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돈과 사람(2)
4. 돈과 사람(2)
카야보다반걸음 정도 뒤에서 따라가면서 그녀의 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이미 게임의 본 궤도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백 번 양보해서 관계도까진 그렇다 칠 수 있었다. 원래 사람 살다보면 친해질 수도 있는 거고 사이가 더러워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물며 몇날 며칠 언제 뒤질지 모르는 던전에서 함께 싸우며 별 꼴을 다 보는 사이인데, 아무리 비지니스적인관계로시작했다 하더라도 관계의 변화가 없을 수는 없었다.
멘텔리티가 박살난 놈이 동료에게 패드립을 날리고 뒤에서 칼빵을 먹인다거나, 반대로 낮은 확률로 각성에 성공한 놈이 용사대의 구세주가 되어 무사히 후퇴에 성공하거나.
게이머로서는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정신 상태를 멘탈리티라는 수치를 통해 간접적으로밖에 느낄 수 없었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걸 내가 여기에 들어온 이후에 굳이 수치화된 건 이해 가능한 범주였다.
그런데 인스턴스 던전?
알바 말고 다른 돈벌이 수단을 강구하던 때에 메시지가 뜬 걸 보면, 분명 날 관찰하고 놀리려는 의도가 있어보이지만 그런 건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더 롱 테러>의 던전은 본디 3구역, 각기 10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DLC에선 새롭게 4구역이 개방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 기껏해야 공략해야 할 보스는 4개에 방은 40개 언저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인스턴스 던전의 존재는 그 근간을 송두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던전’ 외의 던전.
그곳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나, 그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본래의 던전 또한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했다.
카야의 관계도가 열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불안정성이 확 올라갔다.
“…대장.”
“….”
“대장!”
“어, 어.”
“지부에 도착했습니다만… 대장 안색이 그리 좋아보이진 않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아무 것도 아냐.”
상념을 털어냈다. 제1목표를 잊어서는 안 됐다.
생존하는 것.
이 세상의 요소가 어떻게 변하든, 내가 던전을 정복해야 한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어서오세요, 자매님.”
“안녕하십니까. 본산에서 자애의 길을 걷다 세일럼에 오게 된 카야 에펜젤입니다.”
“카야 자매님이시군요. 저는 관용의 길을 걷고 있는 세스티아라고 해요.”
카야가 믿고 있는 신이 자애와 관용의 여신, 라엘라라고 했던가. 세스티아라는 수녀는 딱 봐도 전투와는 거리가 멀게 생겼으니 전투 쪽이 아닌 치유 쪽이라 보는 게 맞았다.
‘그럼 대가리에 철퇴를 꽂는 게 자애의 길이라고? 생긴 거랑 다르게 무서운 여신이네.’
저 멀리 보이는 여신의 동상을 흘끔 보며 잠시 잡생각을 하다가, 두 여자의 시선이 내게 쏠린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세스티아 자매님. 이쪽은 제가 몸담고 있는 용사대의 대장 헨드릭입니다. 비록 인연이 맺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신이 굳건하고 믿을 수 있으며 영혼이 선한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카야의 소개가 거창한 감이 있지만, 헨드릭이라고 합니다. 카야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반가워요, 헨드릭님. 따스한 자애와 냉철한 관용이 함께하시길.”
뭐, 처음 보는이에게 소개하는 거니 어느 정도 립 서비스가 들어간 것이겠지만 카야가 날 이 정도까지 좋게 봐주고 있을 줄은 몰랐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관계도가 높아지면 무슨 보너스가 있을 수도 있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여전히 세스티아라는 수녀가 날 물끄러미 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카야. 난 적당히 수도원 좀 구경하고 있을 테니, 볼일 다 보면 알아서 와.”
“알겠습니다, 대장.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카야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스티아와 함께 수도원 ‘내부’로 들어갔다.
“카야 자매님.”
“예, 세스티아 자매님.”
“던전행은 어떠셨나요?”
“…들었던 것보다, 상상했던 것보다 어둡고 무서웠습니다. 비록 초입에서 모종의 이유로 던전 밖으로 튕겨져 나왔습니다만.”
