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이단과 금단 사이(5)
카야의 치명타를 보니 역시 운빨 보존의 법칙은 존재했다. 셰이에게도, 저놈에게도 2연속 굴림패 당했던 카야는 첫 공격에 치명타를 먹여버렸다.
카야는, 내가 몇 번이나 2티어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생각이 틀렸다. 어리석었다. 감히 나 따위가 카야느님에게 ‘티어’를 매기다니.
세상에, 저렇게 공격을 잘 맞추는 전투수녀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해!
‘그래. 운빨좆망도 있으면 운빨도 있어야지.’
공식적으로 ‘행운’ 스탯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 사는데 행운이 없을 수가 있나. 행운은 변덕스러운 존재라 나중에 어떻게 엿을 먹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나중 일.
지금은 하늘에서 선물이 떨어졌다 생각하고 이 기세를 몰아나가는 게 좋을 것이다.
‘나도 한 번 운빨 타보자!’
다시 돌아온 내 턴.
만약 여기서 나도 치명타를 띄운다면? 그것도 맥뎀을 띄운다면?
가자!
[대가리 분쇄]
[유진이 제단의 수호기사에게 2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9/69]
“……하?”
이건, 아닌데. 좀 많이 아닌데.
저새끼 인간형 괴물이고, 낙인도 찍었고, 대가리 분쇄에 인간형 4뎀 추가 보정까지 있는데.
2뎀?
‘씨발 민뎀 뜬 거야?!’
나, 카야가 너무 딜을 잘 넣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메인딜러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공격은 성공했으니 멘탈리티가 하락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 멘탈에 데미지가 생겼다.
‘아니다. 민뎀의 문제가 아냐. 분명 저놈기믹 때문일 거야!’
안타깝지만 내 턴은 이미 끝났고, 턴은 예외 없이 저놈에게 넘어갔다. 셰이를 보니 굳은 표정으로 검을 들어올리며 방어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기사놈은 이번엔 종단베기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크읏…!”
[1형 – 내리누르기]
[제단의 수호기사가 셰이에게 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8/17]
[셰이가 거력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뭣…!”
또 다시 맥뎀에 가까운 데미지를 받은 것도 받은 것이었지만, 제일 마지막에 뜬 메시지가 불안감을 마구 솟구치게 만들었다.
상태이상에 걸린 것도 아니고, 저항했다는 것도 아닌 저 현재진행형 메시지는….
[저항 굴림]
굴림의 전조!
저항 굴림은 상태이상 확률과 저항 확률이 엇비슷할 때, 저항하는 쪽에서 일정 확률로 일어나는 랜덤 이벤트였다. 여기서 이기면 저항에 성공하는 거고, 지면 바로 상태이상에 걸리는 거고. 비기면 상황에 따라 다시 굴리거나 지는 판정으로 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확률이 엇비슷하다면 공격하는 쪽이 조금은 유리하게 판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무조건 이겨야 했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셰이 : 5
제단의 수호기사 : 5
‘이런!’
[저항 굴림이 비겼습니다. 굴림이 초기화됩니다.]
[저항 굴림]
“후우, 후우, 후우.”
다행히 저항 측 패배로 이어지지 않았다. 천만 다행이었다. 무슨 상태이상이 걸릴지 모르지만, 저놈 다음 바로 셰이의 턴이었기 때문에 상태이상에 걸린다면 높은 확률로 턴을 그냥 날릴 가능성이 높았다.
‘셰이! 네 광기가 그거 밖에 안 돼? 겨우 여기서 쓰러지려고 그런 발작 보인 거 아니잖아? 그치? 뭐때문에 성격이 그렇게 됐는진 몰라도, 이단새끼들, 때려잡아야 하잖아!’
여전히 기사놈과 길항상태를 유지 중인 셰이의 고개가 살짝 틀어졌다. 지금 생각을 들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왠지날 보려는 것 같았다.
- 씨발저딴더럽고추악한이단숭배자새끼주제에기사흉내내는역겨운새끼한테 저, 셰이가 질 리가 없잖아요, 대장?
아주 잠깐 마주쳤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고.
셰이 : 6
제단의 수호기사 : 5
[셰이가 거력에 저항합니다.]
[셰이가 상태이상 ‘기절’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용사의 투지에 공포가 잠시 기오는 걸 멈춥니다.]
[전 용사 멘탈리티 +3]
“셰이이이이이-! 잘 버텨줬어! 잘 했어!”
“셰이!”
해냈다.
