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1구역(2트)(17)
환상이 보여준장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공포 새끼가 지어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또 환상에 내가 물리력을 가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카야가 다른 의미로 당하는 걸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지금까지는 잘 참았는데, 왜 하필 지금은 못 참는 거냐고 자문했지만… 알 수 없었다.
그냥.
화가 났다. 엄청나게.
환상 속의 카야가 날 인지할 리 없는 걸 알면서도. 벌벌 떨리는 온몸과 눈동자가, 꼭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눈동자가 날 바라보는 것 같아서.
내게 도움을 청하는 거 같아서.
그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망설임 없이 환상에 뛰어들었다.
“이 씨발!!!!!”
하지만, 정작 내 의도와 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다가간 만큼 환상도 뒤로 물러난 것이었다.
나는 체력 안배도 생각않고 더 빠르게 뛰었다. 물론, 그만큼 환상도 더 빠르게 물러났다. 더 빡치고 울화통 터지게 닿을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 사이 환상은 계속 진행됐다. 주춤주춤 물러나 등 뒤 벽에 가로막힌 카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자들 중 한 명은 슬쩍 물러나 망을 보고 있었고, 둘 중 하나는 카야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거, 놔줘.”
“이거?”
짜아악-!
“아악!”
“건방지게.”
환상 속 카야는 어렸을 때부터 쭉, 반항하지 않았다. 반항하면 더 큰 폭력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는지, 자기 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랬는지는 내가 알 길이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우악스럽게 손목을 잡혀도, 뺨을 맞아도 저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뺨을 때렸던 남자가 그녀의 옷깃을 잡는 순간.
“…안 돼.”
“지금, 뭐라고 한 거냐 이 잡종년아.”
“다른 건 다 참았지만… 그것까진 안 돼.”
“하.”
카야는 처음으로 반항했다. 남자들도 카야의 거부 반응을 처음 보는 건지 제법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 말로 거부하는 것 말고 그 이상은 없었던 카야였고, 그건 남자들의 불같은 행동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네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쩔 건데. 어? 어? 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어제꼈던 남자는검지 끝으로 카야의 가슴께를 쿡쿡 찔렀다. 카야는 팔로 가슴을 가리면서도 옷을 벗기려는 손길에는 저항했다.
“하… 잡종년 주제에, 꼴에 여자라고.”
실랑이를 벌이던 남자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졌다. 반항이라는 걸 할 줄 모르던 강아지가 이를 드러낸 것처럼 불쾌감이 치솟았다. 남자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카야는 힘껏 저항했지만, 남자, 거기에 지켜만보고 있던 다른 남자가 합세하자 금세 양 손목이 구속됐다.
“하. 우중충한 머리색만 빼면, 얼굴이랑 몸매는 봐줄만 하단 말이지.”
“야. 할 거면 빨리 하자. 여기 오래 있어봐야 별로 좋을 거 없어.”
“쯧.”
“제발, 그만 둬….”
퍼억-!
“아윽….”
한 남자는 카야의 양손을 붙잡고 있었고, 다른 남자는 연신 그녀의 배를 가격했다. 카야가 반쯤 정신을 잃고 나서야 구타는 끝이 났고, 이윽고 그녀의 옷에 손을 댔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어! 이 쓰레기 새끼들아!!!”
닿지 않을 비명이었다.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녀는 고통스러워했고, 모습은 굉장히 비참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나도, 고통스러웠고 마음이 비참했고.
지켜보는 내 마음이 그러든지 말든지, 환상 속 남자가 카야의 상의를 반쯤 찢으며 벗기고, 그녀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가 드러난 순간.
“하! 꼴에 수녀님 따라간다고, 벌써부터 교인 행세하는 거 봐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카야 자매님.”
남자는 피식 웃으며 목걸이를 뜯어내려 했지만, 이 자리에 없었던 제3자의 목소리가 분위기를 순식간에 깨뜨렸다.
자매님.
이런 단어를 쓸 사람은, 주기적으로 오는 라엘라 교단의 수녀뿐이었다.
