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이단과 금단 사이(6)
[제단의 수호기사와 카야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아.”
속도 굴림 메시지가 뜨고 나서야, 약간의 이성이 돌아왔다. 물론, 그 조금 돌아온 이성이현 상황을 어떻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아까 셰이에게 쏟아진 반사 공격이 ‘셰이의 턴’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그런 알아도 쓸모없는 걸 알아챘을 뿐.
제단의 수호기사 : 4
카야 : 4
천만다행이도, 아까 셰이처럼 굴림이 무승부가 났다. 굴림이 다시 진행되는 건 살 떨리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당장 지는 것보단 다시 진행하는 게 훨씬 나았다.
[제단의 수호기사의 턴이 카야의 턴을 앞서게 됩니다.]
“왜!!! 왜, 이번엔!!!”
이 와중에도 머리로는 이유를 분석하고 있는 내 자신이 싫었다. 기껏해야 위압 비슷한 무언가 때문에, 아니면 저 혐오스럽게 생긴 형태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그딴 걸 알아도 빼앗긴 턴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은 대가를.”
괴물놈의 이글거리는 칼날이 끝이 셰이에게 겨누어졌고.
“치를 것이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셰이에게 떨어졌다.
눈을 질끈 감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그저, 멍하니 칼날을 바라봤다.
이렇게, 정말 이렇게 흘러간다고.
정말로, 이렇게 셰이가 죽는다고?
카야. 엉망진창으로 울고 있네. 목에잔뜩 핏대가 올라와있구나. 그래. 너도 안 움직이겠지. 알고는 있겠지만, 당황스럽지. 아. 나도 그렇다고?
그러게.
눈알이 터질 거 같고, 온몸이 찢어질 거 같아. 목은 이미 잔뜩 쉬어있겠지.
[복수의 칼날]
비록 셰이가 정식으로 용사대에 합류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 싸웠는데. 짧은시간이었지만, 카야에게 나 말고 다른 동료가 생길 것 같아서 좋았는데. 툭 튀어나오는 폭언은 섬뜩했지만, 싸울 때는 듬직했는데.
안 돼. 못 죽어. 누구 마음대로? 이대론 못 보내.
안 된다고.
이렇게 보낼 거 같아? 넌, 내가 던전 끝까지 데리고 갈 거라고 이미 내정된 인재라고.
그러니까,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너, 대장님이라고 불렀잖아. 그러니까 대장으로서 명령이야. 죽지 마.
제발.
[제단의 수호기사의 공격이 빗나갑니다.]
정적.
제단의 수호기사의 공격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셰이의 몸을 스쳐지나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무슨 장난을 치는 거냐고 할 정도로.
“….”
검이 맞닿기 직전, 셰이의 몸 주위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은색 광채가 그녀를 보호한 것처럼 보인 건 내 기분 탓이겠지.
실감이 안 났다. 누가 내 머리끄댕이를 잡고 강제로 롤러코스터를 태우는 기분이었다. 희망과 절망과 희망이 순식간에 극과 극으로 널뛰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아까 전엔 원망스럽기까지 했던 내 이성이, 이번엔 제 역할을 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카야에게 지시를 내렸다.
“카야.”
“…예. 대장.”
“죽여.”
끄덕-
카야는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괴물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부츠소리가 정적을 깼고, 괴물의 눈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니깟게 그렇게 쳐다보면 어쩔 건데.
니놈 필살기는 결국 실패했다고. 셰이는 살아남고, 넌 또 뒈지겠지.
날 죽이지 못하는 모든 고통은 날 강하게 만든다는 격언이 있던데, 몸소 강력한 경고를 날려줘서 고맙다.
네놈 덕분에 좋은 일이 있어도 들뜨지 않을 수 있겠어.
“원통, 하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카야가 제단의 수호기사에게 6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5/69]
[제단의 수호기사가 죽었습니다.]
**
“아빠아아!”
오도도도- 와락-!
“어이쿠, 우리 딸. 잘 있었어?”
“응!”
“하하! 엄마 말씀 잘 들었고?”
“응!”
훤칠하고 잘생긴 금발의 남자는 제 딸을 가슴팍까지 안아들었다. 기품이 흘러넘치고 부티나며 외모도 출중한 남자는, 자신을향해 정중히 예를 표하는 사용인들의 곁을 지나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공부는 많이 했고?”
