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첫 인던(2)
5. 첫 인던(2)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되고 말고.”
“혹시, 직접 나서지 않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언제 그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시 맥주를 학살하고 있던 아저씨가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씁쓸해보였다.
“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만… 하하. 길드원들은 세일럼 바깥으로 나가지 못해. 나가려면 길드를 탈퇴하고 향후 10년 동안 재가입을 못 하지.”
“던전은 세일럼 안에 있는 거 아닙니까?”
“던전 입구까지는 그렇겠지, 던전은 별세계잖나? 수많은 용사들이 던전에 들어가도, 던전에서 다른 용사들을 만난 건 세일럼 역사상 손에 꼽을 정도로 들었고. 아닌가? 뭐 그래서 하염없이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다네. 사실 이렇게 일 안 하고 개인적으로 의뢰를 발주한 것도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그건 내 문제고.”
저벅저벅-
의뢰 장소로 향하는 카야의 발소리를 들으며 의뢰주 아저씨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내 한손 도끼와 카야의 철퇴는 한층 더 강해졌고, 짐은 두둑했다. 동전 주머니엔 빛나는 금화까지 짤랑이고 있었다.
수녀직을 건 카야의 맹세는 그 정도로 진실됐고 무거웠다.
“카야. 들어가기 전이니까 묻는 건데,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카야의 발걸음이 살짝 주춤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침묵하지 않았다.
“…대장은 제게 던전행은 운명이고, 운명에 같이 하는 용사대 또한 운명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잘것없는 제 운명을 걸어보았습니다. 지금은 엄밀히 말해 던전행은 아니지만, 더 나은 던전행을 위한 디딤돌을 쌓는 과정이니, 이 또한 운명을 걸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어, 그, 그래?”
“…예.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카야는 잠깐이나마 미소를 지었다. 바로 사라져서 놓칠 뻔했지만, 분명히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조잡한 중갑과 흉악한 철퇴마저 그녀의 미소를 가리지 못했다.
[관계도]
카야 : 2
뭐야, 이건 또 언제 올랐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카야. 음, 근데 미안하지만 내가 물어본 건 그쪽이 아니라….”
왜 내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린 건지.
내 말을 들은 카야의 귀는 술집에서 손을 잡았을 때보다 두 배는 빨개졌다.
“흠, 흠! 그, 그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카야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소리쳤다. 딱 봐도 당황한 것 같았다.
‘은근귀여운 면도 있네. 양파야 아주.’
나는 못 본 척하며 되물었다.
“이유?”
“예!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의뢰가 보상이 조건에 비해 좋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쩌면 제 능력이 향상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웃긴 표정을 지은 걸까.
카야는 또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듣기 좋은 중저음이 폐허를 채웠다.
“대장도 알다시피 저는 전투 수녀입니다. 단련해서 가꾼 육체와 라엘라님께서 내려주시는 신성력을 이용해 철퇴를 휘두르고 있습니다.”
아니, 굳이 휘두를 것 까지는 없어….
소리가 꼭 공기가 뭉개지는 것 같았다. 카야랑 힘 싸움 하면 내가 지는 거 아닐까.
“여신님께서는 자애와 관용을 관장하시고, 그만큼 최대한 모든 피조물들을 동등하게 사랑하려고 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여신님께 기도를 드리면, 그 노력을 알아주시는 분이기도 하십니다. 던전행만큼은 아니겠지만, 이 세계를 좀먹는 존재들에게 여신님의 자애를 베풀어준다면 제가 발휘할수 있는 힘도 강해지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습니다.”
여신님의 자애(물리)를 말하는 카야의 얼굴은 정말신실한 수녀 그 자체였지만, 철퇴는 당장이라도 이단의 면상을 빻아버릴 것 같은 흉흉함을 뽐내고 있었다.
카야의 마음이야 뭐 그렇다 치고, 중요한 건 스킬 레벨이 오를지도 모른다는 것. 스킬 구매 비용이나 장비 업그레이드 비용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저렴한 것이었는데 그걸 별도의 업그레이드 없이 레벨 업 할 수도 있다는 건 또 하나의 좋은 징조였다.
