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화 〉첫 인던(5) (14/218)



〈 14화 〉첫 인던(5)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Volente Deo – 신의 뜻이 철퇴에 깃듭니다.]
[제단의 수호자가 남은 체력에 상관없이 즉사합니다.]
[제단의 수호자가 죽었습니다.]
[보상 : 2금화, 정체불명의 일지, 정체불명의 종이]
[잠시나마 강림한 신의 뜻이 용사의 허한 마음을 보살펴줍니다.]
[유진 멘탈리티 +3]
[카야 멘탈리티 +10]

카야의 철퇴엔 힘이 실려있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움직임엔 굳건한 의지와 믿음이 담겨있었다. 내 명령은 단 1%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그녀의 의지였다.

이 한방이 마지막이  것이다.

그녀의 철퇴엔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었고, 그녀의 의지와 믿음은 상상 이상의 결과로 보답받았다.

보스 괴물을 제외하고 단 5%의 확률로 터지는 즉사.

그게 터져버린 것이다. 그건 정예괴물도 예외는 아니었고, 의미를 모를 단어가 메시지로 뜬 직후 괴물새끼는 빛의 기둥에 휩싸이더니 시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

빛의 기둥이 유지된 건 말 그대로 잠시였다. 1초에서 2초 사이?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아직 우리가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은 안도감.
기도를 그렇게 빡세게 해서 그런가 신은 정말로 존재하는구나 싶은 감탄.
그리고 혹여나 카야가 무리한 거라든가 스킬의 숨은 부작용 같은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


나는 여전히 빛의 기둥이 존재했던 곳을 향해 우두커니 서 있는 카야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인던에 들어오기 전 의뢰주 아저씨에게 보여주었던 미니 여신상 목걸이를 묵묵히 보고 있었다.

- 내, 내 믿음을, 내 추억을, 그런 식으로 더럽히다니. 절대, 용서할  없어.

- 네놈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여신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원치 않는 고통을 주입하지 않으시니.

마지막 철퇴를 휘두르기 전 카야의 말을 떠올렸다. 이번 전투에서  빌어먹을 새끼 때문에 그녀가 겪었을 고통이 대충 어떤 종류인지 대략이지만 가늠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상념을 깨는 대신, 조용히 붕대를 꺼내 그녀의 전신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특히나 부상이 심한 곳에 둘둘 감아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다소 민망한 부위도 어쩔 수 없이 훑고 지나갔으나, 붕대를 감는 나나 카야나 전혀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본디 미약한 지혈 작용이 있는 붕대는 상태이상 ‘출혈’에 대응되는 소모품이었지만, 지금은 그딴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상태에선 전투 속행이 불가능했다.

‘카야가 가지고 있는 치유 스킬들로는….’

현재 퓨어 힐링 스킬이 없었고, 게다가 원래 전투 수녀가 치유 수녀보다 힐링 계통 스킬의 끗발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면 탱커를 구하든지, 아니면 스킬 체인지를 알아봐야겠어.’

심장으로는 카야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도, 머리로는 용사대의 대장으로서 용사대의 미래를 구상했다.

전신에 힘이 없었지만 다시 한손 도끼를 움켜쥔 나는, 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제단에 다가갔다.  앞에 보상이라는 금화와 책 한 권, 그리고 종이 쪼가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슬금슬금 다가가다 잽싸게 보상들을 챙긴 나는 다시 제단에서 물러났다. 주의를 잔뜩 기울인 것 치곤 아무 일도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책을 펼쳐봤다.

[---- -- 강림 계획]

“아주 대놓고네.”

‘나 이단의 증거요.’하고 첫 쪽부터 분위기를 풀풀풍겼다. 강림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읽을 수가 없는 게 흠이었지만,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고  소관도 아니었다.

강림 계획?

강림한 상태가 아니니까 계획이 있는 것이고, 만약 이놈들이 믿는 무언가가 강림했었다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지도 않았을 거 아닌가.