“자매님, 그건 전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에요. 우리들은 필멸자에 불과하고, 필멸자에게 공포란 어쩔 수 없는 본능과 같은 것이니까요.”
세스티아의 따스한 말에도 카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느꼈던 공포와는 별개로, 제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름 힘들게 자애의 길을 걸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던전 안에선 추태를 많이 부렸습니다. 제가 살아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대장 덕분이었습니다.”
“헨드릭님 말씀이시군요.”
“예. 저는 대장에게 강한 운명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머머.”
자애와 관용의 여신의 교리를 연구하고 전파하고 실천하는 ‘관용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은, 부정적인 것들에게 고통받고 있는 세상 모든 것이 가여워 ‘자애의 길’을 걷고 있는 교단의 전투 수녀들을 동경하며 존경했다. 설령 상대가 이제 갓 수련을 끝낸 풋내기 수녀라고 해도.
세일럼 지부의 두 수녀장 중 하나, ‘관용의 길’의 길잡이인 세스티아는 던전행이 끝나면 반드시 세일럼 지부에 들르게 되어 있는 교단의 규칙 때문에 빳빳한 정복을 입고 쭈뼛거리는 파릇파릇한 전투수녀를 보며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여신께서는 남녀간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응원하신답니다.”
“…예?! 자, 자매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뒤늦게 카야는 펄쩍 뛰었지만, 세스티아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농이었어요, 카야 자매님.”
“아….”
“그래도 이 정도면, 던전행의 경과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으시겠죠?”
카야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이 겪었던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다.
“특히 두 번째 방에서는 기괴한 꿈 같은 것을 꾸었는데….”
**
카야는 한 시간이 넘게 나오지 않았다. 수도원 내부를 제외한 곳은 꽤 넓긴 했지만, 소담한 꽃밭과 예쁜 여신상을 제외하면 그다지 볼거리는 없었다.
장난삼아 여신상 앞에 가서 기도하는 척 하며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해 물었지만, 당연히 대답 같은 건 없었다.
‘하긴. 신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신성력은 엄연히 실존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났다. 존재가 있는데도, 나한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기야. 자길 따르지도 믿지도 않는 놈이 뭐가 이쁘다고 얘길 들어주겠어. 나 같아도 그러겠네.’
가만히 멍 때리는 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자연히 잡생각이 많아졌다. 카야가 한 시간 이내로 나올 줄 알고 기다린 것인데, 지금이라도 쪽지 같은 걸 남겨놓고 혼자 나가서 인스턴스 던전에 대해 알아보러 가야 하나 생각하던 그 때였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신도님은 아니신 것 같고, 용사님이신가요?”
“아, 예. 그렇습니다. 경력은 얼마 안 되지만….”
새로운 수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이쪽 수녀도 전투 수녀는 아닌 것 같았는데, 키는 작진 않았지만 삐쩍 마르고 체격도 왜소했다. 결정적으로 안색이 꽤나 어두웠다. 누가 보면 연속으로 장례식이라도 치른 줄 알 정도로. 그럼에도 말투는 기본적인 상냥함을 띄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기본적인 예의로 대꾸해주었다.
“저, 용사님은 혹시 의뢰 같은 것도 받으시나요?”
“예?”
근데 이 수녀는 떠나지 않고 이상한 소릴 하고 있었다.
“의뢰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아아… 그게.”
내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여긴 한 교단의 지부였다. 그것도 던전 도시 세일럼 지부. 다른 곳보다 교단이 보유한 자체적인 무력 또한 다른 지부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세일럼은 생각보다 커서, 던전에 가까운 중심부에서 벗어나면 용사직을 포기하고 하루살이로 전락한 이들이 모여살고 있는 곳이 꽤 많은 것 같았다. 그 중에는 온갖 일을 처리하는 이들도 많은 것 같았고.
즉, 자신 같은 풋내기 용사에게 의뢰라는 건 굉장히 동떨어진 소리라는 것이었다. 그건 나도 알고 교단의 수녀도 아는 이야길 텐데.
“으음, 그게.”
