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1구역(2트)(16)
[공포가 호시탐탐 용사들의 정신을 굴복시키려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4]
[카야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3]
“…….”
1-8에 도착할 기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걸음을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통로를 걷던 중 멘탈리티가 까였고.
그토록 경계하고 케어했던 멘탈리티 –100, 그 임계점을 돌파하고 말았다.
아.
파국이다.
[셰이의 멘탈리티가 –100을 초과했습니다.]
[공포가 셰이를 잠식합니다.]
[셰이가 공포의 잠식에저항합니다.]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고.
“여신님…….”
우뚝 멈춰선 채 조용히 여신을 찾고 있던 셰이가, 무릎을 꿇더니 몸을 웅크렸다. 셰이가 공포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었다.
‘셰이가 각성할 확률은 9%… 아무리 더 롱 테러라곤 하지만.’
그래도 바랄 걸 바라야지.
셰이가 완전히 미쳐버리는, 그러니까 더 롱 테러식 표현으로 공포에 잠식되는 순간.
옆에 있던 카야도 그 영향을 받아 멘탈이 갈릴 것이고, 그녀도 공포에 잠식되겠지. 그 다음은 내 차례가 될 것이고.
괜찮다. 예상했다. 각오했던 바다.
하지만….
--------------!
끔찍한 소리가 뇌리에 스치고.
[셰이가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셰이가 공포에 잠식됩니다.]
[셰이가 정신이상 ‘무기력’에 걸립니다.]
저항에 실패해 무너져버린 셰이의 뒷모습과 함께, ‘혹시?’ 따위는 없다는 듯 절망적인 상황을 무기질적으로 전달하는 세 줄의 메시지를 보는 순간.
“아….”
[동료가 끝내 공포에 잠식되는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애써 싹틔웠던 작은 희망이 짓밟히고 애써 억눌렀던 공포심이 날뜁니다.]
[카야 멘탈리티 – 20]
[유진 멘탈리티 – 18]
도미노가 무너졌다.
스으으아-
[카야의 멘탈리티가 –100을 초과했습니다.]
[공포가 카야를 잠식합니다.]
[카야가 공포의 잠식에 저항합니다.]
셰이의 정신이상 ‘무기력’에 대한 메시지를 확인하기도 전. 그걸 볼 여유가 있냐는 듯, 셰이를 물들였던 공포는 바로 옆에 있던 카야에게 옮겨갔다.
멘탈리티가 –93이었던 카야는 당연히,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100이 붕괴됐다.
무릎을 꿇고 몸을 웅크린 채 기도하며 저항하던 셰이와는 달리, 날 바라본 자세 그대로 굳어져있던 카야.
날 바라본 듯, 내 주위에 있는 허공을 바라보는 듯 초점 없는 흐릿한 눈동자를 한 채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던 카야. 이내 털썩 쓰러지더니 발작 환자처럼 미친 듯이 떨다가, 멀쩡해졌다가를 반복하던 그녀가 죽은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발작이 멈췄을 때.
[카야가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카야가 공포에 잠식됩니다.]
카야 또한, 저항에 실패했고.
[카야가 정신이상 ‘집착’에 걸립니다.]
그녀 또한 공포에 잡아먹혔다.
“내 능력에 비해… 꿈이 너무 거창했어요… 헤헤….”
“대, 장… 대장… 대장…!”
하하.
개판이구나.
[동료가 끝내 공포에 잠식되는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애써 싹틔웠던 작은 희망이 짓밟히고 애써 억눌렀던 공포심이 날뜁니다.]
[셰이 멘탈리티 – 19]
[유진 멘탈리티 – 19]
야. 나도 이미 –100 넘었잖아. 굳이 이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
[유진의 멘탈리티가 –100을 초과했습니다.]
[공포가 유진을잠식합니다.]
[유진이 공포의 잠식에 저항합니다.]
“아… 데쟈뷰냐….”
사경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으며, 빠르게 의식을 잃었다.
**
‘아. 또 여기네.’
사경에 처음 도달했을 때처럼, 재빨리 눈을 깜빡여봤다. 그리고 팔다리를 움직여봤다. 그때처럼 사방이 어두컴컴하긴 했지만, 그때와는 달리 내 몸 정도는 흐릿하게나마 보일 정도는 되었다. 몸도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었고.
그 차이점 말고도, 이곳은 낯설지 않았다.
“설마, 또끝까지 걸어가야 하는 건가?”
