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1구역(2트)(4)
[공포의 상자방에 입장했습니다.]
“저, 저 상자는대체 뭔가요--!!!”
“으윽….”
셰이는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혐오스러운 걸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진심으로질색하고 있었고, 카야도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저 상자는 단순히 역겨움을 넘어 무언가 본능적인 거부감을 선사했다.
[공포의 상자방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전원 공포의 상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시험을 보기 위해선 공포의 상자에 손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조금 더 기다리니 전과 같은 메시지가 등장했다. 변한 점은 없었다.
‘1-1부터 리젠됐고 갈림길도 있었던 걸 보면 분명 던전은 리셋됐어. 근데 패턴은 같았단 말이지. 이걸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까.’
2회차에서 맞닥뜨린 1-1은 국룰을 어기고 2마리가 튀어나왔다. 1-2에선 정말 재수가 없는 확률을 두 번이나 뚫고 정예 괴물이 튀어나왔다. 2턴에 원턴킬을 해버리는 바람에 허무하게 뒤져버리긴 했지만, 만약 단번에 죽이지 못했다면 1회차 때 만났던 공포무새보다 무언가 강해진 상태로 용사대의 멘탈을 건드렸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저 기괴한 상자는?
1회차 땐 처음 보는 ‘강제 추방’이라는 기믹에 영문도 모르고 던전에서 쫓겨났다.
그렇다면, 난이도가 증가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는 지금은?
‘일단 기존 고난도 룰렛에서 좆같았던 것들이….’
최대 체력의 –20% 감소, 멘탈리티 –20, 최대 3중첩까지 걸릴 수 있는 최소 3턴 짜리 무작위 상태이상, 정예 괴물을 포함한 무작위 괴물 소환.
문제는 더 롱 테러에선 1번만 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선 ‘전원’이 돌려야 하니, 자칫 재수가 없으면 저것들보다 더 심할 게 뻔한 페널티를 3번이나 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당연한 말이지만, 저 상자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방법은 없다.
무조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돌려야했다.
‘설마, 또 강제 추방 이딴 거 걸리진 않겠지?’
루프도 아니고, 그딴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다. 차라리 회귀, 아니 게임식으로 표현하면 로드라도 시켜주면 모를까.
1회차 때의 기억이 떠올라 섣불리 상자에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대, 대장님?”
“셰이.”
“아니죠? 네? 제가 생각하는 거, 그런 거 아니죠?”
셰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턱 짚었다. 그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심지어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간단해. 손을 저 상자에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될 거야.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 저번에 나도 그렇게 했거든. 그랬었지, 카야?”
“예. 대장.”
“저거에, 손을, 가져다, 댄다구요?”
“운이 좋은 우리 셰이. 할 수 있지?”
셰이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강력한 이단 숭배자도, 혐오스럽게 생겼던 공포무새에게도 주눅들기는커녕 거칠게 자신의 전투력을 과시했던 성전사는 진심으로 질색하고 있었다.
“저 상자가 그렇게까지 무서운 거야?”
“무섭다니요! 저를 겁쟁이로 생각했던 거예요?!”
“그럼?”
“그냥, 저건… 으으.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무튼,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어요! 언니! 언니도 그렇죠?”
카야는 살짝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알기로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선 전원이 저 상자에 손을 대야하니까.”
“…으으.”
셰이의 반응을 보니, 정말로 겁을 먹어서라기보단 근본적인 배격감 비슷한 걸로 보였다. 카야도 말은 안 하고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는 걸 굉장히 꺼려하고 있었으니.
‘둘 다 성직자 계열이긴 한데… 성직자 계열이라서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가?’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저번에 강제 추방에 걸린 게 마음에 걸려서 뒤로 물러난 거였지만, 동료들의 반응이 저러니 총대를 메는 수밖에.
최소한 손을 대도 바로 뒤지지는 않는다는 ‘안전함’을 몸소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어느새 내 기도의 대상이 된 라엘라와 최근에 그 대상에 추가된 유스티티아에게 닿을지 말지 모르는 기도를 올렸다.
‘강제 추방이랑 몬스터 소환만 어떻게 좀 안 걸리게 부탁드립니다…!’
2연속 강제 추방에걸린다?