증거를 넘겨서 의뢰주의 신뢰를 사고 보상을 받는 것. 그래서 그걸 기반으로 다시 던전행을 준비하는 것. 그것 외에는 굳이 신경 쓸 겨를이없었다.

책을 다시 덮고 종이쪼가리로 시선을 돌렸다. 딱 보니 약도같이 생겼다. 아마, 이 인던의 지도처럼 보였다. 다만 전체 인던이 밝혀진  아니었고 대략 4분의 1에서 3분의 1정도만 그린 지도 같았다. 수천 시간 하다보면 이 정도 견적 내는 건 기본이었다.

‘쓰읍. 의뢰주 아저씨한테 들었던 것보다도 더 큰데.’

지도도 고이접어 책 속에 집어넣고는 함께 짐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도끼를 다시 쥐어들며 제단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카야였다.

“대장.”

“어, 카야. 이 제단.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네 생각은 어때?”

“산산이 부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하지만, 대장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카야는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겉보기엔 상당히 창백한  말고는 평상시와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분명 뭔가 달라졌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나는 그녀의 회색 눈동자와 제단을 번갈아봤다. 이윽고 난 뒤로 물러섰다. 카야의 얼굴에서 의문이 떠올랐고, 난 그녀에게 턱짓했다.

“난 네 뜻을 존중하겠어. 부숴. 직접.”

“…대장.”

나는 대답 대신  걸음  물러났고, 카야는 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단을 향해 철퇴를 내리쳤다.

제단은 곧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증거로 가져갈  있는 게 또 줄어든 셈이지만….’

그건 언제든 다시 벌 수 있는 돈으로 치환될 것이지만.

 심하게 공격받은 것 같았던 그녀의 멘탈이 깊은 흉터로 남을지, 아니면 완전히 아물지는 지금이 아니면 때가 없었다.

난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관계도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아예 1%도영향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하지만, 이  같은 곳에서 지내면서 단순히 수치가, 메시지가 나타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전투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시스템이 지켜지는 것 같으면서도, 게임에는 구현되지 않았던… 너무나도 사람 같은 ‘당연한’ 것들이  괴리에 빠뜨려 괴롭혔다.

맞으면 아프고, 찔리면 피를 흘리고, 트라우마를 건드리면 발작하고. 사실 이런 건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게임에선 체력 –4, 멘탈리티 –10, 상태이상 ‘출혈’. 이런 메시지와 캐릭터가 고통스러워하는 일러스트만 잠깐 지나간  전부였다.

전투는 지극히 턴제 게임의 법칙을강요하면서, 그 외의 것들은 게임이 아니라 실제 사람 생활에 가깝게 한 것이… 실제 사람이었던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좆까 씨발.’

그러나 내가 겪은 고통이, 카야의 고통이. 1-2에서 겪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 그리고 언뜻 보이는 지극히 ‘사람적인’ 고뇌가.

내가 한유진이 아닌, 헨드릭으로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움직이게 만들고 있었다.

제단을 부순 카야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멘탈리티가 회복되었다는 메시지도 없었지만… 내가 보기엔 카야의 어둠이 조금 옅어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결정에 후회가 남지 않았다.

“으음, 카야. 오늘은 여기서 물러날 건데, 네 생각은 어때.”

“…대장의 뜻대로.”

후퇴하는 길.

함정이 없는 길이라는 건 진입하면서 알고 있었지만,후퇴하는 길은 조마조마했다. 그만큼 우리 상태는 아슬아슬했다.

‘제발. 라엘라라고 했나? 당신의 딸이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무사히 후퇴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쓰디쓴 후퇴가 용사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듭니다.]
[유진 멘탈리티 –4]
[카야 멘탈리티 –3]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멘탈리티가 계속해서 깎여나갔지만, 감내해야만 하는 거였다. 다행히, 멘탈리티가 상당히 까인 것 말고는 어떠한 변고도 없었다.