그 와중에 저 씨발새끼가 두 번 연속 5를 띄운 게 소름이었지만, 우리 미친년, 아니 천재 퀸셰이님이 5와 6을 띄우셨다. 그래서 저항했다. 그럼 된 거다. 카야마저 ‘님’자를 빼고 이름을 외칠 정도로, 셰이의 저항은 가슴 벅차오르는 광경이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본 그녀의 저항은 고작 운빨 100% 굴림 따위의 메시지들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게 탱커고, 저게 성전사지.
게다가 봐라. 저 침착한 모습. 아직 전투는 한창이다라고 주장하는 듯한 묵직함.
나는 덕분에 침착함을 되찾았다. 내 공격이 분위기를 잡치긴 했지만, 셰이가 다시 끌어올렸다. 심지어 이제 그녀의 턴이었다. 그녀의 투지가, 공격까지 이어지면 좋….
‘잠깐.’
정의의 심판을 다시 한 번 먹이라고 지시하기 직전, 생각을 바꿨다. 아주 즉흥적이었다.
‘셰이! 다시 한 번 성전사의 집념을!’
까드득-
[셰이가 성전사의 집념(2)을 발동합니다.]
[3턴 간, 절대로 뒤로 밀려나지 않습니다.]
[셰이의 속도가 1(2) 증가합니다.]
[셰이의 체력이 매 턴 1(2) 회복됩니다.]
[피격시 단 1회에 한하여 1회 반격할 수 있습니다.]
[남은 체력 10/17]
[반격 1]
셰이의 자벞 ‘성전사의 집념’은 중첩 가능했다. 이론상 3중첩이 가능했지만 계속해서 버프만 걸 수 없으니, 실용적으로 가능한 건 2중첩까지지만 그래도 의미가 있었다.
바로 다음 턴.
다음 턴에 셰이의 속도가 6이 될 테니까.
그리고.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카야가 제단의 수호기사에게 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34/69]
[절정의 공격으로 유진의 체력을 1 회복합니다.]
[유진 남은 체력 15/15]
다시 내 차례가 돌아왔다.
낙인이 유지되는 마지막 턴이었다. 내가 공격하면 낙인은 사라질 것이었다. 때문에 선택지가 3개로 늘어났다.
1. 공격한다.
2. 셰이와 카야의 후속타를 위해 낙인을 갱신한다.
3. 적의 매서운 공격을 대비해 섬광탄을 던진다.
셰이와 카야의 스펙을 보고, 낙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데미지 기댓값을 재빨리 계산했다.
데미지 기댓값은 2번이 더 높았다. 내가 아무리 지금 메인딜러 포지션이라고 해도, 레벨도 1이고 뭐 별 거 없었다. 낙인을 새로 찍고 두 명의 데미지를 증폭시키는 게 나 혼자 증폭 받는 것보다 이론상 좋았다.
셰이의 상태를 보면, 당장의 안전성 측면에선 3번이 좋았다. 상태이상 ‘실명’이 걸리기만 하면, 저놈의공격은 꽤 높은 확률로 미스가뜰 테니까.
하지만 감.
썩은물까지는 아니지만 고인물 취급 정도는 받았던 내 게이머로서의 감은, 1번을 고르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대가리 분쇄]
[위대한 일격!]
[유진이 제단의 수호기사에게 3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69]
[위대한 일격을 목도한 용사들이 잠시나마 공포를 잊었습니다.]
[셰이 멘탈리티 +4]
[유진 멘탈리티 +5]
[카야 멘탈리티 +6]
[제단의 수호기사에게서 수배범 발견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 답은 틀리지 않았다.
“그아아아아------------!!!”
“씨발--------!!”
“대장!!!”
“대장님!!!”
기사놈은 고통에 울부짖었고, 나는 기쁨에 울부짖었다. 아직 저놈이 뒤진 건 아니었지만, 침착할 수가없었다. 그건 셰이와 카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나처럼 정확한 체력을 보진 못하겠지만, 그녀들도 알 수 있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단숨에 저놈이 뒤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는 것을.
게다가.
“셰이!”
“네! 대장니임!!!”
비록 이번 턴이 끝나면 다시 1중첩으로 돌아가겠지만, 이번 턴만큼은 셰이의 속도가 6이 되어 저놈의 턴을 앞질렀다.
공격 대신 속도를 올리겠다는 도박이, 거의 성공의 열쇠가 되기 직전까지 온 것이다.
“사라져! 이단!!!”
입가에 잔뜩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셰이는 검을 휘둘렀다.
