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1구역(2트)(14)
“하아, 하아, 하아…!”
“헉, 허억.”
조심성은 갖다 버렸다. 오로지 신속한 이동에 초점을 두었다. 달리는 것 외에 신경 써야할 건 오직 마법횃불 밖에 없었다.
“조심!”
“흡!”
[카야가 함정을 피했습니다.]
[미약한 행운이 용사들의 몸놀림을 잠시나마 가볍게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2]
[카야 멘탈리티 +2]
[유진 멘탈리티 +2]
셰이의 외침 덕분에 카야가 가까스로 몸을 살짝 틀었고, 덕분에 어디선가 날아온 침 같은 것이 카야의 갑옷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운이었다.
우리들이 달리는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지만, 중갑을 입고 달리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니 괜히 답답해보였다. 갑옷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쿵쿵 발자국 소리, 격하게 호흡하는 소리 등 모든 게 거슬렸다.
‘씨발 존나 이게 뭐하는 짓… 아냐아냐아냐.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몸이 힘드니 잡생각이 덜 튀어나온다는 것 하나만은 봐줄만 했다. 이야, 이 와중에도 쓸데없이 긍정적인 생각을!
“문입니다!”
“좋아! 계속 달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시야 끝자락에 1-7의 문이 자그맣게 보였다. 이 정도 페이스라면 1분 내외로 도착할 수준. 나를 비롯해 동료들이 상당히 지쳤지만, 그 정도는 문 앞에 당도해서 잠시 숨을 고르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다행이다. 진짜. 아까 카야가 함정 피한 게 컸네.’
만약 그때 카야가 함정을 못 피해서 멘탈리티가 까였다면? 함정에 당하고 나서 카야를 보살피느라 시간이 지체돼서 다시 한 번 멘탈리티가 까였다면?
‘갓댐잇.’
더 롱 테러에서도 똥캐들이나 엽기조합을 들고 갔을 때 간혹 겪었던 상황이 코앞에 다가왔다.
씨발 적어도 1구역 보스까진 가야 할 것 아닌가!
‘저 방에서 뭐가 튀어나오든, 일단은 도착부터!’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그 와중에 마법횃불에 기름을 채워넣으며 앞만 보고 달리던 그때였다.
-----!!!
“대장님!!”
[피습!]
“…괴물이에요!”
씨-발, 나도 알아!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들이 용사대의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예상치 못한 괴물들의 등장에 용사대의 대처가 늦어집니다.]
[속도 체크를 건너뛰고 괴물들이 먼저 턴을 잡습니다.]
튀어나온 괴물들은 둘.
[희생양]
[수습 사제]
인간형 괴물인 수습 사제 하나랑 인간형이라 부르기 힘들 정도로 흉측한 ‘괴물’인 희생양 하나였다. 두 놈이 그렇게 강한 괴물은 아니었지만….
‘왜 하필 멘탈 빠개지기 직전인 지금 튀어나와서는!!!’
어딜 날로 통과하려는 듯, 지금까지 한 번도 겪지 못했던 통피(통로 중 피습)를 걸리고 말았다. 첫 턴을 무조건 맞고 시작해야 했다.
[희생양이 겪은 공포]
어린이가 대충 찰흙 놀이한 것보다도 못 생기고 혐오스럽게 생긴 희생양이 느릿느릿 기어오더니, 셰이의 발목을 붙잡고는 갑자기 괴성을 질러댔다.
“아아아아악!!!”
“아, 안 돼! 셰이!!! 정신 차려!!”
[희생양이 셰이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4/17]
[희생양이 겪은 압도적인 공포가 일부분이나마 셰이에게 전해졌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9]
“차라리 내가! 내가 맞을 테니까 나 공격하라고! 이 토하다 만 것 같은 괴물 새끼들아!!!”
끔찍한 비명을 통해 멘탈을 공격받은 셰이는, 인던에서 사경에 들어설 때에도 놓치지 않았던 클레이모어도 팽개치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었다.
[멘탈리티]
셰이 : -93
카야 :-86
유진 : -74
입이 바짝 메말랐다. 목이 탔다. 어질어질했다.
카야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고 있는 셰이에게 다가가 어떻게든 달래보려는 모습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위대한 공포시여 – 3장 1절]
[수습 사제가 숭배자의 복음 구절을 읊으며 공포를 외칩니다.]
“마땅히 올려다보아라! 또한 마땅히 무릎 꿇어 경외하라!”