분위기가 급변했다.
수도와는 멀리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에, 교단의 파급력은 왕실의 힘보다도 강했고 아무리 변방 시골 사람이라 해도 교단의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잘 알았다. 애초에 교단 사람들을 약간 별세계 사람 취급하지 않았나.
그랬기에 남자들은 혀를 차면서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물러났다.
“자매님. 찾고 있었어요.”
“….”
“자매님.”
수녀는 말없이 카야의 옷을 정돈해주었다. 그리고 살포시 안아주었다. 카야는 안긴 자세에서 눈물을 흘렸다.
카야의 눈물을 본 나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의미 없는 외침을 허공에 내뱉었다.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하지만 환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몸과 마음 양쪽이 축났지만, 주저앉을 여유는 없었다.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빨리 벗어나야 했다. 일단은,저 이름 모를 수녀에게 감사함을 품고 앞으로 나아갔다.
[우연이 존재하나. 필연이 존재하나.]
카야가 나오는 환상지대를 완전히 지나쳤다. 그 순간 목소리가 다시 파고들었다.
[그 여자가 겪었을 공포를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애써 묻어두었던 공포를 끄집어낸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더 깊이 파고들수록 내재된 공포는 자주, 그리고 더 심하게 그녀를 괴롭힐 텐데.]
[그럼에도 너는 그녀를 끝까지 동료라는 굴레를 씌워 그녀의 속을 망가뜨릴 것인가.]
“닥쳐. 그쪽이 수작만 안 부리면 될 일이야.”
[이기적이고도 이해할 수 없다. 진정 이곳의 끝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공포가 어찌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적어도 공포에 순응하다못해 이용하고 번성해버린 이 빌어쳐먹을 도시는 없어지겠지. 역겨운 숭배자새끼들이랑 불쌍한 희생양들도 없어질 거고.”
[결국은 부질없는 일이다. 공포는 어디에도 존재하고, 누구에게도 존재한다.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이니까. 너희 인간들이 던전이라 부르는 이곳이, 처음이자 홀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럴 리 없다.
“아까, 아까 말.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냐고!”
[666번.]
“이 씨발, 갑자기 뭔.”
[네가 공포를 정복한 횟수다.]
난 어느새 멈춰서있었다.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너, 너 이새끼… 너. 너…!”
[그토록 정복해도, 공포는 없어지지 않는다. 이 세상엔 필멸자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각자 공포를 느끼는 기준과 역치가 다르다. 그렇기에, 네가 이곳에서 아무리 날뛰어봐야 결국은 부질없는 짓에 불과하다.]
“말도 안 돼! 되는 대로 지껄이지 마 이 씹새끼야!”
[희망을품으면 그만큼 낙차가 크고, 그것은 공포의 양식이 되는 법.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동료들이 느끼고 있을 부정적인 감정들이 공포를 더욱 더 길어지게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나를 믿어라, 나를 따라와라. 라고 말한 너때문에 말이다.]
아찔했다.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여전했다. 귀를 막았다. 소용없었다.
[저항하지 마라. 모든 것은 끝에 가서 무용하다.]
“닥쳐….”
[바다를 손으로 퍼서 없애려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닥쳐…!”
[포기해라.]
[지금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동료들을 위해서.]
아예 응대하지 않았다.
[이기적이군.]
[네 동료들의 생각은 너와 다를 텐데.]
내 동료들은 강하다. 비록 지금은 공포에 잠식되었다 해도, 회복할 수 있다. 동료들이 내게 보여주었던 의지는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고, 1구역을 돌파하고 세일럼에 귀환만 할 수 있다면.
[용사들을 도구로 다루는 방식과 다를 바 없다.]
[동료들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놓아주는 것이 맞겠지.]
이 모든 것들을 다소 뼈아픈 경험과 추억으로 남길 수만 있다면.
[포기해라.]
우리는 진정으로 공포에 맞서는 용사들Heroes Against Terror이라는 이름에 한 층 더 가까워질 게 분명했다.
