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1구역(2트)(3)
‘안 좋아.’
[멘탈리티]
셰이 : -20
카야 : -15
유진 : -15
이제 1-2 전투 시작이었는데 멘탈리티가 저랬다. 회복 가능한 수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여기 난이도는 미쳐버렸다.
내 머리는 더 미칠 것 같았고.
[셰이와 카야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셰이: 5
카야 : 2
[셰이의 턴이 카야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카야는 여전히 운이 없구나.’
카야 개인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용사대 전체로 보면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다음 턴은 저 씨발 공포무새보다 둘 다 선턴을 잡을 것이니까.
셰이가 성전사의 집념을 걸어 속도를 1 높였고, 카야 또한 얼굴이 빨개지며 절정 상태가 되어 속도가 1 높아졌다. 둘 다 속도가 5가 된 것이다.
다시 턴이 돌아 2라운드, 내 턴이 되었다.
‘그때 공포무새랑 지금 맞닥뜨리는 공포무새랑 다른 놈인 건 당연히 알지만….’
내 스킬 이름값을 더 톡톡히 보여줬으면 했다.
[대가리 분쇄]
[유진이 공포의 예언자에게 1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6/65]
‘어? 18뎀? 평타가?’
어안이 벙벙했다. 나도 모르게 피가 듬뿍 묻은 도끼를 바라봤다. 그 사이 자벞 건 다음 턴에 주력 데미지 기술을 사용하라고 미리 말해둔 덕에 셰이는 알아서 이를 빠득 갈며 클레이모어를 휘둘렀다.
[정의의 심판]
[영웅적인 일격!]
[셰이가 공포의 예언자에게 19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27/65]
[정의가 공포의 예언자에게 준엄한 심판을 가합니다.]
[공포의 예언자가 상태이상 ‘기절’(1턴)에 걸립니다.]
[공포의 예언자는 다음 턴에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습니다.]
[공포의 예언자에게 심판의 낙인이 찍힙니다.]
[영웅적인 일격을 목도한 용사들의 가슴 속에 용기가 차오릅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유진 멘탈리티 +3]
이어지는 빛나는 치명타. 그리고 주르륵 이어지는 전투 상황 메시지.
입을 열어 좋아하기도 전에. 셰이를 칭찬하기도 전에.
공격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셰이와 바통 터치하듯 전력으로 뛰쳐나간 카야에게 철퇴가 흉포한 기세로 휘둘러졌고.
“고, 공포오오오….”
“시끄럽다.”
퍼어억-!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전율적인 일격!]
[카야가 공포의 예언자에게 27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0/65]
[용사들의 전신에 차오른 전율이 잠시나마 공포를 잊게 만듭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3]
나는 지금 내가 뭘 본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두 눈을 깜빡이고 비볐지만.
“…허?”
[공포의 예언자가 죽었습니다.]
[보상 : 7골드, 횃불기름(3), 성수, 해골 목걸이]
대가리가 형체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박살난 시체가 방 한쪽에 널브러져있고, 죽음을 확인하는 메시지까지 확인한 후. 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지극히 사실임을 깨달았다.
‘정예 괴물을… 원턴킬? 1렙짜리 셋이?’
하나같이 맥뎀이거나 맥뎀에 가까운 데미지를, 3연속으로 박아넣을줄 누가 예상했을까. 우리도, 저새끼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불운에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듯, 말도 안 되는 행운이었다.
이 방에 들어선 직후까지만 해도, 아니 그 이후에 시작부터 강력한 멘탈 공격을 받았을 때만 해도 불운을 저주했었는데.
하하.
놀람 때문에 버벅거렸던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카야! 셰이!”
“대장…!”
“대장님!!”
나는 그녀들을 한 번씩 껴안았다. 그녀들이 입고 있는 중갑이 거슬리긴 했지만,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까지 막을 순 없었다.
“혹시 모르니 구석구석 수색하자.”
“네!”
공포무새의 골통을 빠갠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연신 거친 숨을 내쉬는 셰이랑 카야와 함께 쥐 잡듯이 1-2를 뒤졌지만, 아쉽게도 나오는 것은 없었다.