하지만 괴물들의 턴은 끝나지 않았다. 놈들은 당연하게도, 우리의 상황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았다.
“필멸자의 본능과 본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 압도적이고 위대한 공포가 그대의 운명을 받아들일지니!!!”
[수습 사제가 셰이에게 1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셰이 남은 체력 13/17]
[셰이 멘탈리티 –6]
[수습 사제가 카야에게 1의 데미지를 입힙니다.]
[카야 남은 체력 12/14]
[카야 멘탈리티 –7]
“아, 아, 아.”
아아아. 아.
아아아아. 아. 아아. 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다들 정신 차려어어어!!!! 씨발 정신 차리라고!!! 셰이!!! 카야!!!”
내 외침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습 사제놈의 책에서 구역질 나오는 새까만 촉수 두 가닥이 튀어나와 나만 제외하고 셰이와 카야에게 닿은 순간.
이미 울고 있던 셰이도. 그녀를 달래던 카야도.
끔찍하고 또 섬뜩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구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멘탈리티]
셰이 : -99
카야 : -93
유진 : -74
멘탈리티 탭에 적힌 셰이의 이름이 섬뜩한 검붉은 색으로 명멸하고 있었다. 카야의 이름도 셰이보단 덜하지만 마찬가지였다. 문자 그대로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그녀들을 보는 나도 미칠 것 같았고.
[속도 체크]
셰이 : 4
카야 : 4
유진 : 7
희생양 : 3
수습 사제 : 3
[유진의 턴이 제일 앞서게 됩니다.]
선턴 잡는 건 확정적인 일이었다. 저놈들 속도가 원체 느린 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피습으로 인해 얻은 피해는 굉장히 심각했다.
“이 씨발 새끼가!!!”
울분을 담아 수습 사제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불행히도 치명타는 터지지 않았다.
[속도 굴림]
셰이 : 3
카야 : 4
[카야의 턴이 셰이보다 앞서게 됩니다.]
웬일로 카야가 굴림을 이겼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카야! 정신 차려! 카야!!! 아니 씨발 셰이!!! 뭐하는 짓거리야!!!”
공격 명령은커녕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때리려는 카야를 말려야했다. 가뜩이나 힘도 센 여자가 발광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뿐인가. 셰이는 아예 자기 손으로 제 목을 조르고는 꺽꺽대고 있었다.
이성을 잃고 공포에 잠식되기 직전인 그녀들을 보는 나 또한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 포기해.
- 받아들여.
- 본능과 본성을 억누르지 마.
“닥쳐!!!”
기분 나쁜 속삭임이 들렸다. 힘껏 욕하며 소리지르며 떨쳐내려 했지만, 한 번 들렸던 속삭임은 껌딱지처럼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짜악- 짜악- 짜아아악-!
정신 못 차리는 카야의 뺨을 거세게 가격했다. 삽시간에 뺨이 붉어지고 부어올랐다. 급작스런 물리적 고통에 뒤집어 까져 있던 두 눈이 멍하니 풀려버렸다.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대며 으르렁거렸다.
“지금 당장! 바닥에서 버르적거리지 말고! 철퇴로 저놈 조지라고! 안 그럼 셰이가 뒤지고! 내가 뒤지고! 너도 뒤지는 거야!”
“아아….”
“어서!!!”
아예 넋을 놓아버린 카야를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우라질. 중갑 때문인지 존나 무거웠다.
어느새 구석에 굴러다니는 그녀의 철퇴를 손에 쥐어주었다. 철퇴를 놓치려하기에, 손에 힘을 꽉 주며 다시 외쳤다.
“명령이니까! 저 새끼 조지라고!!”
“명, 령… 대장….”
카야의 두 눈에 아주 살짝, 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비틀비틀 괴물에게 다가가더니 집어던지듯 철퇴를 휘둘렀다.
[수습 사제가 죽었습니다.]
이번에도 치명타는 터지지 않았지만, 천만 다행이도 데미지가 잘 떠서 조질 수 있었다.
이제 셰이의 턴이었다. 만약 여기서 셰이가 기절을 먹이지 못한다면….
“대, 장… 대장, 대장….”
“아, 아, 아, 아, 아아아악!”
‘정신 나갈 것 같아….’
피와 살점이 묻은 철퇴를 들고 계속 대장을 중얼거리는 카야와 여전히 자기파괴적 행동을 하며 발광을 하는 셰이.
[공포가 소리 없이 파고들 틈을 노립니다.]
