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1구역(2트)(9)
우리는 잡동사니에 접근했다. 접근해서 살펴보니 잡동사니는 신언서가 맞는 것 같았다.
“언니! 이것 좀 보세요! 여기, 여기!”
“…교리? 이곳에 어떻게, 어떻게 여신님의 말씀이.”
두 성직자의 반응이 이랬으니까.
“가급적이면 일단 손대지는 말자. 혹시 모르니까.”
“아, 예. 갑자기 교리가 적혀있는 종이들을 보니… 이곳이 던전이라는 걸 잠시 망각했습니다.”
“유스티티아님 말씀도 있어요. 이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카야는 침착함을 되찾았지만, 셰이는 얼굴이 붉어지며 흥분했다. 아니, 흥분이라기보단 분노에 가까웠다.
“어떻게, 던전에서 유스티티아님과 라엘라님의 말씀이 적혀있는 거죠? 저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섬기는 오물만도 못한 것들이,어떻게. 어떻게!”
“셰이.”
“신성모독이에요진리부정이에요당장이라도달려가 검으로삿된생각을하는쓸모없는머리를갈라뇌수를비워내고그릇된걸보는눈은짓눌러터뜨려버려야된다고요!”
[익숙함 속에 숨어있는 공포가 용사들의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셰이 멘탈리티 –5]
[카야 멘탈리티 –5]
[유진 멘탈리티 –3]
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번에 멘탈리티가 까인 건 던전 특유의 어둠과 공포 때문이 아니라, 셰이의 발작 때문이라는 것을. 인던에서 느꼈던 그 섬뜩함이 전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셰이.”
“있을수없어있을수없어있을수없어감히더러운이단오물쓰레기따위가여신님의말씀을받아적고눈에새기다니손톱을분쇄하고손가락을마디마다부러뜨리고….”
“셰이!”
나는 셰이의 양 뺨을 거세게 쥐었다. 과장 좀 하면 뺨을 때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바닥에 널브러진 신언서들을 보며 소름끼치는 폭언랩을 뿜어내고 있던 셰이의 죽어버린 눈동자가 생기를 되찾았다.
“대장님…?”
“그래, 셰이. 진정해. 지금 여기에 이단은 없어. 종이들만 있다고.”
“그렇지만 여기엔!”
“그놈들이 개짓거리 하는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니잖아? 자신들의 믿음을 위해 타인의 삶과 믿음을 망치는 놈들이야. 그런 놈들 소굴인 이곳에서, 라엘라님과 유스티티엘님의 교리가 보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대장님!”
셰이는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그녀의 눈빛에서 실망감을 읽을 수 있었다.
셰이.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우리가 해야 할 건, 이 자리에서 그놈들의 개짓거리에 대해 분노만 할 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판단하는 거야.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어.”
“아아.”
여긴 휴식처가 아니었다. 통로 한가운데였다. 가만히 있는 건 절대로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고, 난 그 점을 주지시켰다. 그녀도 여기까지 오면서 겪은 게 있었기 때문에, 바로 납득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끝이 난다면, 여신의 종으로서 느끼고 있는 그녀들의 분노는 불완전 연소되겠지.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분노를 신언서로 이끌어야 했다.
“난 그놈들이 이런 음침한 곳에서 갑자기 회개를 결심한답시고 이 교리를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진 않아.”
“당연한 말이에요!”
“그럼 왜? 굳이?”
“그야….”
이단이니까.
셰이의 입가에서 단어가 맴돌았다.
이단을 잡는다. 조진다.
이 프로세스에서 왜냐는 질문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왜 잡아? 이단이니까.
왜 조져? 이단이니까.
중요한 건 이단이 어디에 벌레처럼 숨어 지내는가, 얼마나 득실거리는가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여기가 던전이라는 특수한 장소라는 것 때문에 크게 의미를 잃었다. 이단이 어디 있냐고? 우릴 제외한 모든 놈들이 이단이다. 어단이 얼마나 있냐고? 우릴 제외한 모든 놈들이 이단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뻗어나간 셰이는 입가에 맴돌던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침착함을 되찾은 대장님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 자세한 내용을 안 본 상황에서, 이건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여신님들의 교리가 적힌 종이들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아마… 저놈들 입맛에 따라 손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대장. 지금, 그게 무슨.”
“지상에 득세하는 종교를,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거지. 자기가 옳다고. 거 보라고. 지금 우리는 이곳에 처박혀있지만, 우리야말로 옳게 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니 더 빡세게 숭배해야겠다고.”