‘수녀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다 그런 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어쨌든 그런 이유라면 환영이었다. 1렙짜리 둘은 어딜 가나 리스크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니, 기왕이면 감당 가능한 선에서 보상이 더 좋은 곳으로 가서 준비를 단단히 한 다음 2차 도전을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30분 정도 더 걸어가자 딱 봐도 땅의 색깔이 달라지는 ‘경계’가 눈에 띄었다. 본 던전의 입구처럼 대놓고 ‘나 던전이오.’ 하지는 않았지만, 카야나 나나 둘 다 이 선을 넘어가는 순간 던전처럼 또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준비됐어, 카야?”
“물론입니다, 대장.”
나랑 카야는 동시에 발을 내디뎠다.
**
[인스턴트 던전 <이단과 금단 사이>에 입장했습니다.]
[인스턴트 던전 내에선 경험치 획득량이 감소합니다.]
[인스턴트던전에서는 후퇴할 수 있습니다.]
의뢰명은 [이단 숭배 및 금단의 마술 증거 수집]이었지만, 던전에 들어오니 이름이 바뀌었다. 이름 좀 바뀌는 게 뭐 대수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더 롱 테러에서는 사소한 거 하나에서 힌트가 숨어있을 수도 있었다. 그 힌트가 유용하건 그렇지 않건, 중요하든 사소하든 간에.
‘딱히 걸리는 건 없어보이고.’
더 롱 테러에서 인던은 없었지만, 비슷한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인던이라기보단, 저렙 용사들 뺑뺑이 돌리는 작업장 정도로 인식했던 각종 퀘스트 같은 것들이 있었다. 세일럼에 있던 창관에서 사고가 일어났다든지, 세일럼 시장이 암살을 당해 각종 길드의 운영이 중지되었다든지 등의 랜덤으로 등장하는 이벤트 등과 연계되는퀘스트들을 깨면 난이도에 따라 보상이 들어오는 식이었다.
던전은 1군이라 부르는 주 용사대가 깨고, 자잘한 경비 조달과 2군 육성을 세일럼 내 퀘스트로 충당하는 식.
말은 이렇게 거창하게했지만, 실제 플레이에선 별 비중이 없는 요소였다. 실제로 하나하나 용사를 선택하고 스킬과 스킬 대상을 선택해서 매 턴 기도를 해가는 1군 용사대가 99, 나머지 용사대는 1이 될까말까였다. 중간중간 화면 구석에 느낌표가 떠오르고, 버튼 몇 번 누르면 끝나는… 그런 느낌.
나는 인던과 퀘스트를 연관 짓고는 내심 인던도 퀘스트랑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그런 행복회로가 뇌 한쪽에서 살짝 불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온 것이냐!”
“이런 씨발! 대체 어디서!”
[숭배자를조우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조우에 속도 체크에서 용사대 전원의 속도가 3 감소합니다.]
[속도 체크]
[유진 : 4]
[카야 : 1]
[숭배자 : 4]
[유진과 숭배자의 속도가 같습니다.]
[속도 굴림]
[유진 : 3]
[숭배자 : 4]
[숭배자의 턴이 유진의 턴보다 앞서게 됩니다.]
[숭배자]
최대체력 : 22
공격력 : 4~5
방어력 : 1
속도 : 4
‘스펙은 대충 이전 난이도 1-1 평신도 수준. 첫 몹이라서 그런가 빡세진 않아.’
한마디로 깜짝 놀라게 한 것 치고는 일반 잡몹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자세를 잡고 몹의 공격을 대비했다.
“위선자에게 징벌을!”
[감히 바라건대]
[숭배자가 유진을 맹렬하게 규탄합니다.]
[어떤 존재가 유진을 바라봅니다.]
[유진이 상태이상 ‘무력’(1턴)에 걸렸습니다.]
[유진은 상태이상이 지속되는 동안 어떠한 공격행위와 수비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이 뭔 거지같은!”
숭배자가 비쩍 마른 검지로 날 가리킨 순간, 온 몸에 지네가 기어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고… 정말 믿을 수 없게도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섬광탄을 던질 수도, 달려가서 도끼로 저놈의 머리를 빠갤 수도 없었다. 뭔가를 하려 할 때마다 지네가 다시 내 몸 위를 종횡무진할 것만 같았다.
