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1구역(2트)(10)
드르르륵-
사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1-1이나 1-5나 똑같았다. 하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무시할 수 없었다. 뒤의숫자가 높아질수록 보스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이, 괜히 지금 들리는 소리가 더 위압적으로 들리게 했다.
[평신도1]
[평신도2]
[수습 사제]
[평신도]
최대체력 : 26
공격력 : 4~7
방어력 : 1
속도 : 5
[수습 사제]
최대체력 : 23
공격력 : 3~5
방어력 : 1
속도 : 3
1-5는 일반 괴물 방이었다. 하지만 3마리였다. 1렙짜리한테는 경우에 따라서 정예 괴물만큼이나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구성이었다.
‘괜찮아. 체력은 거의 풀이고, 카야랑 셰이는 특성도 얻었어. 기세도 좋아.’
[속도 체크]
셰이 : 4
카야 : 4
유진 : 7
평신도1 : 5
평신도2 : 5
수습 사제 : 3
[유진의 턴이 제일 앞서게 됩니다.]
‘평신도 이 새끼는 속도가 은근 높단말이지?’
평신도고 수습 사제고 하나같이 칙칙한 로브를 쓰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고 역한 냄새와 혐오스러운 생김새는 숨겨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저들은 그걸 숨길 의도는 없어보였다.
‘수습 사제부터 조져야한다.’
평신도는 공격패턴이라고 할 것도 없이 평범한 평타밖에 없는 잡몹 중의 잡몹이었지만, 사제는 달랐다. 멘탈리티 공격을 위주로 하는 몹이었다.
하지만 현재 수습 사제의 위치는 적 3열.
카야나 셰이의 주력기인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와 ‘정의의 심판’이 닿을 수 없는 거리였다. 지금까지는 한 방당 하나, 많아야 둘을 상대했던 터라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대가리 분쇄는 가능하지만, 치명타가 안 터져서 한방에 안 뒤진다면?’
잡몹 구간에서 멘탈리티를 하락을 당해도 좋을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저 사제를 한 턴 살려둬서 멘탈 공격을 받는다면, 그게 스노우볼의 시초가 될 수 있었다.
‘이번 턴 딜은 포기한다.’
[어딜 도망가]
실전에서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로프로 후열(3,4열)의 적을 앞으로 끌어당기는 기술 ‘어딜 도망가’.
카야랑셰이가 때릴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럼 때릴 수 있는 위치로 ‘강제로’ 끌어내면 되는 것이다.
나는 로프를 능숙한 솜씨로 휘휘 돌린 다음, 평신도 너머에 있는 수습 사제에게 투척했다. 스냅이 착 감기는 게, 느낌이 좋았다.
“공포시여!!!”
“사제님!!!”
“일로와 새끼야!”
[유진이 수습 사제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2/23]
[유진이 수습 사제를 끌어당기는데 성공합니다.]
[수습 사제가 1열에 위치합니다.]
[평신도1과 평신도2가 한 칸씩 밀려납니다.]
“나이스!”
어딜 도망가는 성공적이었다. 이제 카야와 셰이는 마음 놓고 저 수습 사제를 조질 수 있게 됐다.
“공포시여!”
“감히!”
[공포를 섬기는 가르기]
[평신도1이 셰이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4/17]
우와. 무려 1데미지를 우겨넣다니, 대단한데 평신도 새끼?
원래라면 방어력이 3이었어야 할 셰이는 천재 특성 덕분에 1, 이번에 새로 얻은 굳건함 특성 덕분에 1을 얻어 방어력이 무려 5나 되었다. 그걸 뚫고 1데미지를 넣은 것이다.
[평신도2가 턴을 넘깁니다.]
‘푸하하하! 그럼 그렇지 병신 새끼들!’
그리고 내가 사제를 끌어당긴 판단의 근거 그 두 번째.
평신도는 전열(1,2열)에서 우리 전열에만 공격할 수 있는 괴물이었다. 그럼 1열로 끌려온 수습 사제 때문에 3열로 밀려난 평신도2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게다가 녀석의 이동거리는 1칸. 앞에 놈과 자리를 바꿔봤자, 다음 턴엔 평신도1이 멍청이가 될 뿐이었다.
[속도 굴림]
셰이 : 3
카야 : 1
[셰이의 턴이 카야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카야도 참.’
누가 이기든 상관은 없었지만 이런때마저 굴림에 지는 카야를 보니, 안쓰럽기까지 했다.