“포기 못 해. 아니. 안 해.”
[포기해라.]
“던전이 또 다시 생길 것이고,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럼 그냥 거기 짜져 있어! 가만히 닥치고 있으라고! 네놈 말대로 어차피 다시 생길 거라면! 사라지지 않을 거라면!”
어느새 나는 달리고 있었다.
“내가 뭘 하든! 동료들이랑 뭘 하든! 거기서 음험하게 관음하면서 자위나 처 하고 있으라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무언가가 휙휙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얼핏 박살난 중갑 조각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두 동강 난 대검조각도 있었던 것 같았다. 비명소리도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채찍 소리나 살이 타는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정황상 셰이와 관련된 환상 같았지만….
이 악물고 무시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셰이를 본다면 진짜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무시하고 달렸다. 숨이 터질 것 같았지만, 계속 달렸다. 곁눈질도 하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더 이상, 여기서 보이는 것들은 날 열 받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저 빌어먹을 새끼가 말한 게 어디까지 진실일지, 설령 전부가 진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공포에 맞서는 용사대를 이끄는 대장이다. 그것은 불변했다.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어느 순간, 좆같았던 목소리도. 환상도 보이지 않았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기나긴 외길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바닥의 바닥까지 힘을 긁어내 앞으로 나아갔다.
“이건….”
길의 끝에, 낡은 책 한 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표지에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책을 집어들었다. 바스락거리는 게, 조금만 힘을 줘도 망가질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겨보았다.
「666번의 승리와 6003번의 패배.」
제목도 없던 이 책은.
「약 6700번 정도 반복된, 수도 없이 다양한 승리와 패배에서 단 한 가지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더 롱 테러 플레이 기록이 담겨있었고.
「그건 바로, 적어도 끝날 때까지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6670번째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령, 여러 가지가 바뀌어 있다 해도.」
「나는(헨드릭은)」
「공포에 맞서는 용사들을 이끄는」
「대장이니까.」
마지막엔, 현재진행형으로 내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하하. 하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한참을 보았다. 참 많이도 했구나, 싶다가도… 지구에 있을 적 더 롱 테러를 플레이할 때의감정이 떠올랐다.
기겁하고, 놀라고, 환호성을 지르고,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욕도 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숨도 못 쉬고 몰입하고, 우울해하고… 게임 분위기상 운 적은 없었지만 게임 속 용사들과 함께하며 참 많은 감정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제4의 벽을 넘어, 내가 진짜 그들의 대장이 되어 그들과 같은 곳에서 숨을 쉬고 그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과 함께 공포에 맞서는 이 순간.
지금.
“언뜻 계산해보니까 딱 한 판 차이로 10%를 못 찍은 거 같은데….”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불편해서라도 10% 채워야겠으니까, 그러니까.”
쩌적- 쩌저적- 쩌저저적-
검은 세계가 갈라지며,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 몸에서 꺼져. 빌어먹을 관음증 공포포기무새 새끼야.”
**
[유진이 저항에 성공합니다.]
[잠식을 시도한 공포를 물리친 유진이 각성합니다.]
[유진이 정신이상 ‘불굴’에 걸립니다.]
세상이 밝아졌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여전히 어둡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밝아졌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날 멍하니 바라보는 카야와 셰이의 모습이 보였다.
[몇 번을 넘어지더라도 끝내꺾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통해 각성했습니다.]
[멘탈리티 수치가 –50까지 회복됩니다.]
[걸려있던 모든 디버프가 해제됩니다.]
[최대 체력이 10% 증가합니다.]
[방어력이 10% 증가합니다.]
[멘탈리티 하락 속도가 20% 감소합니다.]
[일정 확률로 동료들의 멘탈리티를 소폭 상승시킵니다.]
[사경에 들어서거나 구역 보스를 죽이면 해제됩니다.]
그래. 애들아.
내가 너희들의 대장이고, 구세주가 되어 돌아왔어.
“다들 정신 차려. 가자. 앞으로.”
카야와 셰이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