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첫 인던(1)
‘근데, 우리 지금 아무 것도 없잖아?’
보상에 혹해서 일단 종이는 집어들었지만, 수중엔 돈도 물품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건 몸뚱이와 기본 무기와 방어구뿐.
그 사실은 카야도 곧 깨달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딱 봐도 전투에 대한 경고까지 써 있는데 어떠한 준비도 없이 가는 건 멍청한 짓.
아쉬움을 삼키며 종이를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아, 이단을 때려잡을 용자들이 여기 계셨구만!”
내 손에 들려있는 종이를 본 수염이 풍성한 어떤 아저씨가 이쪽으로 쿵쿵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그는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 등을 퍽퍽 두들기더니 다짜고짜 내 손목을 잡더니 한쪽으로 이끌었다. 이새끼 뭐지 싶어서 힘을 줘봤지만 부질없을 정도로 엄청난 완력 차이가 있었고, 나는 고갯짓으로 철퇴에 손을 가져다 대는 카야를 말렸다.
그렇게 내가 끌려간 곳은 작은 술집이었다. 수염이 풍성해 턱과 목이 안 보이는 아저씨는 그대로 구석 테이블에 가서 앉은 뒤 맞은편을 수염으로, 아니 턱으로 가리켰다.
“여기 맥주 셋!”
“아니, 갑자기 술은….”
“내가 사는 거니까 걱정 말고!”
카야는 여전히 손잡이에 손을 댔다 뗐다 하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고, 풍성충 아저씨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껄껄 웃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그리고 저희한테 이러는 의도가 뭐고요.”
“화끈한 용자시구만. 그래. 아직 술을 마시진 않았지만, 이쪽도 화끈하게 나와야겠지.”
그는 직후에 나온 맥주잔을 그대로 들이켜 순식간에 반절을 비워냈다.
“끄윽. 술을 마셨으니 더 화끈하게 말하도록 하지. 간단해. 난 그 의뢰를 발주한 사람이야.”
“의뢰주?”
“그럼. 정확히는 3일 넘게 아무도 안 맡으려고 해서 실시간으로 속이 타들어가고 있는 의뢰주지. 보상도 올렸는데도 아무런 반응조차 없지 뭔가. 경고를 집어넣은 게 잘못이었나?”
살인적이고 비정상적인 물가를 자랑하는 세일럼에서 살아가기 위해, 돈 되는 일이라면 앵간히 좆같은 일이 아니고서야 보상 좋은 일을 꺼리는 하루살이들은 거의 없었다.
인스턴트 던전 로비, 그러니까 의뢰소개소 같은 아까 그곳에 드나들 정도의 사람이면 우리 같은 돈이 떨어져서 당장 던전행이 불가한 반푼어치 용사, 혹은 하루살이들일게 뻔했다.
우리야 초행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3일 동안 수많은 하루살이들이 거른 의뢰?
쎄하다.
조금 전에 리베아라는 수녀의 말에서 느껴졌던 찝찝함과는 다른 종류의 찝찝함이 느껴졌다.
‘아직 맥주는 입에 안 댔으니, 얻어먹은 건 없지. 발을 빼자.’
땡전 한 푼 없어서 일을 가릴 처지는 아니긴 하다만, 묫자리를 찾으러가는 건 오버였다.
어떻게 하면 매끄러운 거절 멘트를 칠까 생각중이었는데, 아저씨가 남은 맥주를 단번에 비우며 외쳤다.
“망설이고 있는 거 같은데, 지원을 해주지.”
“지원 말입니까?”
“그래! 3일 동안 의뢰서에 반응한 게 자네가 처음이라 나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어! 억지로 끌고 온 건 사과하겠네.”
맥주 한 잔 더!
아저씨는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솥뚜껑만한 손이 부들부들 떨리자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다행히 테이블을 쪼개진다거나 맥주잔이 터지지는 않았다.
“구구절절 내 사연을 말해봐야 구질구질하고 공감도 안 될 테니 요점만 말하지. 일단 확실히 맡겠다고 한다면 선수금으로 3금화를 주겠네. 거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품들도 제공하지. 단, 그곳에 들어갔다가 왔다는 최소한의 흔적이나 정보를 가져와야 하네. 어떤가.”
3금화에 기본 필요물품 추가 지원이라.