[체력]
셰이 : 16/17
카야 : 14/14
유진 : 14/15
[멘탈리티]
셰이 : -13
카야 : -8
유진 : -9
보상으로 나온 해골 목걸이는 중복이라 아쉬웠지만, 1-2에 튀어나온 정예 괴물을 상대하고 나서 컨디션이 더 좋아져버렸다는 더 큰 보상을 얻었다. 여기서 멘탈리티가 –30대에서 최악은 –50대까지 각오했었는데.
‘운빨좆망에서 순식간에 운빨흥망이 되어버렸으.’
그래도 기뻐하는 건여기까지.
괜히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운빨좆망겜이라고 불렸던 게 아니었고, 이만한 행운이 깃들었으면 다음 전투 땐 이를 능가하는 불운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셰이가 어처구니없이 사경에 들어섰을 때처럼 말이다.
그러니 일희일비는 하지 말자.
물론 이렇게 다짐해도 치명타 한 방 터지면 다시 잊고 말겠지만….
1-2에서 나와 통로를 걷던 우리의 발걸음은 1-2에 도착하기 전보다 오히려 가벼워진 것 같았다. 긴장이 아예 풀려버렸다는 건 아니었다. 자신감이 그만큼 상승했다는 뜻이었다.
셰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었는지 코가 씰룩거렸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려는지 꾹 참는 게 보였다.
그 기세 덕분일까. 중간에 함정이 튀어나왔지만 운 좋게 피할 수 있었고 소소한 멘탈리티 회복까지 이득을 봤다.
기세만 보면 단숨에 보스 대가리도 빠개버릴 것 같은 우리의 멈추지 않는 전진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갈림길이었다.
혹시나 갈림길 중앙에 서서 안쪽을 노려봤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카우팅은 발동되지 않았다. 16%면 한 번 정도는 터질 때도 됐는데, 아쉬움에 혀를 찼다.
“대장님. 어느 쪽으로 가야 돼요?”
“글쎄. 어딜 가도 보스가 있는 곳까지 가긴 하겠지만, 과정은 달라지겠지. 정찰이 안 돼서 각각 앞길에 뭐가 있는지는 지금으로선 전혀 알 수가 없어.”
“갔다가 돌아오는 건 안 돼요?”
“일단 방에 들어가면 너도 겪어서 알겠지만 빠져나가지 못해.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라면 다시 여기로 돌아올수는 있겠지만… 의미가 없지. 방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도 안 하고 돌아올 게 아닌 이상.”
“…그럼 완전히 운과 감의 영역이군요.”
카야가 한숨을 쉬었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대장과 셰이가 알아서 정해주십시오.”
“언니. 같은 동룐데 언니도 당당하게 자기주장해도 상관없어요!”
“이게 제 주장입니다. 저는… 별로 감이 좋지 않습니다. 두 분이 어느 곳을 택하더라도 저는 불만을 표하지 않겠습니다.”
“아이 참.”
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날 보며 이야기했다.
“카야 언니는 너무 고분고분하다니까요. 둘 다 모르는 거, 어느 쪽이 좋겠다고 얘기해도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닌데. 그쵸?”
“맞아. 근데 카야 생각이 그렇다면 존중해줘야지. 일단 난 오른쪽.”
“그럼 오른쪽으로!”
스카우팅이 됐다면 모를까, 아무 정보도 없는 지금은 정말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상관없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의 의견을 아끼는 카야가 안타까울 뿐.
‘뭐, 카야가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르지만 꽤나 오랜 시간 쌓였을 트라우마나 지금 성격이 단번에 바뀌는 게 이상하지. 시간이 해결할 일이야.’
카야를 잘 챙겨주는셰이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오른쪽 길에 진입했다.
스스스스-- 사아아아--
[용사들의 마음속 작은 틈에 침투한 공포심이 꿈틀거립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3]
‘통로를 걷는 시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 좆같은 느낌은…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폐가나 폐교, 많이 봐줘서 귀신의 집 같은 곳에서 겪는 공포심이나 스산함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아직은 그 정도가 미미하여 그런 감정과 유사하게 느껴지지만, 어디까지나 ‘유사’했다. 더 깊숙히 들어가면 어떠한 공포가 옥죌지 상상이 안 됐다.
‘안 돼. 자꾸 빠져들지 말자.’