‘카야는 진짜 내가 안고 가야겠다….’
나는 셰이의 리미트를 풀었다. 그녀는 신언서를 보고 나서 축적됐던 분노를 클레이모어에 담아 전력으로 휘둘렀다.
“죽어!!!”
[정의의 심판]
[셰이가 수습 사제에게 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3/23]
[수습 사제가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립니다.]
[수습 사제는 다음 턴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수습 사제에게 심판의 낙인이 새겨집니다.]
내 낙인이 찍히지 않고 치명타도 터지지 않은 걸 감안하면, 그 정도면 준수한 데미지였다. 기절도 걸렸고. 셰이는 반으로 갈라죽이지 못해서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더 흥분하진 않았다. 전투중이라는 걸 인지한 것이다.
“대장.”
“어?”
그리고 특유의 크라우칭 스타트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카야가 날 돌아봤다. 왜 그러는 것일까. 의아했던 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작은 바람을 읽어냈다. 눈빛만으로 뜻이 통하다니… 이게 바로 관계도 4의 힘일까?
“조져.”
“대장의 뜻대로.”
환한 미소를 지은 카야는 육상 선수 저리가라 할 정도로폭발적인 쇄도를 뽐냈고, 관성을 이용해 (무)자비로운 철퇴를 휘둘렀다.
콰아아아-!
빠각-도 아니고 퍼억-도 아닌, 때아닌 빛의 격류가 던전에 휩싸였다. 셰이는 경악했지만, 나와카야는 저 빛의 기둥을 처음 본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Volente Deo – 신의 뜻이 철퇴에 깃듭니다.]
[수습 사제가 남은 체력에 상관없이 즉사합니다.]
[수습 사제가 죽었습니다.]
[잠시나마 강림한 신의 뜻이 용사들의 허한 마음을 보살펴줍니다.]
[셰이 멘탈리티 +6]
[유진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7]
[심판의 낙인이 발동됩니다. 셰이의 체력이 2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16/17]
[카야는 다시 행동할 수 있습니다.]
5%. 20분의 1. 손가락 발가락 다 합친 것 중 하나.
보스 괴물을 제외한 괴물을 체력 상관없이 하늘로 보내버리는 즉사기가 또 터졌다. 좋다. 아주 좋아. 95%가 안 터질 때도 있는 거고, 5%가 터질 때도 있는 게 바로 이 게임 하는 맛 아니겠어?
카야가 다른 건 셰이에게 다 밀릴지 몰라도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이 스킬 하나만큼은 이미 종결급 스킬이었다.
‘라엘라님. 또 한 명 올라갑니다.’
빛의 기둥은 다시 봐도 대단했다. 장엄했고, 신성했다. 밝았지만, 눈이 멀 정도로 부시진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사악한 것들을 단죄하겠다는 차가움이 공존했다. 그야말로 따스함과 냉철함이 공존하는, 라엘라 여신의 힘을 재현하는 듯 했다.
시즌 제2호 홈런을 때린 카야는 물론이고 빛의 기둥을 처음 목도한 셰이는, 전투가 끝나진 않았지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짧게 기도했다. 원래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행위였지만, 상관없었다.
특수효과 덕분에 어차피 다시 카야의 턴이었으니까.
“…대장.”
“잘했어. 정말 잘했어.”
끄덕-
빛의 기둥을 제일 가까이서 맞이한 카야의 모습은 흡사 성녀같이 고귀해 보였다. 그 고귀함은 곧 피로 물든 철퇴를 들면서 곧바로 사라졌지만, 내 눈엔 더없이 듬직하고 예쁘게 보였다.
‘어? 예쁘게…?’
아무튼.
칭찬의 의미를 가득 담아 고개를 끄덕이자 카야는 미소를 짓다가.
퍼억-
순식간에정색하더니 평신도1의 얼굴에 철퇴를 박아버렸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카야가 평신도1에게 1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6/26]
그리고 다시 내 턴이 되었다.
“대가리 딱 대라.”
다른 건 몰라도 인간형 몬스터 대가리 따는 건, 현상금 사냥꾼이원조지. 딱히 경쟁하는 건 아니지만, 명색이 대장인데 로프만 한 번 날리고 전투를 끝낼 순 없지 않겠는가.
[대가리 분쇄]
콰드득-
[치명적인 일격!]
손맛 좋고.