합하면 최소 5골드 이상이었다.
“저희는 그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일단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다 듣고 판단하고 싶습니다만….”
“하하,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그는 맥주잔을 전투적으로비워내며 [이단 숭배 및 금단의 마술 증거 수집] 의뢰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어떤 게 증거가 되는지, 어떻게 알아보는지, 그곳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지, 이단 숭배자들과 금기를 어긴 마술사들은 어느 정도로 강하고 수는 얼마나 있는지 등등.
“마지막 정보는 추정치에 불과하지만, 이 정도면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해준 거 같구만. 어떤가.”
“일단은 동료랑 상의해보겠습니다.”
“좋지! 3일도 기다렸는데 그 정도도 못 기다릴까.”
나는 카야와 함께 반대쪽 구석으로 향한 다음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카야가 움찔한 것 같았으나 안 들리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카야. 네 생각은 어때.”
“…대장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아니, 내가 대장이라도 독단적으로 움직이고 싶진 않아. 긴박한 순간이 아니라면 말이야. 내 섣부른 판단으로 우리가 위험한 곳에 꼬라박는 일은 지양하고 싶으니까.”
좋게 말하면 동료의 의견을 수용할 줄 아는 대장이지만, 안 좋게 말하면 독박 쓰기 싫다는 쫄보 마인드였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카야에 달렸지만, 카야는 내가 전자로 보였나보다.
카야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꼭 우리끼리 전부 수집해야 한다는 말도 없었고, 이단을 전부 없애야 한다는 조건도 없었으니 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만?”
“아무래도 저희 둘만 가기엔 장소가 좀 넓은 게 아닌지….”
동의의 표시로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단이랑 금기를 어긴 마술사들을 모조리 철퇴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는 안 해서 다행이네.’
카야가 이 의뢰를 가리킨 순간, 1-1에서 보였던 순간적인 광기 어린 모습이 오버랩되며 내가 감당 못할 적극성을 띄면 어쩌나 싶었는데.
‘미안 카야. 내가 널 나도 모르게 미친년으로 봤나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 피랑 살점이 묻은 철퇴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신을 찬양하는 걸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재빠르게 자기합리화를 마친 나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아저씨는 그새 다섯 번째 맥주잔을 해치운 참이었다. 방광이 걱정될 정도였다.
“오, 그래! 상의 결과는 어찌 나왔나?”
“다른 건 몰라도, 인원이 걸림돌이 될 거 같습니다. 아무래도 둘이서 뭔가 유의미한 결과를 내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하하! 난 또 뭐라고!”
아저씨는 쾅쾅 테이블을 두드리며 파안대소했다.
“당연히 한 번에 끝날 거라 생각한 건 아니야. 애초에 내가 보상에도 그리 적어놨지 않나. 확실한 증거 하나당 1금화라고.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하길 바랐다면 그런 식으로 정하지 않았어. 15금화, 30금화 이런 식으로 적었겠지. 안 그런가?”
일리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았다.
‘저 아저씨만 해도 나 같은 건 그냥 찜쪄먹을 정도로 존나 쎈데. 그건 저 아저씨가 나 끌고 왔을 때도 느꼈을 거고. 아무리 못해도 최소 3렙은 되는 거 같은데, 어째서 나 같은 허접한테 돈을 뿌리는 거지? 정말로 사람이 없어서? 아니면… 아무나 상관없어서?’
게다가 전혀 교단 관련 사람 같지도 않고, 무슨 관련이 있기에 이런 의뢰를 발주한 거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그건 선을 넘는 일이었다. 의뢰주 아저씨가 우리의 개인 사정을 묻지 않는 이상, 우리도 아저씨의 개인 사정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게 의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지 않는 이상에는.
본 던전의 지랄맞은 난이도를 생각했을 때, 인던(인스턴트 던전)이라고 딱히 쉬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반려 쪽에 천칭이 살짝 기우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카야가 대뜸 손을 잡더니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귀와 뒷목 부분이 살짝 빨개져있었다.
‘수녀의 감인가? 아니면, 진짜로 이단을 잡고 싶어서?’
반려 쪽에 기울어졌던 천칭은 카야의 기습적인 스킨십을 통한 의사 표현으로 인해 중립으로 돌아왔다. 내가 아무리 그쪽 방면에 약하다곤 하지만, 언제 뒤질지 모르는 이곳에서 꼴랑 손 한 번 잡혔다고 바로 넘어갈 정도의 머저리는 아닌….