아마도 여긴, 1회차 1-2에서 공포무새의 필살기를 쳐맞고 도달했던 내정신세계 혹은 악몽 비슷한 곳일 거다.
“그때랑 똑같다면, 저항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 같은데.”
일단 앞으로 걸었다. 길은 그때처럼 외길이었으니 망설일 거리는 없었다. 주위엔 아직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셰이랑 카야는 대체 어떤 걸 본 걸까.’
공포의 상자방에서 겪었던 악몽 비슷한 걸 봤을까. 아니면 지금 나처럼 다른 종류의 정신공격을 받은 걸까.
정신이상으로 무기력과 집착에 걸린 걸 보면… 일부분이나마 알 것 같긴 하지만. 특히 정신을 잃기 전에 봤던카야의 눈동자가, 좀, 아니많이 섬뜩했었지.
‘일단 나부터 생각하자.’
걸었다. 계속 걸었다. 저번엔 어땠었지, 생각했지만 그때도 꽤나 오랫동안 걸었던 것 말고는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사실, 그때 겪었던 것들이나 감정, 고통들이 명확하게 기억나진 않았다. 그저 오래 걸었고, 무언가 절망적인 걸 봤고, 무언가를 계속 속삭여서 날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할 뿐.
그래도 지금은 이 길 위에 무엇이 놓여있든, 지금 상황보다 절망적일 수 없었기에 더 절망할 자신이 없었으며.
어떤 좆같은 말로 날 짜증나게 하고 유혹하고 굴복시키려 해도, 동료들을 끝까지 데리고 던전의 끝을 본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는 이상 꺾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겨우 이딴 것이 공포의 잠식이라면, 백 번도 더…까지는 아니지만 세 번 정도는 견뎌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네 목표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
“뭐야!?”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게 너 같은 필멸자들의 운명이라 할지라도, 계속 이어나가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불가능하긴 지랄!”
내가 몇 판을 클리어했는데! 물론 이 dlc랑 최고난도는 처음이지만, 그래도!
[공포를 받아들여라. 순응해라. 필멸자로서 가져야하는 당연하고도 근본적인 감정을 인정해라. 그리하면 새로운 운명이 네 앞에 펼쳐질 것이다.]
“닥쳐! 하루 종일 공포만 외쳐대는 그딴 병신새끼가 되라고 말하는 거냐? 그게 새로운 운명이라고? 지랄하지 마 이 씹새끼야!”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네가 보는 것은극히 일부분일 뿐.]
“궁금하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딴 좆같은 소리로 시답잖은 소리할 거면 당장 꺼져! 아니! 날 여기서 내보내!”
목소리는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미친놈처럼 허공에 씩씩 소리치고 화를 낸 꼴이 되었다.
‘그래. 이게 저 새끼의 작전일 수 있어. 힘 빼게 하고 격앙시키는 거지. 절대 휘말리지 말자. 휩쓸리지 말자. 끝까지 걸어갈 생각만 하자. 견뎌내자.’
머릿속에서 계속 침착과 릴랙스를 되뇌며 걸어가니, 이때는 또 잠잠했다. 그래도 난 방심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안심하는 순간, 좆같은 그 목소리가 다시 날 괴롭힐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으니까.
정신이 배는 빨리 피로해진 기분이었지만, 아직은괜찮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외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눈앞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만 아니었다면.
“잡종년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와? 썩 안 꺼져?”
“빵을….”
“돈이면 단 줄 알아? 네년한테 팔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꺼지라고! 신고하기 전에!”
고개를 푹 숙인 채 동전을 갈무리하는 회색 머리 여자아이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빵집 주인.
머리색과 눈동자색, 그리고 많이 어려진 것같지만 못 알아볼 수 없는 아름다우면서도 어려져서 그런지 앳된 얼굴. 카야였다.
‘어린 카야… 설마. 과거?’
갑자기 카야의 과거 모습이 왜 나오나 싶었지만, 그건 이제 시작이었다.
“쯧쯧. 말세다 말세야. 엘프새끼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끼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씨발새끼랑 붙어먹을 생각을 한 거지?”
“얼굴 하난 봐줄만 하잖아. 얼굴 보고 반해서 유혹한 거겠지. 창녀마냥.”
“그런다고 넘어간 엘프 새끼도 병신이네.”
“싸지른 게 있으면 처리는 하고 가야지, 뒤져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아이가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놓고 오고가는 패드립.