‘답답해 죽겠네. 말을 하려면 하든가. 다짜고짜 의뢰 가능하냐 했으면서 왜 이렇게 뜸을 들여.’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수녀에게 차마 뭐라 소리칠 수도 없고, 가만히 머리만 긁적이자 이리 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수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 일단 저는 관용의 길을 걷고 있는 리베아라고 해요.”
“헨드릭입니다.”
“네. 헨드릭님. 그게 그러니까 말이에요.”
리베아라 자신을 소개한 수녀는 한숨을 연거푸 쉬었다.
“사실, 자매 중에 한 명이 사라졌어요.”
“예?”
갑자기?
“아니, 수녀의 실종 문제는 교단에서 해결하는 게.”
“교단에선, 사실상 손을 놓은 상황이에요.”
뭐지.
뭔가 느낌이 별로였다.
교단의 수녀가 실종됐는데, 교단에서 손을 놓았다고? 게다가 그걸, 높은 직위도 아닌 것 같은 평범한 수녀가 처음 보는 용사한테 의뢰랍시고 일을 맡긴다고?
“아. 음. 저는 이제 막 던전을 경험해본 뜨내기일 뿐입니다. 누굴 찾고 이런 거에 재주가 없어요. 죄송하지만 교단도 해결하지 못했다면 저 같은 건 도움이 못 될 것 같습니다.”
“교단에서 손을 놓았다는 게 그런 뜻이 아니에요! 교단은…!”
“리베아 자매님. 헨드릭님.”
내가 에둘러 거절하자 한 걸음 다가오며 뭐라 말하려던 리베아는 저쪽에서 들려오는 호칭에 몸을 굳혔다.
타이밍 좋게 나오는 카야와 세스티아였다.
“기, 길잡이님.”
“네. 리베아 자매님. 헨드릭님과는 대화 중이셨어요? 혹시 제가 도중에 끊었다면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그럼 다시 기도하러 들어가볼게요.”
리베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순식간에 수도원 안쪽으로 사라졌다.
‘진짜 뭐지. 뭔가 찝찝한데.’
하지만 카야의 얼굴, 정확히는 뭔가 속이 후련한 것 같은 표정을 보니 뭔진 모르지만 일이 잘 풀린 모양이었다. 뭐, 처음 보는 수녀에게서 느껴지는 찝찝함 같은 건 굳이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대장.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신 것 같은데….”
“아니, 별로. 일은 다 끝났고?”
“예. 세스티아 자매님. 다음에 다시 들르겠습니다.”
“카야 자매님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에요. 헨드릭님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세스티아의 미소에 적당히 응대한 뒤, 카야와 함께 수도원을 떠났다.
**
[세일럼 교외에서 날뛰는 벌레들의 근원지를 탐색 및 퇴치]
[세일럼 교외에서 출몰하는 언데드 소탕 및 정화]
[흡혈귀 조사]
여관 1층에서 남은 돈으로 가볍게 점심을 먹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제 수중에 돈은 거의 없었다. 카야는 아쉽게도 다시 무장을 걸쳤고, 나는 인스턴스 던전 항목의 메시지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시판이 있었고, 게시판에 이런저런 내용이 적혀있는 종이들이 걸려있었다.
‘꼴이 꼭 세일럼 판 인력중개사무소 같네.’
이게 어떻게 인스턴스 던전으로 향하는지는 제쳐두고, 잠시 실없는 생각을 하며 뭐가 좋을지 둘러보던 차에 카야가 검지로 어느 종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장. 저건 어떻습니까?”
[이단 숭배 및 금단의 마술 증거 수집]
* 이단 숭배자 및 금기를 어긴 마술사와의 전투 가능성 높음
‘수녀라서 그런가? 딱 봐도 쉬워보일 거 같진 않은데….’
내키지 않았다. 여기나 이곳이나, 예나 지금이나 미치광이는 상종하는 거 자체가 피곤한 법이었다. 게다가 금기를 어긴 마술사라니, 뭔가 존나 쎌 거 같지 않은가.
* 보상 : (확실한) 증거 하나당 1금화. (확실한) 이단 숭배자 혹은 금기를 어긴 마술사의 목 하나당 1금화.(급에 따라 가감이 있을 수 있음)
그러나 덮어놓고 제끼기에는 생각보다 보상이 짭짤해보였다.