“얼른 돌아가서, 치료받고 씻고 쉬자.”

“예, 대장. 기왕이면, 따뜻한 수프도 먹고 싶습니다.”

“수프만 먹게? 빵이랑 고기도 먹어야지.”

“…빵.”

“어?”

“아니, 아닙니다.”

잿빛 머리를 흔들며, 카야는 인던을 빠져나갔다.

[인스턴트 던전 <이단과 금단 사이>에서 후퇴할 수 있습니다.]
[후퇴할  획득했던 경험치가 4분의 1로 감소합니다.]
[후퇴할 시 공략 정도에 따른 공략 보상이 4분의 1로 감소합니다.]

“미친.”

이곳에 와서 미친, 씨발 같은 험한 말의 빈도가 확 늘어난 기분이었다.

“그래도 후퇴 못해서 뒤지는 것보단 낫지.”

메시지는 후퇴하시겠습니까? 같은형식상의 질문은 띄우지도 않았다. 나는 괜한 반발심, 꼬움을 느끼며 중지를 들어올렸다. 동시에 출구에 발을 디뎠다.

**


미친 페널티 때문인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나랑 카야는 레벨업에 실패했다. 잡몹 세 마리와 정예 괴물 한 마리 가지고는 모자랐던 것이다. 만약 페널티가 없었다면 충분했을 수도 있었는데,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돈 줄 테니까 방 잡고 먼저 씻고 쉬고 있어.”

“대장?”

“난 의뢰주한테 의뢰 보고 해야지.”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보고하는데 나 혼자면 충분해. 굳이 둘이 같이 갈 필요도 없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순순히  말을 따르던 카야는 고집을 부렸다. 얘가 왜 이러지? 혹시 관계도에 이상이 생겼나 싶어 확인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카야. 원래 대장이 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너한테 대장 소리 듣는 거고.”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너 쉬어야 된다고. 당장 쓰러져도 안 이상하다니까?”

도리도리-

카야는 말 대신 고개를 저었다.

‘나참, 여긴 던전 안도 아닌데….’

나는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카야.  상태는 정말 심각해. 굉장히… 고약할 정도로 말이지.”

말을 끝내고 살짝 코를 찡그리자, 그때까지도 여전히 동상처럼 내 앞을 가로막던 카야의 표정이 일변했다.

“그, 그, 그.”

“음, 내 말이 뭔 말인지 알겠지?”

“아, 아, 알겠습니다. 빠, 빨리 오십시오.”

카야는 살짝 절뚝거리며 여관으로 향했다.

‘으음. 관계도엔 이상이 없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냄새나서 같이 못 가겠다고 말했으니, 변동이 있을까 싶었는데 관계도는 그런 식으로 쉽게 변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뭐, 실제로도 그녀의 전신에선 피냄새가 나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나는  길로 의뢰주 아저씨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중개소 근처 구석에 있던 작은 술집이었다.

아니니 다를까, 의뢰주 아저씨는 전의 그 테이블에서 맥주를 학살하고 있었다.

“으음!? 벌써 돌아온 건가?”

“예.”

“자네도 맥주 한  하겠나, 라고 말하기엔 굉장히 피곤해 보이는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장 그에게 경과를 보고했다.이단 숭배자 몇을 만나서 싸운 것과 ‘제단’을 목격한 것. 그리고 제단을 수호하는  강력한 숭배자와 싸워서 물리친 것.

책과 지도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았다. 일단은 우리 용사대가 전투 승리로 얻은 보상이었으니까.

“증거는, 어쩌다 보니 숭배자 머리 둘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술 드시는데 굳이 여기서 꺼내고 싶진않습니다만….”

“흐흠, 그건 그렇지. 그런데….”

내 말을 집중해서 듣던 아저씨가 돌연 목소리를 죽이며 속삭였다. 싸구려 맥주 냄새가 훅 끼쳤다.

“어떤 다른 증거도 찾을 수 없었나? 예를 들면, 기록적인 거라든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