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2화 〉1구역(2트)(15) (42/218)



〈 42화 〉1구역(2트)(15)

“손님은 손님인데, 꽤나 위험한 상태군?”

“후우… 위험한 일은  일어날 겁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그건 다행이군. 손님과 손놈은 점 하나 차이니까.”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장 최악은 피했으니까.

암흑상인의 매점, 통칭 상점은 여러 가지 이벤트방  하나였다. 1-3의 공포의 상자방도 이벤트방 중 하나였던 것처럼.

이놈들은 세일럼 물가의 50%가격으로 우리 물건을 사들이고, 150%가격으로 물건을 파는 아주 악랄한 놈들이었다. 무조건. 에누리 없음. 외상은 당연히 없음. 가뜩이나  나올 정도의 세일럼 물가에서 50%를 더 받아 처먹는 놈들이 악랄한 놈들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하지만 아쉬운 건 항상 용사들이었다.

- 꼬우면… 아시죠?
- 씨-발 이 좆같은 돈벌레 새끼들! 꺼져버려!
- 안녕히 꺼지십시오.

오죽하면 더 롱 테러 커뮤니티 게시판에 상점주인 짤이 악랄함의 상징으로 돌아다녔을까.

하여튼 정말 급한 소모품이 있거나 탐나는 물건이 있지 않는 이상, 상점에서 다른 뭔가를 사는 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됐다.

난동을 부린다? 그런 선택지도 있긴 있었다.

애꿎은 용사들이 보스가 아닌 상점주인에게 뒤지는 결말을 보고 싶지 않는 이상에야, 절대 건들지 않는 금단의 선택지긴 하지만.

‘일단은… 입장세를 내야겠지.’

물건을 보기도 전에 나는 정말, 게임 상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정말 긴급한 상황에서만 드물게 이용했었던 ‘입장세’ 기능을 떠올렸다.

“입장. 둘.”

갑작스런 말에 상점주인은 한쪽 눈썹만 살짝 움직였을 뿐, 별말 없이 손바닥을 이쪽에 내밀었다.

“1번, 1인당 1금화.”

“니미.”

괴물들을 잡고 얻은 금화  두개를 꺼내 손바닥에 툭 던졌다. 속이 쓰라렸다. 상점주인의 시선에 나는 눈으로 동료들을 가리켰다.

“입장 완료. 다른 물건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대답 대신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진이 다 빠졌다.

“대, 장….”

“대장님….”

“일단, 잠시나마 쉬어둬. 여기. 물도 마시고. 마시다가 배고프면 식량도 까먹고.”

일단 입장세를 내서 시간을 벌었다. 정체불명의 상점주인은 물건 이외에도 ‘입장’이라는 무형의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돈을 내면 낸 만큼 던전의 기운을 막아주는 서비스였다. 즉, 아까 나는 2금화를 내서 셰이와 카야에게 들이닥칠 멘탈리티 하락을 한 번 피한 것이었다.

더 간단히 말해 돈으로 유예시간을  것.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것 때문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나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아꼈고.

돈을 벌기는커녕 소비만 했고 또 나아진 점은 없었지만, 방 하나를 건넜는데 현상 유지를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의미가 아예 없진 않았다.

물론, 존나 막막했다. 갓 자대 배치 받고 병장 새끼가 나한테 눈 감아보라고 한 다음, 그게  미래라고 말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앞이 깜깜했다.

“카야. 셰이. 주목해.잘 들어.”

“….”

대답은 없었다. 대답할 정신도 아니겠지. 기절하거나 잠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들은 평균 이상의 정신력 소유자였다.

“앞으로 세 번 남았어. 딱 세 번이면, 던전의 한 구역도 돌파가 끝나고 세일럼에 귀환할 수 있어. 그리고 우린 지금까지 6번을돌파했고 7번을 돌파하기 전이지.”

물로 바짝 메마른 입술을 적셨다.

“뭐가 어떻게 튀어나올지 몰라. 이렇게 진지하고 비장하게 말했는데 다음 방에 바로 휴식처가 나오고, 그 다음 방에 다시 상점이 나올 수도 있어. 아니면 잔인하게도 정예로만  번 연속 나올 수도 있고.”