이것까지 공식 설정에 적혀 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정도 유추는 쉬운 일이었다. 신언서에 대한 공식 설정 위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첨가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그녀들이 다시 스스로 불타오르기 전에, 그 방향성을 유도했다.
“그러니까. 진정한 ‘믿음’을 가진 둘이, 저 간교하고 사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종이뭉치를 옳게 만드는 게 어떨까?”
“옳게, 만든다?”
“예컨대, 저곳에 적혀 있는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거지. 검은 얼룩이 묻은 하얀 옷을 세탁하는 것처럼.”
너희들의 분노는 여기에 풀어버렷!
나는 가상의 낙인을 신언서에 찍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가방에서 성수를 꺼낸 건 덤이었다.
“혹시 어떤 술수가 있을지 모르니, 이게 필요할지도 몰라.”
“…역시 대장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맞는 말이에요. 놈들의 쓰레기 같은 의도를 철저하게 규탄하고 짓밟아주겠어요!”
카야와 셰이는 전투적으로 성수가 담긴 병을 낚아챈 다음, 신언서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표정을 찌푸리더니 돌연 성수를 신언서에 들이부었다.
치이이이익-!
순간 철판에 고기 굽는 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던전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냄새와 연기는 고약했다.
‘어? 저래도 되는 거야?’
입이랑 손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난 전문가가 아니었다. 신언서 해주는 그냥 마우스로 클릭 두세 번 정도 하면 용사들이 알아서 수초 만에 끝나는 거였고, 간략한 일러스트들만 봤을 뿐이었다. 실패하면 머리를 부여잡고 눈이 충혈된 상태에서 괴성을 지르는 용사 일러와, 성공하면 눈물을 흘리며 양손을 마주잡고 기도하고 있는 엄숙한 용사 일러, 황당한 표정으로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신언서를 쳐다보는 용사 일러까지.
분노의 불길을 유도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실제 과정까지는 내 영역 밖이었다.
‘난이도가 높아졌어도 신언서는 변한 게 없어.’
제일 쉬운 난이도에서도, 제일 어려운 난이도에서도. 신언서 해주만큼은 확률, 페널티, 보상. 모든 게 그대로였다.
성수를 사용한 성직자 계열의 용사가 신언서 해주 실패시 미칠 확률이 0%라는 것도.
‘여기서 새로운 유형의 결과가 튀어나온다?’
그럼 집어쳐야지 씨발. 똥겜 쓰레기겜 좆망겜 되는 거야.
‘리스크 없는 복권까지 두려워서 못 긁는다면, 앞으로 2구역은 또 어떻고, 3구역은 또 어떻게 돌파할 거야. 그리고 이번 dlc에서 새로 생긴 4구역은 말할 것도 없지.’
나는 내 판단을 믿었다. 아직까진 내 지식과 경험에 의한 판단이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기믹, 날뛰는 난이도, 게임에선 신경쓸 필요도 없었던 각종 요소들까지.
운이 따르기도 했지만, 원래 이 게임은 운빨좆망겜이었다. 턴제 로그라이크 게임에서, 기본공격력이 유동적이고 명중률이 있다는 것 자체가 태생부터 운빨 게임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
그런 게임에서 운을 바라는 건, 전혀 흠 잡힐 일이 아니었다.
요컨대, 운을 포함해서 계획을 짰는데 잘 풀리면 실-력이 되는 것이다.
웬만해선 거르고 지나가는 신언서를 해주하겠다는 내 판단.
그 판단에 대한 결과가 어찌 나오든, 책임은 내가 지면 되는 것이다.
치이이익-
혹여나 방해될까 그녀들의 시야 밖에서 조마조마하게 쳐다보고 있던 사이, 어느새 새까맸던 연기는 옅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고 고약했던 냄새도 희미해져 있었다. 귀를 기울여보니 그녀들이 성수를 계속 조금씩 부어가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따스한 자애로 어린양을 보살피시고, 냉철한 관용으로 억울한 이를 없게 하라는 말씀이….”
“빛은 부자든 빈자든 강자든 약자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소년이든 상관없이 모든 곳에 내리쬐는 유스티티아님의 은혜이며, 그 뜻을 널리 관철하는 것이 공정한 정의일지니 이 뜻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미는 손 또한….”
한손으로는 성수를 균일하게 떨어뜨린 채 반쯤 감은 눈으로 신언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쉴 새 없이 교리를 중얼거리는 그녀들의 모습은, 성스러운 성직자들이라고 하기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녀들이 조금, 아니 솔직히 말하면 꿈에 나올까 두려운 모습을하고 있다고 해도 내 동료지 않은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저들의 분노는 괴물들에게 향할 것이니, 한없이 듬직했다.
