나 까였고.
아니, 내 멘탈리티가 까이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방이 3개나 남았는데 전투도 아니고 대화로 까이는 건 최소화해야 했다.
“셰이. 우린 끝까지 갈 수 있어. 날 믿고, 네 자신을 믿고, 네 동료를 믿어. 그리고 카야. 네 말도 맞지만 어조가 좀 날카로웠어. 너도 물론 힘들겠지만 셰이도 힘들어서, 걱정되서 한 말이었을 테니…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대장님. 믿어볼게요.”
“…예. 대장. 대장의 뜻이 그렇다면.”
뭔가 힘 빠지는 대답과뭔가 석연찮은 대답이었지만 일단은 봉합했다. 물론, 언제 또 터질지는 알 수 없었다. 전투 중에는 또 어떻게 날 당황하게 할지, 이야. 벌써부터 기대되는 걸.
‘미친 건 아니지만 나도 미쳐버린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
괜찮다. 빡세게 다짐하고 오지 않았나. 내겐 수많은 경험도 있고, 지식이 있다. 비록 1-7과 1-8 중간에서 두 명이나 맛이 가버렸지만….
‘생각해보면, 벌써부터 두 손 들고 포기할 정도까지는 또 아니라는 게 웃기단 말이지.’
고난도와 최고난도. 단계는 고작 한 단계 차이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그 사이에 엄청난 갭이 있었다. 더 롱 테러에서의 승률이 10% 정도인데, 이론상 최고난도인 이곳을 클리어하는 건 당연히 10%보다 더 낮겠지.
그래. 이론상.
이론상, 3잠식 상태에서도 구역을 클리어 한 전적이 있으니. 여기서도 마냥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심!”
“하앗!”
[셰이가 함정을 피했습니다.]
[작은 용기가 용사들의 마음에 깃듭니다.]
[셰이 멘탈리티 +2]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잘했어!”
“헷… 그런가요.”
[불굴의 정신이 용사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셰이 멘탈리티 +2]
[카야 멘탈리티 +4]
나이스.
어떻게든 명분을 찾고 있던 나는 함정을 운 좋게 피한 셰이를 칭찬했다. 그러자 불굴의 효과가 발동되서 멘탈리티를 소폭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야…? 할 말 있어?”
카야는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다가 잠시 셰이를 쳐다보고는 다시 날 바라봤다.
“그… 카야도, 잘 했어.”
[셰이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2]
아니 카야… 하. 빌어먹을.
함정을 피하고 내 칭찬을 들어서 그런지 잠시나마 활력을 되찾았던 셰이는 카야의 얼굴을 보고는 다시 축 처진 상태로 돌아갔고, 아무 말 없던 카야는 내 쪽으로 살짝 붙어서 걷고 있었다.
‘무기력’과 ‘집착’… 참 직관적이면서도 골치가 아팠다.
‘라엘라님. 오랜만입니다… 예? 꼭 위급할 때랑 필요할 때만 찾는다고요? 아 됐고 빨리1-8에 도착하게 해주세요….’
내가 어? 당신 딸 케어하느라 아주 고생하고 있는데 어?
들리지도 않을 기도 하고 자빠졌고, 들리지도 않은 대화를 나누고.
크흐흐,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만.
다행히 1-8에 도착하기 전까지 더 이상의 사건은 없었다. 함정도, 피습도, 멘탈 팀킬도 없었다는 뜻이었다.
1-8에 진입하기 전, 대열을 다시 원래대로 바꿨다. 셰이-카야-나 순이었다. 이미 맛이 가버린 건 어쩔 수 없었고, 그나마 체력 상태는 다들 양호하니 주력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세우는 게 중요했다.
‘치명타만 안 맞으면, 급속도로 붕괴할 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다만, 1열 2열에 서 있는 둘 모두가 ‘확률적 턴 낭비’라는 엄청난 부정적 변수를 내포하고 있었다.
“셰이.”
“….”
“셰이야.”
“아. 네. 네? 네. 대장님. 불렀어요?”
멍하니 있던 셰이가 뒤늦게 반응했다. 맛 가기 전이라면 곧장 내 말을 알아듣고 문을 열었을 텐데. ‘무기력’엔 의지와 체력 모두가 포함되어 있는 거 같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제일 환하게 웃고 에너제틱했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문. 열어야지.”
“아… 네.”
저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셰이의 모습을 보니, 그럴 기회가 된다면 그녀도 멘탈 케어를 꼭 해주고 싶었다. 영입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던 1티어 천재 성전사가, 저렇게 망가지게 두는 건 대장 실격이지 않은가.
꼭 보스를 조져서, 반드시 세일럼에 귀환하리라.
살짝 비틀거리는 셰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1-8에 진입했다.
“아….”
1-8은 일반 괴물 방이었다.
[희생양]
[평신도]
[수습 사제]
피지컬들은 그렇게까지 보잘 것 없는 잡몹 트리오. 하지만 저 구역질나오게 생긴 희생양과 좆같은 수습 사제새끼를 보니, 마음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공포!”
“공포를 경외하라!”
‘네놈새끼들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셈이었지….’
전투 시작 전, 미니 공포무새들이 공포를 부르짖으며 우릴 반겼다. 고작 일반 괴물들이 피습도아닌 상황에서 우릴 압도하는 경우는 없었으니, 이제 정상적인 속도 체크가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벌써부터 변화가 확 느껴졌다.