주작이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말도 안 되는 농간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또 알지 못하는 새로운 기믹이 튀어나오는 게 나았다.
나는 두 배 이상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를 무시하며 상자에 손을 댔고, 힘을 줘 뚜껑을 열었다.
끼이이익-
상자 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쯤 안 보이는 룰렛이 돌아가는 타이밍이라는 건 알았다. 제발. 제발. 제발!
[공포의 상자 결과]
꿀꺽-
누구야! 누가 침 넘기는 소리를 내었어!
[공포를 물리치는 작은 희망]
나였어!
[모든 용사의 멘탈리티가 10만큼 회복됩니다.]
‘나이스!!!!!’
속으로 발광하며 기뻐하는것과는 다르게, 실제론 가슴에 손을 대고 심호흡을 내뱉는 중이었다. 두 손을 비롯한 전신이 엄청나게 떨리고 있었고, 얼굴엔 식은땀이 한가득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심신 양쪽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쏟은 것이었다.
“대장…?”
“대장님?”
“후우. 일단, 난 잘 됐어. 뭔가 느껴지는 거 없어? 좀 꺼림칙한 기분이 가셨다거나.”
그녀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전신을 살피더니 표정이 밝아졌다.
“예. 놀랍습니다. 전신을 옥죄는 듯한 갑갑함이 상당히 느슨해진 기분입니다.”
“저도 누가 자꾸 쳐다보는 듯한 끈적함이 줄어든 것 같아요! 설마, 대장님이랑 저 상자가?”
“운이 좋았지.”
정말로.
애초에 저건 불공평한 룰렛이었다. 당첨되면 좋은 것과 좆같은 것의 비율이 후자가 더 높았고, 당첨됐을 때의 보상과 페널티도 후자가 더 강했다. 그 비율과 강도는 난이도가 높아짐에 따라 후자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런 게임이었다.
페널티가 안 걸린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 솔선수범에 조금 감화가 된 것인지, 안심을 한 것인지. 그 다음 셰이가 나서려 했지만, 그 전에 카야가 나섰다.
“언니?”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언니는, 그.”
“어차피 모두가 해야 할 것이라면,안 좋은 걸 미리 대비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매도 일찍 맞는 게 덜 아프다는 주장인 건가?
‘일찍 맞는 게 더 아프던데. 때리는 사람이 쌩쌩해서….’
쓰라린 경험은 둘째 치고, 카야의 움직임에선 망설임이 사라져있었다. 어차피 반드시 해야 하는 거라서 그런 걸까?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지만, 그녀는 꾹 참고는 어느새 닫혀있던 상자의 뚜껑을 단숨에 열어젖혔다.
[공포의 상자 결과]
카야. 넌 불운의 아이콘이 아냐! 그, 뭐였더라. 어, 그래. 굴림에서 거의 매번 지긴 했지만. 그래도 치명타도 곧잘 먹이고 그랬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어. 운이 네 의지대로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
[스며드는 공포]
“…대, 대장님!”
[모든 용사의 멘탈리티가…]
**
“한유진! 일로 안 나와?”
“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당장 문열어! 부숴버리기 전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제발! 제발!”
“이놈의 새끼가 끝까지…!”
누군가가 당장이라도 문을 부숴버릴 기세로 계속 두들겼고, 그 안쪽 방구석엔 이제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 남자아이가 발발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
“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잘못했어요….”
아이의 팅팅 부은 눈에선 눈물이, 빨개진 코에선 콧물이 엉망진창으로 흐르고 있었고. 옷이 가리지 못한 곳에는 짙고 옅은 멍들과 딱지들이 드러났다.
아이는 짧은 생에에서,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맞이하고 있는 거대한 공포를 막고 있는 단 한 겹의 방어막인 ‘방문’을 애타게 바라봤다.
‘제발, 제발. 오늘도 버텨줘! 제발!’
저 문이 사실은5번 교체됐고, 교체될 때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공포가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저 한 겹의 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라? 끝난, 거야?’
갑자기 끊긴 소음.
저 방문을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것마냥 마구 두들기던 소음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아이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오늘 밤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구나.