‘깝치면 안 되겠다.’
1회차 때, 1-1에서 피와 살점을 묻힌 철퇴를 들고 황홀한 미소를 짓던 카야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치이이-
이윽고,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던 연기 소리도 끝이 났다. 성수가 가득 담겨 있던 병은 빈 병이 되어 있었지만, 끊임없이 전투적으로 교리를 중얼거리던 둘은 말이 없었다.
‘일단 미친 거 같진 않은데… 씨발, 존나쫄리네.’
꿀꺽- 침을 삼키고 한발자국 내딛는 것뿐이었는데, 상당한 심력을 소비했다.
만약 지금 이 상황이 만화의 한 장면에 담겨있다면, 두 동료 주위에 어둠의 오오라에 잔뜩 둘러싸여있고 고오오오- 따위의 의성어가 들어가 있지 않았을까.
“저기, 카야? 셰이?”
지옥에서 갓 돌아온 듯한 집념의 성직자들에게 용기 있는 발걸음을 한 번 더 내딛는 순간.
털썩-
카야와 셰이가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내 판단이 잘못됐나? 왜? 근거는 충분했는데?
미치는 확률 0%의 공식이, 여기서 깨진다고? 에이, 아니잖아? 그치? 아니라고 말해!
“카야! 셰이! 괜찮…….”
“아아아아-! 라엘라시여-!”
“유스티티아님…! 하아아…!”
“……어?”
[카야가 신언서의 해주를 성공했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앙심이 굳건해집니다.]
[긍정적 특징 ‘냉철함’이 발현되었습니다.]
[셰이가 신언서의 해주를 성공했습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앙심이 굳건해집니다.]
[긍정적 특징 ‘굳건함’이 발현되었습니다.]
대성공 보상인 긍정적 특징 발현! 그것도 쌍으로 터진 로또에 어안이 벙벙했다.
“아아, 신이시여. 따스함뿐만 아니라 냉철함까지 함께하겠습니다…!”
“하아, 하아. 유스티티아님…!”
다만, 차가운 던전 바닥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릎 꿇은 채 달뜬 한숨을 내뱉으며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빠져있는 동료들이 모습을 보니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던전에서 뿜어져나오는 한기가 용사들의 몸을 침식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4]
‘하아, 이런 건 또 칼 같지.’
한참 황홀경에 빠져있는 그녀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일이 끝난 이상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해주하는 것 때문에 두 번이나 멘탈이 까인 상태였다.
“흐엣?”
“햐악!”
양손으로 각자 어깨를 짚자 화들짝 놀라며 날 올려다보던 그녀들은 금세 얼굴이 붉어지더니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헛기침 한번으로 시선을 끌고는 횃불로 앞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셰이가 하하 웃더니 선두에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카야Kaya]
종족/성별 : 하프엘프 여성
클래스 : 전투 수녀(Battle Vestal)
레벨 : 1
최대체력 : 14(11+2+1)
공격력(2) : 4~10
방어력(1) : 3
속도 : 4(3+1)
기사회생/각성 : 7%
정찰확률 : 14%
긍정적 특징 : 기민한 몸놀림(속도+1)/냉철함(체력 50%이하 적에게 데미지+1)
부정적 특징 : 어둠 공포증(밝기 50% 이하에서 멘탈리티 하락속도 25% 증가)
[셰이Shae]
종족/성별 : 인간 여성
클래스 : 성전사(Crusader)
레벨 : 1
최대체력 : 17(11+4+2)
공격력 : 2~8
방어력 : 5
속도 : 4(1+1)
기사회생/각성 : 9(8+1)%
정찰확률 : 15(14+1)%
긍정적 특징 : 천재(모든 수치+10%, 최소 1)/굳건함(방어력+1)
부정적 특징 : 발작(낮은 확률로 멘탈리티 하락)
‘1티어급 특징은 아니지만, 쓸만한 특징들이 붙었어. 어차피 지금 단계에선 주면 절하고 받아먹어야지만. 좋아. 아주 좋아.’
그녀들의 프로필에 붙은 2번째 긍정적 특징을 보니 굉장히 흐뭇했다. 내 판단이 맞은 것에 대한 보답은 달콤했다.
“대장님.”
“어. 이 기세 유지하고 바로 가자.”
“네!”
1-3에서 위험을 겪었지만, 그걸 극복한 지금은 되는 기운, 되는 기세를 타고 있었다.
“열어.”
1-5의 문을 여는 셰이의 움직임은 굉장히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