종족을 초월한 사랑을 한 게 죄라면, 마을 사람들에게 저지른 건 그 죄밖에 없었던 젊은 부부. 그 사랑의 결실인 어린 카야는 순식간에 병신 아빠와 창녀 엄마를 둔 오물이 되어있었다.
“야! 네 아빠 엘프였다매?”
“….”
“대답 안 해?”
“…응.”
“이 씨발년이!”
짜악-!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들 셋이 어린 카야의 뺨을 때렸다. 뺨을 붙잡고 쓰러진 어린 카야를 남자애들은 이를 악물고 짓밟았다.
“악! 아악!”
“우리! 아빠가!”
“아악!”
“엘프새끼한테! 돌아가셨어!”
“아윽….”
“우리 아빠도!”
“내 아빠도!”
엘프와의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은 세 남자아이의 분노는,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어린 카야에게 풀어졌다. 자기 편이 하나도 없던 어린 카야는 하소연할 데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거라곤 몸을 웅크려 최대한 급소를 가리는 것뿐이었다.
“….”
정신을 차려보니 입술에서 피가 났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다 입술까지 깨물었나보다.
‘보지 말자. 숨기고 싶었던 과거를 이런 식으로 보는 건, 옳지 않아.’
눈앞에 펼쳐진 한없이 실제같은 환상에서 애써 눈을 돌렸다. 하지만 눈을 돌리면, 그곳에서 다시 환상이 펼쳐졌다.
어딜 눈을 돌리냐고. 무조건 보라고. 이 길을 걸어가려면 안 보고는 못 지나간다고.
그런 악의가 느껴졌다.
‘카야가 말해주기 전까진, 저 환상은 믿을수 없어. 내 이성을 흔들기 위해 그럴싸하게 자극적으로 거짓되게 만든 환상일 가능성도있지.’
날 화나게 할 거짓 환상을 억지로 보여주겠다면, 눈을 감아버리겠어.
나는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 다섯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마저, 머릿속으로 더 생생하게 환상이 보였으니까.
“씨발새끼, 좆같은새끼, 버러지같은새끼…!”
분노를 욕으로 분출했다.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서였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고. 내가 눈 하나 까딱 할 거 같아? 어차피 환상이잖아? 실제로 일어난 일 아니잖아? 화나게 하려고? 그 틈에 다시 좆같게 속삭이려고?”
화는 날 것이다. 거짓이라고믿고 있어도, 눈앞에서 동료가 아파하는 걸 보면 나도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포새낀 날 어설프게 건드렸다. 되려 내 경계심만 높아진 것이다. 난 애써 웃어보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통과하자.’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자 환상이 스르륵 지나갔다. 카야가 허구한 날 구타를 당하는 모습, 한국의 키보드 워리어도 한수 접고 갈 폭언을 당한 후 감정 없는 얼굴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던 모습,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문득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져 눈물을 흘리던 모습….
최대한 눈에 담지 않고 빨리 걸어갔지만, 아예 안 보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 악물고 무시한 채 빨리 걸어간 게 효과가 없진 않았는지, 환상의 ‘두께’가 금세 얇아졌다.
‘저 환상구간만 넘어가면, 끝이다!’
덩달아 울적해지고 화가 났다. 그래도 이제 곧 끝이었다. 음험한 공포 새끼, 남의 약점가지고 사람 정신이나 뒤흔들 줄만 할고. 쫄보 새끼. 3구역, 아니 이젠 4구역인가? 좀 걸리겠지만, 딱 기다려라. 언젠가 대가리 부수러 갈 테니까.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전과 같이 환상을 지나치려 했다.
“너… 수녀님 따라간다는 거, 진짜냐.”
첫 환상 때 봤던 모습보다 상당히 성장한 카야가 흠칫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녀가 성장한만큼 더 성장한, 더 이상 남자 아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남자들은 카야를 둘러싸고 그녀를 노려봤다.
그 시선엔… 예전에 없었던 다른 종류의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설마.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멈추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멈춰버린 발걸음.
“너 같은 잡종년이 알아서사라져준다니 마을 입장에선 두 손 들고 환영할만한 일이긴 한데….”
말하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카야의 전신을 훑었다.
“어디서 들었거든. 잡종은, 불임이라고.”
카야는 흠칫 떨면서 뒤로 주춤거렸고, 남자들은 실실 웃으면서 포위망을 좁혔다.
“이 씨발새끼가---------!!!!”
나만 보이는 환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거짓이라는 걸 믿고 있으면서도.
나는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