달달 떨려 서로 부딪치는 입을 꾹 다물고, 휘청거리는 팔다리를 겨우 추슬러서 가까스로 방문에 다가갔다. 그리고 귀를 문에 대고 바깥의 소리를 들으려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휴우….”
다행이다. 화가 풀리셨구나.
긴장감이 해소된 아이는 문에 기댄 그 자세에서 스르르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드그드극-
“…!!!”
찰칵-!
하지만 그건 아이의 착각이었다.
아이에게 향하는 공포의 집념은, 결코 그 정도로 얕지 않았다.
문을 부숴버린다?
그것도 방법이긴 하지만….
아이에게 향할 힘을, 고작 문 따위에게 소비해서 되겠는가.
아이는 황급히 방구석으로 숨었지만, 이미 아이가 의지하던 유일한 방어막은 허무하게 열렸다.
아이의 가장 가까우면서도 크나큰 공포는, 열쇠를 집어던지고 손을 들어올렸다.
짜악-!
“아아악!”
짜악- 짜악- 짜악-!
문밖에선 살벌한 말을 쏟아내던 아이의 공포는, 정작 아이와 마주하자 어떠한 말도 없었다. 그저 아이를 때렸다. 쉬지도 않았다. 그저 때렸다. 얼굴을 제외한 모든 곳을 때렸다. 모든 구타에 분노의 감정이 담겨있었지만, 정작 얼굴은 소름이 끼칠만큼 표정이 없었다.
정말 이대로 죽일 때까지 때릴 기세.
그걸 생존본능으로 느낀 아이는 때를 노렸다. 아주 잠시간, 틈이 있기를. 그리고 최대한 웅크리고 힘을 모았다.
“하아, 하아, 하아…?”
퍼억-
“너, 너…!!!”
아이는 평생 처음, 공포에 맞섰다. 전심전력을 다한 몸통박치기를 먹인 것이다.
그길로 방문을 열어젖히고, 공포에게 잡히기 전 감옥 문처럼 생각했던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일로 안 와!!! 거기 안 서?!”
팔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것만 밑으로 당기고, 살짝 밀기만 하면 이 문이 열릴 텐데.
수없이 많은 구타를 당한 어린 몸은, 방금의 몸통박치기와 짧은 달리기에서 그 힘을 다 써버렸다.
더 없이 분노한 아이의 공포가, 차츰 가까워졌다.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엄마….”
**
--! -------! --!
---!! ---!!
시끄럽다.
머리가 빠개질 것 같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힘이 없다, 아니 안 들어간다.
시야가 흐릿하다. 새까만 건 아니니 눈을 뜬 것 같긴 한데, 수성펜으로 쓴 글씨에 물을 떨어뜨린 듯 잔뜩 뭉개지고 흐릿하게 보였다.
--!
---!
여전히 시끄럽다. 몸은 여전히 아프고 마음은 걸레짝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다면, 왠지 모르게 따듯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날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뭐 어떤가.
난 그 무언가에게 최대한 달라붙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안 들었다.
--.
아 왜. 왜 자꾸 불러.
--.
…잠깐. 부른다고?
--.
뭐야. 너 누구야.
“…장.”
장?
“대장.”
“….”
“대장.”
그렇구나.
꿈이었구나.
[모든 용사의 멘탈리티가 30 하락했습니다.]
하.
하하.
그렇군. 그랬어.
공포무새 스킬 때문에 겪었던, 그런 한없이 실제로 느껴지는 꿈 또는 환상을 또 한 번 겪은 거구나. 그래도 그 땐,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좆같고 힘들고 현실감이 좀 떨어져서 견딜만 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멘탈리티가 덜 까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생생했다.
지금도 울고 싶었다.
하지만.
날 품에 안고 있는 카야의 얼굴이 이미 눈물로 범벅되어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녀 또한 나와 같은 악몽에 시달렸을 거라는 것, 또한 깨달았고.
“카야.”
“…대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몽에 매몰되지 않고 내가 깨어날 때까지 돌봐주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대장… 흐읍!”
미안, 카야. 참을 수가 없네.
어느새 움직이기 시작한 팔을 움직여 카야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잡아먹었다.
악몽을 잊기 위해. 악몽 때문에 흘러나온 슬픔을 다 먹어치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