괴물만 보면 발작하듯 폭언을 쏟아내던 셰이가 칼을 늘어뜨린 채멍하니 서 있던 것이다.
나 무기력해요.
이 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 했다.
[속도 체크]
셰이 : 2
카야 : 5
유진 : 7
희생양 : 3
평신도 : 5
수습 사제 : 3
[유진의 턴이 제일 앞서게 됩니다.]
속도가 4였던 셰이는 무기력 페널티 때문에 속도가 2 감소해 속도 꼴등이 되었다. 카야는 집착 페널티에 오히려 속도가 1 오르는 것 때문에 5가 되었고.
‘수습 사제를 끌어와야되나, 아니면 1열 희생양부터 조져야하나.’
평소였다면, 주저 없이 수습 사제를 끌어오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셰이가 문제였다. 셰이의 속도가 2로 줄어드는 바람에, 끌어와도 수습 사제보다 후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페널티 때문에 데미지도 줄어든 카야가 저놈을 한방에 조질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고.
머리 아프게 경우의 수를 계산하며 고민하다가, 결국은 끌어당기기로 했다. 적어도, 평신도 새끼는 바보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딜 도망가]
[유진이 수습 사제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2/23]
[유진이 수습 사제를 끌어당기는데 성공합니다.]
[수습 사제가 1열에 위치합니다.]
[희생양과 평신도가 한 칸씩 밀려납니다.]
“으아악! 공포시여!”
일단 풀링은 성공했다. 희생양이랑 평신도가 한 칸씩 뒤로 밀렸고, 평신도는 아마 턴을 넘기거나 희생이랑 자리를 바꿀 것이다. 이제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카야와 평신도의 속도가 같습니다.]
‘기대는 안 하는 게 좋겠지.’
카야와 평신도새끼 사이에서 속도 굴림이 발생하겠지만, 카야의 굴림 승률을 생각해보면….
[속도 굴림]
카야 : 4
평신도 : 3
[카야의 턴이 평신도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아니 이걸?’
역시 카야! 믿고 있었다고!
셰이한테 계속 져도 어때? 중요할 때 괴물을 상대로 이기면 되는 거지!
나는 흡족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철퇴를 휘두르라 지시했다.
하지만….
“하아아…!”
[카야가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카야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어…?”
[카야의 최대 공격력이 1 증가합니다.]
[카야의 속도가 1 증가합니다.]
[카야의 공격이 적중할 시 무작위 아군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카야! 너…!”
“하아아… 대장…!”
카야의 얼굴은 붉어져있었다. 숨은 가빠졌고, 눈은 초점이 풀려있었다. 그녀는 철퇴를 든 채 내게 다가와서는 뒷걸음질 치려는 나를 강제로 껴안았다. 소름끼치는 악력이 날 붙들었다.
“카야! 뭐하는 짓이야! 지금 전투 중이라고!”
“대장, 대장… 하아…!”
“하하… 미치겠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첫 턴부터 턴이 날아간 것도 웃겼지만, 카야의 행동을 보니 진짜로 맛이 갔다는 게 확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세일럼에서 따로 회복하지 않는 이상, 던전 내에선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여기서 정신 차리라고 해봐야 카야가 통제가 될까?
내 생각엔 아니었다.
2차선 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한 차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하면 다시 제 차선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지만, 반대 차선도 아니고 아예 도로 밖으로 벗어나 논두렁에 쳐박혀버린 차한테 그런 말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강제로 끌어내야지.
“명령이다. 카야. 지금 당장 내 몸에서 떨어져.”
“대, 장…?”
“두 번 말하게 할 셈이야?”
“….”
카야는 버려진 강아지처럼 엄청나게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이 절망과 슬픔에 빠지는 걸 보는 내 마음도 편치 않았으나, 지금은 어떻게든 최소한의 피해로 전투를 마무리하는 게 중요했다.
카야의 턴이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간 이상, 일단은 괴물들의 공격을 그대로 쳐맞는 일만 남았다.
“공포를 위하여!”
“---.”
[평신도가 한 칸 앞으로 이동합니다.]
[희생양이 한 칸 뒤로 밀려납니다.]
그 사이 평신도는 턴을 넘기는 대신 희생양을 뒤로 밀어내고 자신이 2열로 나아갔다.
[수습 사제와 희생양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수습 사제 : 3
희생양 : 2
[수습 사제의 턴이 희생양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속도 굴림의 승자인 수습 사제는 다시 한 번 기분 나쁜 그 책을 꺼내들었다. 곧 책에서 크고 두꺼운 촉수 한 가닥이 셰이에게 쇄도했다.
“필멸자로서 마땅히 공포를 맞이하라!!!”
[위대한 공포시여 – 1장 2절]
[수습 사제가 숭배자의 복음 구절을 읊으며 공포를 외칩니다.]
“그리하면 마침내 필멸의 덧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운명을 맞이하리니!”
“아.”
촉수가 셰이의 갑옷에 툭, 닿은 순간.
[수습 사제가 셰이에게 1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셰이 남은 체력 12/17]
[셰이 멘탈리티 –13]
“아아….”
셰이의 손에서 클레이모어가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