한 번 인식하니 계속 생각하게됐다. 어째서 이 공포를 느끼고 있는지, 어디서부터 느끼고 있는지, 언제부터 느끼고 있는지, 나는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앞서서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두 여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과연 내가 이곳에 있는 게 옳은 건지, 내가 정신을 잃지는 않을지,적의 대가리가 아니라 내 대가리가 분쇄되지는 않을지, 거기서 흘러나온 뇌수가 동료들의 부츠를 더럽히진 않을….
‘씨발! 그만! 그만! 그만!’
[지독한 어둠이 용사들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셰이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4]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무사히 앞으로 나아가서 끝내 돌파하는 것. 제1목표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그걸 제외한 다른 모든 걸 잡생각으로 취급했다. 끼어들 틈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1-2에서 공포무새를 해치우고 1-3으로 향한 지 30분이 넘었다. 더 롱 테러에선 짧으면 15초,길어봐야 30초 안에 건너가는 거리였다. 근데 우리는 아직까지도 1-3의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금 초조해졌다.
‘아냐. 더 롱 테러에서 갈림길은 좆같은 길과 더 좆같은 길을 나눈 것일 뿐, 방이 나타나지 않는 막다른 길은 없어. 1-3이 막다른 방일 수는 있어도, 지금 이 통로가 막다른 곳으로 가는 길은 아냐. 절대로.’
하지만 왜 이렇게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괜히 초조해진 나는 애꿎은 횃불을 건드렸다.
[용사들의 희망처럼 작은 횃불이 조금 더 밝아졌습니다.]
[밝기 : 88]
‘새끼가.’
우리 희망이 작긴 뭐가 작아. 세일럼의 그 어떤 용사대도 이루지 못할 던전 컴플리트 클리어를 목표로 하는 용사댄데.
씨발 새끼.
누군지도 모를 누군가에게 욕을 뱉었지만, 내 투덜거림은 불완전 연소된 쓰레기같았다.
통로에선 가급적이면 말하지 말고 항상 주위를 경계할 것. 말해야 한다면 꼭 필요한 말이나 위급 상황에서 할 것.
이 두 가지를 미리 얘기한 것 때문에 우리 사이엔 아무 말이 없었다.
“대장님.”
“뭐야.”
“대장님은 던전을 격파하고 나면 뭘 하고 싶어요?”
“…셰이.”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너무 굳어있는 거 같아서요.”
하지만 말이 적은 편이 아닌 셰이에겐 가뜩이나 던전 분위기도 그런데 침묵이 답답했던 것 같았다. 목소리를 나름 조곤조곤 볼륨을 낮췄지만, 동굴에 악 소리라도 지른 듯 했다.
‘강제로 윽박지르는 것보단 빨리 대답해주고 끝내는 게 낫겠지.’
아직까지는 별 일 없었고, 1-2에서의 전투 때문에 셰이는 아직 던전에서 제대로 된 고난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다.
“괴물 때려잡는 건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 데 가고, 자고 싶으면 자고.”
“평범한 걸 위해 제일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거예요?”
“…그러게. 뭐, 어쩌다보니 이렇게 됐네.”
“흐응.”
사연 없는 용사는 없었다. 그 정도 상식은 셰이에게도 있겠지.
이 짧은 대화로 어느 정도 답답함은 가셨는지 셰이는 도로 입을 다물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질문이 내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평범한 걸 위해 제일 어려운 일에 도전한다라….’
한동안 잊고 있었던 ‘지구’의 집이 떠올랐다. 평범하고 작은 원룸, 너무 지저분하지도 않고 깔끔하지도 않은 방 상태에 비해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컴퓨터 한 대. 키보드 근처에 놓인 치킨과 콜라와 치킨무. 그걸 집어먹으며 더 롱 테러를 플레이하는 ‘한유진’의 모습.
그런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이, 지금껏 누구도 불가능했던 ‘제일 어려운 일’로 들이닥친 내 처지를. 동료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대장.”
“…어.”
“문이 보입니다.”
상념이 깨졌다.
좋지 않네. 휴식처도 아니고 멍을 때리다니. 이래서 잡담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셰이를 탓하진 않았다. 딱히 그 잡담 때문에 뭔 사고가 터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다음엔 주의를 주는 걸로 끝내도록 하고.
나는 셰이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그녀가 망설임없이 1-3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공포의 상자방에 입장했습니다.]
“윽, 저건…!”
어째, 저번이랑 패턴이 똑같은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