“칫. 공부는 재미없어!”
“이런. 나중에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아빠가 일하고 있는 곳에서 일하려면 우리 딸, 공부 열심히 해야 할 텐데~”
“난 아빠 딸이니까 괜찮아!”
“뭐?”
“아빠 자주 보면 좋아! 집에서 보면 더 좋아!”
“하하하!”
대저택이라고부를 수 있는 집까지 걸어가며 딸과의 해후를 즐기던 남자는, 집 앞에서 양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으고 서 있는 자신의 아내를 보고 걸음이 빨라졌다.
“당신.”
“고생 많으셨어요, 여보.”
“고생은 무슨. 다녀왔어.”
“**, 아빠를 귀찮게 하면 안 되지. 어서 내려오렴.”
“싫어….”
“**.”
“싫어…!”
“**!”
“싫어!”
어느 순간.
생굿 웃고 있던 여자와 남자의 두 눈이 텅 비어있고, 그 자리에 구더기가 기어다니고 있었다.
“싫어!!!!!!!!!!!!!!!!!!!!!!!!!!!!!!!!!!!!!!!!!!!!!!!!!!!!!!!!!!!”
**
“싫어!!!!!!!!!!!!!!!!!!!!!!!!!!!!!!!!!!!!!!!!!!!!!!!!!!!!!!!!!!!”
“쉬이… 괜찮습니다. 괜찮아.”
“아아아아악!”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아으… 엄마…! 아빠…!”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옳지.”
정예 괴물과의 전투 후, 나와 카야는 가까스로인던에서 후퇴할 수 있었다. 단언컨대, 셰이를 살려서 나온 건 기적이었다. 셰이는 전투가 끝나도 의식을 못 차려서 내가 업어야만 했는데, 돌아가던 도중 잡몹을 두 번이나 만났고 또 다른 중독가스 존을 맞닥뜨렸다.
잡몹에서 셰이를 3열로 돌리고 어떻게든 우리가 맞아가며 셰이를 지켰고, 잡몹을 죽이기 전 카야가 ‘전투수녀의 고행’ 스킬로 자신의 피를 깎아가며 셰이의 피를 일부분 회복시켰다.
셰이는 그 덕분에 잠시 의식을 되찾았으나 얼마 움직이지 못하고 다시 의식을 잃었고, 인던을 빠져나왔을 땐 나도, 카야도 만신창이 상태였다.
가까스로 여관에 돌아온 우리는 전력을 다해 셰이를 치유하고 간호했다. 그게 불과 몇 시간 전 일이었다.
셰이는 의식을 차리나 싶다가도 심한 악몽을 꾸는 건지 계속해서 심한 잠꼬대를 했고, 나랑 카야는 푹 쉬지도 못하고 그녀의 간호를 계속해야 했다.
“카야. 차라리 수도원에 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카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확실하긴 합니다. 저보다 관용의 길을 걸으시는 자매님들이 훨씬 치유에 능하시니까. 하지만그렇게 하면 자칫 대장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곤란해진다고? 왜?”
“이분은 타 교단 성전사입니다. 아마, 이단이 있는 곳에 대한 파악 및 우리들, 정확히는 대장에 대한 감시를 하기 위해 파견된 것일 테고… 이 정도는 대장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야, 교단끼리 해보자는 게 아니면 널 의심하진 않겠지.”
“그런데 우리는 상태가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무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같이 들어간 성전사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걸 유스티티아 교단이 알게 되면. 제3자가 보기엔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가 저 안에서 2:1로 무슨 짓을 꾸민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가능성의 이야깁니다. 저는 그런 복잡한 걸 잘 모르지만, 이단에 관련된 일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수습 수녀일 때도 꽤나 많이 목격했습니다. 수녀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이없으실 수 있으나… 교단들은 이단과 관련된 일을처리할 때, 이성과 합리라는 게 상당한 후순위로 밀려납니다.”
미안한데, 애초에 종교라는 게 이성과 합리라는 개념에서 멀리 떨어진 거 아니야?