극단적 예시였지만 더 롱 테러의 던전이기에 아예 배제할 수도 없는 게 웃길 따름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일 중요한 건….”

파지직-!

“이 씨발 장난쳐? 몇 분이나 지났다고!”

[음습한 공포의 기운이 용사들 곁에 맴돕니다.]
[카야의 입장 효과가 소멸됩니다.]
[셰이의 입장 효과가 소멸됩니다.]
[유진 멘탈리티 –4]

상점주인은 알듯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나는 이를 갈며 금화 2개를 추가로 헌납했다.

“너희들. 너희들도 인정할 거야. 까딱하면, 선을 넘어버릴 것 같다는 거. 굉장히 위태롭다는 거. 기억  나는 거 아니지?”

둘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스로 한숨을 참았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V자로 내민 두 손가락 중, 중지를 접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돈으로 모조리 식량을 산 다음 회복용으로  쳐먹고 내가 전열에 서는 거야. 너희들이 공격당하는 확률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는 거지.”

“그.”

“마저들어.”

카야의 말을 차단했다. 그녀가 할 말이라곤 안 들어도 뻔했다. 그건 안 된다고, 자기가 대신 맞겠다고 하겠지. 나는 검지를 마저 접으며  번째 선택지, 사실상 첫 번째 선택지를 강요하기 위한 극단적인 방안을 입에 담았다.

“입장 효과가 소멸되는 순간, 바로 이곳을 떠나는 거야. 아무것도 없이, 그대로.”

순간, 카야는 이해가  된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나는 이걸 어떻게 말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1번이나 2번이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1번을 택하든 2번을 택하든.

1-8로 가는 도중, 아주 매우 높은 확률로 저기 멍하니 앉아있는 셰이의 멘탈이 –100을 돌파할 거라는 것.

요컨대.

지금  자리는 절망적인 미래를 맞이하기 전, 그나마 제정신일 때 마지막으로 생각 교환  각오 다지기 같은 걸 하는 것이었다.

상점에 들어오기 전까지 엄청나게 긴박하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던 상황이었지만… 묘하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어쩌면, 마음속 한쪽 구석에선 이미 이렇게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침착함이 아니라 익숙함이나 해탈의 경지가 아닐까.’

혹시 또 아는가. 낮은 확률로 미쳐버리는 게 아니라 각성에 성공할지?

카야는 셰이를 흘끗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뜻대로… 해주십시오.”

“지금 우리가 가진 돈은 함께 싸워서  돈인데,  혼자 정해도 되겠어?”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카야의 목소리 또한 묘하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녀의 목소리와 분위기는 불과  분 전과 너무나 달라서 소름 돋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어쩔  없어.’

최선의 판단과 가끔은 그걸 뛰어넘는 도박수.

그러나 거기에 맞서는 던전의 불가항력.

용사대와 던전 1구역의 승부는, 일단은 우리 용사대가 넉다운 당하기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다.

‘그래. 상점이 안 나왔다면 모를까, 상점이 나왔으니… 식량을 사자.’

결정을 내린 나는 잽싸게 상점주인에게 다가가 카탈로그를 받아들었다. 혹시 모르니 식량 말고 다른 쓸 만한 물건들이 있는지, 변수를 창출할 물건이 있는지 둘러봤지만 여기엔 없었다.

구역질 나오는 바가지 가격에 식량을 있는 대로 산 다음, 제대로 씹지도 않고 계속 삼켰다.

[유진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유진의 체력이 2 회복됩니다.]
[유진의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그 결과 내 체력은 13까지 회복됐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식량은 셋이  번 먹을 수 있는 분량만 남겨두었다.

속은 더부룩해졌지만, 일단 스치면 다시 사경에 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은 없어졌다.

‘어떻게 되든… 일단 살아남자. 살아남아야 귀환도 하고, 회복도 하고, 다음 구역에 도전할  있는 거지.’

셀 수 없이 많았던  중에, 클리어 각이 씨게 보이던 판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기믹 때문에 전멸한 경우도 있는 반면. 텄다고 생각하고 대충대충 되는 대로 플레이하다가 운이 좋아 깨는 판도 있었다.