[밝기 : 74]
밝기가 낮아졌다. 시간이 상당히 경과했음을 경고하는 현상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매달리는 카야를무시하며 셰이에게 다가갔다. 그녀에게도 똑같이 싸대기 치료를 행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뺨을 때려야 했다.
“으, 아….”
“자신감 있던 천재 성전사는 어디 갔어! 나랑 카야 지켜준다고 엄숙하게 맹세했던 성전사는 또 어디 갔냐고!”
“아으….”
“넌 여기에서 무너질 사람이 아니야! 나랑끝까지 가겠다며! 이 씹새끼들 다 조져버릴 거라며! 근데 고작 여기서 울고불고 바닥이나 청소하려고 나한테 맹세한 거였어? 맹세의 무게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냐고!”
“맹, 세…?”
“그래! 맹세 지켜야지! 난 널 끝까지 품고 가고! 넌 네 역할을 다 해야지! 근데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내가 널 끝까지 어떻게 데리고 가겠냐고!!!”
분별없이 떨리던 셰이의 몸이 서서히 진정됐다. 드디어 말이 전해진 건가 싶던 나는 저기 널브러진 클레이모어를 가져다주려 했지만,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는 맨손으로 괴물에게 돌격했다.
“야이…!”
“죽어---!!!”
[정의의 심판]
[셰이가 희생양에게 4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희생양이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립니다.]
[희생양은 다음 턴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전투 시스템의 보정인지, 아니면 그만큼 셰이의 주먹질이 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킬은 정상적으로 적용되었다.
[희생양이 턴을 넘깁니다.]
[희생양이 상태이상 ‘기절’에서 벗어납니다.]
의도했던 대로 바로 다음 턴이었던 희생양은 턴이 삭제됐고, 다시내 턴이 되었다. 시간이 아까웠던 나는 바로 대가리 분쇄를 날렸고, 이번에도 치명타가 터지지 않아 카야까지 공격하고 나서야 희생양의 숨이 끊어졌다.
“…이럴 시간 없어. 바로 들어가야 돼.”
나를 비롯해 거칠게 헐떡이는 동료들. 그녀들의 모습은 굉장히 처참했다. 머리는 산발이 된 지 오래, 얼굴은 눈물콧물 범벅에 양 뺨은 부어있었고 입술엔 피딱지가 한가득이었다. 거기에 금단현상을 겪는 마약중독자처럼 손을 덜덜덜 떨고 있었고.
하지만 휴식?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비록 문이 근처에 있다지만 여긴 아직 통로였다.
한 번만 멘탈리티가 까이면, 바로 셰이의 멘탈이 터질 것이고. 셰이의 멘탈이 터지면, 카야의 멘탈도 터질 것이고. 카야의 멘탈이 터지면, 내 멘탈도 터질 것이 뻔했다. 안 좋은 의미에서 운명공동체가 되겠지.
‘제발.’
차라리 전투하게 해주세요. 상자방은 안 돼.
아예 메시지를 띄워놓고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멘탈리티 손실 없이 1-7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혹시 몰라 진형을 바꿨다. 카야-셰이-나 순으로. 마음 같아선 그나마 멘탈리티에 여유가 있는 내가 1열에 서고 싶었지만 체력이 걸레짝이었다. 그렇다고 셰이를 3열에 두면 셰이가 공격을 못하는 바보가 되니,이게 최선의 대형이었다.
‘여기서 체력 좀회복한다고 음식을 다 까먹으면, 미래가 아예 없다.’
차라리 다시 한 번 사경과 체력 1을 넘나들며 버티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식량을 소비해선안 됐다. 보스 전에 몰아먹어야 했다.
“카야.”
내 부름에 카야는 날 돌아보았다. 내가 한 번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행동을 옮겼다.
끼이익-
제발. 제발. 제발.
아까 전까지만 해도 상자방만 나오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뭐가 튀어나와도 멘탈이 갈릴 것 같았다.
그래. 개복치. 개복치가 된 기분이었다.
문 안에 뭐가 있는지 보기 두려운 마음과, 뭐가 나타났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짧은 대치 끝에 후자가 이겼고, 셰이를 앞으로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 손님이 왔군.”
“…허.”
[암흑상인의 매점에 입장했습니다.]
생각도 못했던, 암흑상인의 매점. 통칭 상점.
우린 괴물 방도, 휴식처도, 상자 방도 아닌 제4의 장소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