“후우… 하긴. 아무리 일부만 찾아도 된다고는 하지만 단 둘이서 가기는 부담스러운 면도 있겠지. 그래도 이것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뭐지? 말로 안 되니 강제로 집어넣겠다는 건가!’
카야의 손을 잡고 언제든지 뛰쳐나갈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아저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자네들만 비밀로 한다면, 내가 자네들의 무기를 한 단계 상승시켜줄 수 있네. 반쯤 나가긴 했지만, 대장장이 길드 소속이니까.”
뭐? 무기 업그레이드가 공짜라고!?
나도 모르게 카야의 손을 꽉 잡고 말았다. 그녀가 손을 꼼지락대고 나서야 황급히 손을 풀었지만, 쉽사리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더 롱 테러>에서 용사들을 키우며 가장 짜증나는 게 뭔지 꼽으라면 빡칠 요소가 하도 다양해서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라지만, 수많은 게이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욕 나오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스킬 구매 비용. 그리고 무기와 방어구 업그레이드비용.
용사의 기본 스킬은 처음 영입했을 때 랜덤으로 정해지는 4개로 쭉 가야 했는데, 스킬을 바꾸고 싶으면 던전 내에서 낮은 확률로 얻거나 세일럼 내 용사 훈련소에서 구입해야 했다. 근데 뭐, 스킬이야 4개 다 좋게 뽑히면 최상이었지만 2개 정도만 잘 뽑혀도 모든 용사들이 다 그렇게 뽑히지 않는 이상 던전은 돌만 했다. 4개 스킬을 같은 빈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드물었고.
하지만 무기와 방어구는 그게 아니었다. 세일럼 내의 대장장이 길드에서 지급하는 기본 무기와 방어구만이 던전의 오염을 견딜 수 있었다. 상인놈들이 말하는 방식과 유사한 기술이었다. 때문에 용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에게 수리를 맡기고, 업그레이드를 해야 했다.
업그레이드는 총 9번 할 수 있었는데, 던전 방을 돌면서얻은 수익의 최소 반 이상은 꼬라박아야 했다. 그것도 메인 딜러와 탱커를 우선적으로 올려주는 게 한계였고. 그 정도로 업그레이드 비용이 쌍욕 나올만큼 언밸런스해서, 게임하면서 10렙 무기나 10렙 방어구를 찍어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 업그레이드를, 이제 막 던전에 한 번 갔다 온, 그것도 1-3까지밖에 못 갔다온 우리가 공짜로 한 번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앞선 금화 보상은 들러리로 보일만큼 엄청난 것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허.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추가 조건이라? 더 달라고 하는 건 아무리 사람이 없다 해도 조금….”
“아뇨. 무기 단계의 상승을 먼저 받고 싶습니다.”
“….”
아저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해했다.
먹튀의 가능성이 떠오른 것이겠지. 그래봤자 저쪽은 이쪽보다 강자인데다가 길드 소속이고 이쪽은 발에 치일만큼 널리고 널린 1레벨짜리 쪼렙 용사들.
“나는 약속했던 보상보다 더 많은 걸 약속했고, 그것도 모자라 발각되면 길드에서 박탈당할 위험성까지 짊어지며 무기 단계를 상승시켜주기로 약속했지. 그렇게 해서라도 자네들을 붙잡아두려고 노력했는데, 그러는 자네들은 내게 어떠한 신임을 주었나?”
풍성충 아저씨 말이 맞긴 해.
역시 이 조건은 무리였을까.
무기 업글을 받고 나면 한결 든든해지니 한발자국 더 욕심을 부려본 것인데, 괜히 찔렀나. 그래도 본 던전에서 겪었던 꼴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보험을 들고 싶었는데.
텄나.
마땅히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그 때.
탁-
카야가 테이블 위에 작은 여신 모양의 장식품이 달린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날 한 차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고는 아저씨에게 고했다.
“만일 대장과 제가 의뢰를 수행하기 전 의뢰주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저는 기꺼이 자애의 길에서 벗어나, 저버린 신뢰만큼 의뢰주의 밑에서 봉사하겠습니다.”
“…카야?”
다시 찾아온 침묵은 묵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