내가 만약 더  테러 뉴비였다면, 숱한 클리어 경험과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실패 경험이 없었다면. 나도 패닉에 빠졌을지도 몰랐다.

‘4명 중 3명이 미친 상태에서도 클리어한 경험이 있어. 그것도 고난도에서.’

파지직-!

[음습한 공포의 기운이 용사들 곁에 맴돕니다.]
[카야의 입장 효과가 소멸됩니다.]
[셰이의 입장 효과가 소멸됩니다.]
[유진 멘탈리티 –4]

마침두 번째 입장 효과가 소멸됐다. 짧은 휴식 시간은 끝이 났다. 이제부턴 정말로 타임어택이었다.

“카야! 셰이 챙겨! 내가 앞장선다.”

“예. 대장님.”

상점주인에게 굳이 정겨운 인사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사경에 한 번 빠져서 스펙이 낮아진 대장과 심지가 거의 다 타버린 시한폭탄 둘이상점의 문을 나섰다.

**

두쿵- 두쿵-

심장은 거칠게 뛰고, 나는 걷는다.

오른발이 앞으로 나서면 왼팔을 뒤로 뻗고, 왼발이 앞으로 나서면 오른팔을 뒤로 뻗는다. 그렇게 팔다리를 움직이며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걷는다.

춥다. 쌀쌀하다. 스산하다.

하지만 갑옷 안은 땀으로 가득 차 있다. 땀은 고이고, 마음은 차가움에 떨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나가고 싶다. 하지만 신께 맹세한 바가 닻처럼 날 이곳에 묶어놓았다.

여신님께 기도하고 싶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다. 어째서 당신이 있는 세상에 이런 세계가 존재하는 거냐고. 당신이 진정으로 빛과 정의의 여신이라면, 어째서 빛 한줌 들지 않고 정의가 죽어있는 공간이 있을  있냐고.

손이 아프다. 뺨이 뜨겁다. 입안이 쓰라리다.

검이 너무 무거웠다. 평상시엔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다니던 검이었는데, 너무나 길고 거추장스러웠다. 검이 이렇게 길고 무거우면 뭐하나. 겨우 이런 곳에서, 내 마음 하나 제대로 못 다스리고 있는데.

포기. 수용.

수용. 포기.

포기. 수용.

수용. 포기. 포기.수용. 수용. 포기. 포기. 수용. 포기. 수용. 포기. 포기. 포기. 수용. 포기. 인내. 포기…… 인내?

인내.

난 언제까지인내해야 하는 거지.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하는 거지. 어떻게 여기서  인내할 수 있는 거지.

인내.

던전의 멸망을 바란다고 큰 소리 친 주제에, 첫 번째 구역의 보스도 못 보고 포기한다고?

포기.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 그런데도 던전은 오랜 시간 동안 공략에 실패했고, 이단은 박멸하지 못했지.

포기.

사실은,  그저 이상만 높았던 흔한 성전사가 아니었을까. 꿈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커서, 가랑이가 찢어져버린 게 아닐까. 그러니,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맞지 않을까.

포기.

아파. 몸도, 마음도. 머리도. 너무 아파.

포기.

대장님. 대장님을 끝까지 따르기로 했는데, 나. 생각보다  연약하고 쓸모없는 여자였나봐요.

포기.

힘들어.

포기.

무서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포기.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 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두려워-



두쿠웅-!



아.

아아.


나, 살아는 있는 거지?


헤헤….

헤헤…….

…………….

여신님. 힘을 주세요.여신님. 길을 알려주세요. 여신님. 알려주세요. 여신님. 여신님. 여신님.

여신님…….





[공포가 호시탐탐 용사들의 정신을 굴복시키려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3]

두쿠웅-!


[셰이의 멘탈리티가 –100을 초과했습니다.]
[공포가 셰이를 잠식합니다.]
[셰이가 공포의 잠식에 저항합니다.]



스아아악-!


“여신님…….”


--------------!

[셰이가 저항에 실패했습니다.]
[셰이가 공포에 잠식됩니다.]
[셰이가 정신이상 ‘무기력’에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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