난 분위기 못 읽는 남자는 아니었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제가 속한 라엘라 교단이라면 모를까, 유스티티아 교단에선 결국 저는 타 교단 수녀. 자신들의 성전사가 죽을고비를 넘긴 사건을 매우 명확하고 중대한 증거 없이목도하게 되면, 저 또한 이단으로 충분히 몰 수도 있습니다. 교단에게 이단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 정확히는 네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고.”
“…고생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는, 셰이님 덕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하고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 그거야 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셰이 없었으면, 우리 다 죽었을지도몰라.”
끄덕-
카야가 셰이의 머리를 쓸어넘겼다. 드러난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내가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찬 물수건은 금세 뜨뜻미지근해졌다.
“카야.”
“예.”
“셰이가 죽을 뻔했잖아.”
“예.”
“무서웠다.”
“….”
나는 수건을 갈며 말을 계속했다.
“이번에도 처음이었어. 누군가가 죽을 뻔한 걸 본 것도. 각오야, 처음부터 하긴했지.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그건 나도 예외가 아니라고. 근데, 실제로 보는 건 다르더라.”
“그렇습니까.”
“어. 처음 만난 셰이가 죽을 뻔 했는데, 세상이 원망스럽고 앞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 차라리 내가 맞을 걸, 내가 탱커할 걸. 아니, 처음부터 거기 가지 말 걸….”
많이 지쳐서 그런지 말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나왔다.
“죽지 마라고. 난 네 대장이니까, 명령이라고. 그 짧은 시간에 몇 번이나 빌었는지 모르겠다. 분명부담스럽기도 하고, 좀 섬뜩한 면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내 눈앞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엄청 절박해지더라고.”
“저도, 그랬습니다.”
“카야.”
“예. 대장.”
“죽지 마라. 최소한, 나보다 먼저 죽지 마.”
“…대장?”
젠장.
센티해진 것도 뭣도 아니다. 그냥, 아직도 그때의 격렬한 감정에 침몰된 상태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뱉어버린 말, 참을 수없었다.
“너 죽어버리면, 나 미쳐버릴지도.”
“…!”
“좌절해서 포기해버릴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
피로에 반쯤 감겨있던 카야의 눈이 커져있었다.
“대, 대장. 어째서 그런 말을….”
“쓸데없는 소리라는 건 아는데, 그냥. 말하고싶었어.”
“….”
“그리고 카야.”
“…예.”
“만약,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싫습니다.”
카야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절, 시험하시는 겁니까?”
“아니, 시험이라니. 그런 게 아니라.”
“전,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동료였습니까. 저는 대장에게 그 정도 믿음밖에 못 주었던 겁니까. 저는, 간절히 붙잡을만한 가치가 없었던 겁니까.”
“반대지. 내겐 과분하다고 느껴서. 게다가 강제가 아니잖아.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사람이니, 그런 의미에서 말한 거였지.”
“예. 잘 말씀하셨습니다.전 대장과 끝까지 함께 할 겁니다. 제 의지로. 제 자유로.”
정신을 차려보니 카야가 내 멱살을 잡고 얼굴을 끌어당긴 상태였다. 그녀의 눈빛과 입술이 너무 가까웠다.
“대장과는 달리, 전 운명을 아주 잘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제 운명을 걷어차버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냐.”
“제게 한 번만 더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신다면, 아무리 대장이라도 화를 낼 겁니다.”
“그것 참, 무서워서 꼭 지켜야겠네.”
“예. 무섭게 화 낼 겁니다.”
“…하하.”
이게 바로 카야식 위로인가.
조금은 마음이 괜찮아진 것에 대한 고마움에 감사를 하려는 순간,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꿀꺽-
상황이 상황이긴 한데.
그날 이후로 나도, 카야도 이렇다 할 스킨십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지, 방금의 마주침이 트리거가 된 것 같았다. 죽을 고비도 같이 넘어오지 않았는가.
그건 카야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와 그녀의 얼굴이 동시에 가까워졌다. 카야가 눈을 감는 게 보이고, 나도 눈을 감으려는 그 때였다.
“우와.”
“헉!”
“흐엣?!”
“아, 미안해요. 이런 걸 직접 보는 건 처음이라… 헤헤.”
방금 전까지 깊게 자고 있었던 셰이가 눈을 깜빡이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다시 잘 테니, 계속 하세요?”
“하겠냐.”
카야는 토마토 석상이 되었고, 난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행이다.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