[일생 처음 겪어보는 끔찍한 경험에 공포심이 차오릅니다.]
[유진 멘탈리티 –8]
[유진이 턴을 넘깁니다.]
[유진이 상태이상 ‘무력’에서 회복되었습니다.]
턴을 넘기자마자 저놈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저 씨발새끼, 넌 나한테 모욕감을 줬어! 카야!”
“흐읍!”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파멸적인 일격!]
[카야가 평신도에게 18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4/22]
“끄아아악! 신이시여!!!”
“닥쳐! 감히 이단자 따위가!”
[적을 단호히 분쇄하는 광경이 일순간 공포심을 약하게 합니다.]
[유진 멘탈리티 +3]
카야의 철퇴는 숭배자의 얼굴을 단번에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녀는 한 번에 죽이지 못한 게 분한지 어깨를 들썩이다가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이번엔 뿅가 죽는 표정으로 신을 찾진 않았다.
“괜찮아졌어. 고마워. 신경 써줘서.”
“…다행입니다.”
카야는 휙 팔을 휘둘러 철퇴에 묻은 살점을 털어냈다. 그새 성장한 것일까. 아니면 무기를 업글한 덕분일까. 아무튼 존나 든든했다.
“으아아아아!”
[희생양 가르기]
[숭배자가 유진에게 1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14/15]
“큭.”
“대장!”
“괜찮아! 살짝 긁혔을 뿐이야!”
얼굴이 맷돌에 갈린 콩처럼 뭉개진 숭배자가 마구잡이로 휘두른 칼에 재수 없이 왼쪽 상완이 긁혔다. 내 방어력이 4였고 저놈 공격력이 4~5였으니, 50%의확률로 재수없게 데미지를 입었다.
“뒈져!”
[대가리 분쇄]
[유진이 숭배자에게 10의 데미지를 입혔습니다.]
[남은 체력 -6/22]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내 공격스킬은 제대로 이름값을 해냈다. 말 그대로숭배자놈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버린 것이다.
잽싸게 뒤로 펄쩍 뛰어 뇌수를 피한 나는 놈의 옷을 뒤져보았으나 개털이었다. 첫 잡몹이라 별 기대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경험치가 올랐기를 바랐다.
“대장.”
“괜찮아. 정말로.”
내 상처를 본 카야가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전투중이 아니었다. 여긴 완전히 게임이 아니니까 비전투 중에도 스킬 사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당연히 했었다.
결론은 불가.
시스템은 이 부분에서만큼은 엄격했다. 원리는 모른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 우리는 주변을 조금 더 샅샅이 살피며 나아갔다. 아직까진 갈림길이나 방이 없어서 일직선으로 쭈욱 나아가기만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딱히 증거라고 할 만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장.”
“어? 뭐라도 발견했어?”
“그, 어울리진 않는 말이지만, 보상 수령 조건 중엔 이단의 머리를 가져가는 것도 있지 않았습니까?”
“……아.”
머리를 감싸쥐었다.
차오르는 분노 때문에 도끼를 휘둘렀는데, 증거물을 완벽하게 박살내버렸다. 뭐, 얼굴을 뭉갠 카야는 그래도 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내 경우엔답이 없었다. 돈 때문에 도전한 인던인데, 금화 1개를 내가 박살내버렸다. 할 말이 없었다.
“저, 절대 대장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기억을 상기하는 차원에서 그런 것이니….”
“미안! 추후에 내 몫에서 1금화 뺄게.”
그럴 필요 없다고, 괜찮다고 말하는 카야를 대장의 권위로 조용히 만들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주변을 훑었다. 뭐라도 하지 않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차례 더 잡몹과 조우해서 유사한 과정을 거치며 유사한 결과가 나오자 기분이 상당히 짜증났다. 다치진 않았지만 얻는 건 없고, 재수도 없게 그 끔찍한 시선을 한 번 더 겪었으니까.
본 던전과는 다르게 가만히 있는다고 멘탈리티가 빨리는 것 같진 않자, 함정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주저앉아 음식을 꺼냈다.
제때 허기를 채우자 소폭 체력이 회복했고, 카야가 식후 기도를 마칠 때까지 잠깐의 휴식을 취하던 그때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으으-
“카야!”
“대장!”
일직선이던 통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기가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