[정의의 심판]
[셰이가 제단의 수호기사에게 5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69]
[제단의 수호기사가 심판을 거부합니다.]
[제단의 수호기사가 상태이상 ‘기절’에 저항합니다.]
“어어…?”
남은 체력 4. 입힌 데미지 5.
그래서 갱신된 남은 체력은 -1.
근데.
왜, 저놈 안 쓰러져?
왜, 죽었다는 메시지가 안 떠?
“-------------.”
“아아아악!”
“안 돼------------!!!”
나는 턴제 전투라는 것도 망각하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손을 앞으로 뻗으며 달려가려했다. 하지만, 내 턴이 아니었다.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지독한 원한으로부터의 복수]
[제단의 수호기사를 감쌌던 모든 원한이 소모됩니다.]
[제단의 수호기사가 1의 체력을 회복하며 부활합니다.]
[모든 데미지 2 감소 상태가 해제됩니다.]
[매 공격이 최대데미지에 가까워지는 상태가 해제됩니다.]
[공격력이 3 증가합니다.]
[제단의 수호기사를 마지막으로 타격한 용사에게 두 배의 데미지(고정)를 되돌려줍니다.]
[셰이가 10의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남은 체력 0/17]
“……………….”
두쿠웅-!
[셰이가 사경에 들어섰습니다.]
[셰이에게 걸린 모든 버프가 사라집니다.]
[셰이의 모든 수치가 33% 감소합니다.]
[사경에 들어선 상태에서 데미지를 받으면 셰이는 사망합니다.]
[용사들의 마음속에 공포가 빠르게 스며들어 절망이 차오릅니다.]
[유진 멘탈리티 – 17]
[카야 멘탈리티 – 22]
거뭇거뭇했지만, 그나마 인간 형태는 유지했던 기사놈은 완전히 괴물로 변했고, 부활 후 데미지 반사라는 미친 기믹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반사의 대상은 하필 그동안 두 번 공격당해 피가 반이나 빠진 셰이였고.
더 재수가 없게도 딱뎀(체력에 딱 맞는 데미지)을 맞고 말았다.
사경(死境). 죽음의 경계.
더 롱 테러에서는 정말 특수한 능력이나 상황이 아니라면 단번에 체력이 0 이하로 깎여도 즉사하지 않았다. 대신 상태이상 ‘사경’ 상태에 빠졌다. 모든 수치가 33% 감소하며, 모든 버프가 풀린다. 그리고 단 한 번이라도 데미지를 입으면 영원히죽게 된다. 하드코어한 로그라이크 게임인 더 롱 테러가 가진 유일한 보험 장치, 유일한 안전 벨트.
하지만 용사가 한 번 사경에 빠져들면, 용사들은 물론이고 플레이하는 게이머들까지 심장이 철렁거렸다. 애지중지 키웠던 용사가 바람에 스치기만 해도 아예 없어지는, 그런 숨 막히는 상황. 어떻게든 후퇴해보려고, 어떻게든 사경에 빠진 용사가 죽기 전에 괴물을 죽여보려고 발악을 하게 된다.
물론 체력을 1 이상으로 회복시키면 사경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그만큼 다른 용사들의 턴이 낭비되고, 이미 모든 능력치가 3분의 1이나 까인 상황이기 때문에 사경에 또 빠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용사대의 멘탈리티나 체력 상태는 박살이 나있겠지.
그래도 더 롱 테러는 게임이었다.
체력이0이어도, 사경에 빠진 용사도 행동을 할 수 있었다. 비록 체력이 0이고, 수치가 까여있어도, 공격이나 자리 이동 등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셰이!!! 정신 차려어!!! 셰이!!!!!”
“셰이!! 셰이!!!”
나와 카야는 칠공에서 피를 내뿜으며 시체처럼 쓰러진 셰이를 붙잡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말,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진짜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최고로 하이한 기분이었는데, 어떻게 이래?
말이 돼?
부활 후 고정 데미지로 2배 반사라니? 말이 되냐고.
하, 하하, 하하하.
말이, 말이 안 되잖아.
저놈, 보스도 아니고. 여기, 인던이잖아.
근데 어떻게 이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선물 같은 셰이를 욕심낸 게 그렇게 아니꼬왔던 거야? 그래서 다시 치워버리려고?
아무리 최고난도라고 해도, 사람이 깰 수 있게는 만들어놔야 하는 거 아니….
[제단의 수호기사와 카야의 속도가 같습니다.]
“…….”
[속도 굴림]
하지만, 아직 절망은 끝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