**
잠깐의휴식 후, 곧바로 1-5를 나섰다. 컨디션은 좋았고 사기는 충만했다. 1-5를 깼으니 벌써 5부 능선은 지난 셈이었다.
‘나쁘지 않아.’
1-1 일반, 1-2 정예, 1-3 상자, 1-4 휴식, 1-5 일반.
운빨요소가 도처에 널린 이곳에서 정형화된 ‘패턴’이라는 걸 고려하고 싶진 않았지만, 만약 저 패턴대로라면 1-6에서 정예가 나올 수 있었다.
‘1-6이라면 초반 구간은 확실히 지났으니 공포무새가 나올 리는 없다.’
1구역에서 출현하는 정예괴물도 종류가 꽤 많았는데, 사실어느 게 나와도 다 좆같았다. 어느 부분에서 더 좆같냐가 다를 뿐. 그렇다보니 용사대 조합에 따라 좆같음이 어느 정도 바뀐다지만.
‘1구역에서 느끼는 좆같음의 가장 큰 원인은 우리가 1레벨이라는 것.’
운이 좋아 레벨업 이벤트나 처음부터 2레벨 이상 동료를 영입했을 때를 빼고는 1구역에 도전하는 건 과반이 1레벨용사들.
절대적인 스펙 자체가 후달리다 보니, 어떤 방법으로 공격 받아도 다 뼈아프게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니.”
“…셰이?”
“카야 언니가 불러낸 그 빛, 말이에요.”
우리는 어느 덧 1-6의 문 앞에 도달했다.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하며 멘탈을 다스리던 도중, 셰이가 카야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으음.”
“아니, 못 들은 걸로해줘요. 잊어줘요. 언니.”
셰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끊었다. 괜한 걸 물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야는 입을 열다가 셰이의 표정을 보고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뭘까. 질투는 아닌 것 같은데.
“열게요, 대장님?”
“그래.”
딱히 급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일단은 1-6에 집중하기로 했다.
끼이이익-
언제나 똑같은, 그러나 조금은 더 무거워진 문이 열리고.
“공포에--!”
쿠웅-!
[정예 괴물, <공포의 전사>와 조우했습니다.]
“굴복하라--!”
[공포의 전사의 압도적인 기세에 용사 전원의 속도가 1 감소합니다.]
“저개똥만도못한새끼가어디서벌레만도못한소리를-!”
여느 때처럼 셰이가 발작하듯 소리쳤지만, 위압 효과를 완벽하게 막아내진 못했다. 난 저 씨발새끼가 소리치자마자 고막이 터지는 줄 알고 양손으로 귀를 부여잡고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으니, 셰이의 정신이 그만큼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공전이라니. 쓰읍.’
공포의 전사, 통칭 공전.
야만인에 거뭇거뭇함이 추가된 것 같이 생긴 이 정예 괴물놈은… 한마디로 복불복이었다. 물론 이 게임 자체가 복불복이긴 했지만, 그래도 방향성이라는 게 존재했다. 공포무새는 피지컬이 약한 대신 멘탈리티 공격이 강하다든가, 인던에서 겪었던 제단의 수호자 같은 놈은 3가지 형태로 다양한 능력을 소유한다든가.
공전은 일단 피지컬이 좋은 편이었다. 근데 패턴과 공격 대상에 따라서 저놈의 공세가 지옥이 될 수도 있었고, 병신이 될 수도 있었다.
‘갓전 모드냐, 공회전 모드냐.’
만일 저놈이 갓전 모드라고 불리는, 탱커를 무시하고 허약한 후열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며 유지력을 단숨에 박살내는 패턴을 구사한다면?
‘우린 퓨어 힐러도 없으니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아니 잠깐만.’
지금 대열은 셰이-카야-나 순이었고, 특이하게도 파티의 힐을 담당하는 용사가 1열과 2열에 서 있는 기묘한 형태였다. 그렇다는 것은….
‘나잖아?’
[속도 체크]
‘아, 안 돼.’
셰이 : 3
카야 : 3
유진 : 6
공포의 전사 : 6
[유진과 공포의 전사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유진 : 4
공포의 전사 : 5
[공포의 일격]
“으하하하하하하하하-!!”
과장 좀 보태서 내 상반신만한 거대한 도끼가 셰이와 카야를 무시하고 곧장 내게 다가오는 걸 보고는,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씨발.”
콰아아앙-!
“대장!!!”
“대장니임-!!!”
나, 살아는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